더세레 (18) 썸네일형 리스트형 일만 번의 첫사랑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야. 흠. 잠시만.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건 좀 용기가 필요 한 듯 하니까. 자. 손톱 한 번 봐주고, 괜히 목도 한 번 풀어주고. 머리 끝도 매만졌으니… 이제 괜찮아. 오늘도 나는 멋있고 평소와 별로 다를 건 없어.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은 하면서 사는 자청연이지. 아차. 그런데 자네 쪽이 들어 줄 준비가 되었는지 모르겠네? -- 일전의 전투로 중앙청의 폐쇄가 결정 된 게 며칠 전이다. 순직한 두 명의 요원의 흔적은 청주 지청의 근조 화관으로 남아있었다. 다만 대영청은 언제나 조의와 등을 맞대는 곳이었기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해도 그리 오래 가질 못했다. 실제로 청연 또한 당장 순직한 요원들을 위해 묵념을 가진 게 전부였다. 오히려 두 명이라니 싸게 먹힌 게 아닐까 싶다ㅡ는.. [AU] 실수 탄피가 튀는 걸 목격 하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실수했다는 걸.아주 중요한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걸. -- 상냥한 그는 못 보던 암갈색 상자를 들고 왔다. 언제나처럼 희게 웃는 미소. 저를 혈족으로 만든 자를 석궁으로 쏴 죽이는 와중에도 지금처럼 웃으며보고만 있던 사람이라, 그 미소가 사람 좋단 것과 거리가 멀단 건 안다. 그래도 그는 퍽 다정했고 청연에게 '나쁜 걸'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믿고 상자를 받아 들였다. "열어 봐." 청연은 상자를 열었다. 암갈색 나무 상자 안에는 리볼버 한 정이 들어가 있었다. 날씬하고 얼마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도 딱 한 가지가 달랐다. 은으로 만든 총. 닿기만 해도 치명적으로 살이 문드러지는 치명적인 독. 헌터들이 사용하는 무기에는 언제나 이 .. 운명은 물처럼 흐르고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오네.아. 그대 너무 아쉬워 하지 않기를. 운명은 물처럼 흐르는 것이니까. 우리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나는 가방을 챙기네. 언젠간 떠날 사람이었기에 늘리지 않으려 애썼는데도 애정만큼이나 짐이 쌓였어. 몇 개의 택배를 부치고 텅빈 방을 둘러보는 우리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스쳐.내가 처음 이 곳에 왔을 땐 어땠더라. 몇 년 전의 날을 돌이키며 닳아버린 말을 꺼내 놓는다. 사람은 끝을 맞이 하기 전 시작을 되살려보는 존재.우리의 처음을 기억 해보네. 서로의 기억을 짜맞춰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고 네가 이랬다, 아니다 따지는 시간. 그 시간까지 즐겁네. 기억은 편리하게도 좋았던 순간만을 남겨 놓아, 당신과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웃을 수 있게 해주었다. 아. 다시 스치우는구나. 찰나의 침묵 속 어찌.. T의 공백 소파에서 잠든 유환의 숨소리에 책 넘기는 소리를 얹었다. 그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스탠드 불빛에 눈이 아파오자 청연은 안경을 벗곤 책을 포개서 무릎 위에 올렸다. 눈가를 주무르고 스탠드를 끈 다음, 어두운 방 안의 천장을 바라보며 심장 소리를 들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와중에도 삶이 존재한다. 맛있는 걸 먹고 술을 마시고 잡담을 나누고 영화를 보고 운동을 하며 책을 읽은 다음 잠자리에 드는 그런 평범한 사람의 일상. - 모든 정의가 끝난다면, 너도 네 일상이 덧없게 느껴 질 거야. 한 때 그런 말을 했던 존재가 있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먼. 이해자라고 하기에도 조금 다른.매트릭스의 빨간약을 먼저 선택한 선지자가. 그를 S라고 불러야 할 지 H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조금 .. 지옥의 소개팅 자청연은 삼십이년의 삶을 돌이켜 볼 때마다, 자신을 예스맨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윗사람의 명령에 잠자코 따르는 편인 걸 포함해, 주변의 의견이나 권유에는 가능한 예스라는 대답을 돌려준다는 어처구니없는 자체평가의 결과였다. 실제로 그가 예스맨인지는 차지하더라도 예스의 대답을 돌려주는 이유란 참 단순했다. 주관이 없어서는 당연히 아니고, 호감을 쉽게 높이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며칠 전 그는 베타팀의 어떤 아리따운 금발을 지닌 아가씨의 말을 넘길 수가 없었다. - 좀처럼 접점이 없다면서 나한테 말을 건네 왔는데, 청연이라면 관심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어떤 일 이길래? 이틀 전 르네 하워드, 약칭 '르네 아가씨' 께서는 햇빛을 담뿍 머금은 황금 모래사장 같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약간 .. 느린 봄 그 해는 유독 봄이 느리게 흘렀다. 착각 인 줄 알았지만 자두꽃이 피는 시기가 예년보다 늦었다. 조부와 형들이 친척을 만나러 간 사이, 마당 바위에 앉아 가만 자두꽃을 보던 청연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 건 누이였다. 요즈음 서리가 내려 앉은 날이 많아서 그래. 날이 개면, 훨씬 따뜻한 햇살이 며칠만 내리 쬐이면 금새 봉오리가 필 거라는 말이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누이에게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자두나무를 보았을 뿐인데 마음을 읽은 것 마냥 그녀는 청연이 원하는 걸 알았다. 누이는 청연이 자두는 먹지 않아도 자두꽃을 좋아하는 것을 안다. 신기한 누이다. "청연아, 심심하니?""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어차피 막내인 아영이는 또 떡을 받아온답시고 갔다가 함흥차사로 조.. 달의 뒷면과 그림자 새벽녘에 기분 좋게 깬 것 치고는 일진이 참으로 미묘했다. 면도를 하는 와중에 울리는 알림에 부리나케 두루마기를 챙겨 나섰는데, 번화가도 주택가도 아닌 영동대교 도로 위 갓길에 나타난 마물이라니. 외부인의 시야를 차단한다는 결계사의 결계야 완벽하겠지만, 겨울날 강가에 불어오는 바람은 마주 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섧게 만들었다. 게다가 유난히 아침 공기가 시리지 않는가. 마물이고 나발이고 이 짓을 뭣하러 하고 있는가 하는 탄식이야 이미 몇 년 째 하던 일이었다. 다만 마물을 랜덤으로 생성해서 서울 시내에 배치하는 어플을 쥔 잔학무도한 악의 비밀결사라도 있는가, 하는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일이 터질 뻔 했다. 전세버스 위에 올라타려 드는 마물을 보며 그때서야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청연은.. [AU] 나께서는 기억 하시는가 창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어스름했다. 술잔에 꽃잎을 띄워 신선 놀음을 했던 날에 보았던 달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술잔조차 쥐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 화상이었구나. 그걸 몰랐다. 참으로, 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치였고 아둔했던 자였다. 쥐고나며 자란 것에 아무런 의무도 모르고 의심 없이, 그저 살아 있는 것에 감사 할 줄 모르던 치기만이 가득한 사내아이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가혹 해 질 것은 없었다. 병가상사와 새옹지마라 하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잃기 까지 걸린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혼자서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제 오물조차 스스로 치우지 못하는 반병신이 되어 알게 된 수치는 도무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어찌 하면 좋은가. 이 원통함을. 수치와, 치욕..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