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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세레

T의 공백


소파에서 잠든 유환의 숨소리에 책 넘기는 소리를 얹었다. 그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스탠드 불빛에 눈이 아파오자 청연은 안경을 벗곤 책을 포개서 무릎 위에 올렸다. 눈가를 주무르고 스탠드를 끈 다음, 어두운 방 안의 천장을 바라보며 심장 소리를 들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와중에도 삶이 존재한다. 

맛있는 걸 먹고 술을 마시고 잡담을 나누고 영화를 보고 운동을 하며 책을 읽은 다음 잠자리에 드는 그런 평범한 사람의 일상. 


- 모든 정의가 끝난다면, 너도 네 일상이 덧없게 느껴 질 거야. 


한 때 그런 말을 했던 존재가 있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먼. 이해자라고 하기에도 조금 다른.

매트릭스의 빨간약을 먼저 선택한 선지자가. 











그를 S라고 불러야 할 지 H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조금 제멋대로지만, 청연은 그를 T라고 불렀다. 

T는 그의 성에도 이름에도 붙지 않은 이니셜이다. 하지만 자기 이름에 시간의 흔적을 새긴 사내니까. 청연은 그를 생각 할 때면 무정하게 흐르는 시간Time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T라고 불렀다. 아무에게도 말 한 적 없는 그만의 애칭이었다. 아마도 T 본인은 죽을 날 까지 모를 것이다. 자신이 청연의 속에서 S도 H도 아닌 T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T와 청연은 한 반이 스무 명도 안 되는 시골의 작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워낙 좁은 동네다보니 청연은 진즉 그의 아버지가 병원에 오래 입원 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T도 마찬가지로 청연이 두령님 댁이라고 불리는 음산한 집안의 막내아들임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이 친해질 계기를 제공 한 적은 없었다. 말하자면 떡집에 새로 가래떡 뽑는 기계가 들어왔다는 소문처럼 자연스레 귀에 들어오고, 무심하게 넘길 사실이다. T와 청연은 둘은 서로에게 무심했고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에서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기엔 양쪽 다 무정한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해에 그 둘은 조금 묘하게 얽혔다. 학교 석조상에 걸터앉아 T에게 발현 능력을 쓴 걸 들키지 않았더라면, T는 평생 청연의 뒷뒷자리에 앉은 남학생으로 남았을 것이다. 


아닌가?

T는 때로는 뒷자리가 아니라 앞자리기도 했고 옆자리기도 했다. 

상대를 인식하고 나자 놀라울 정도로 청연은 T에 대해 아는 게 없음을 깨달았다.


T는 말 수가 적었고 조용했다. 하지만 소심하거나 내성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성깔이 있었고 고집이 있었다. 여름에는 더위를 꾹 참으며 땀을 훔치는 주제에, 부러질 듯이 가는 목선과 쇄골이 드러나는 교복을 고집하는 주제에, 남이 찾아오지 않을 찜통 같은 교실에서 책만 읽던 학생이었다. 

이 깡촌 마을에서는 모두가 왔다 가는 뜨내기 손님일 뿐. 그건 청연의 형수님이 될 사람이든 매형이 될 사람이든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가족이 될 사람이든 생판 남이든 다를 게 무어랴. 말하자면, 무정할 정도의 불변. 청연의 생활기록부 진로 상담 칸에 삼년 내내 ‘부모와의 상담 요망’ 이라는 단어가 적혀있던 것과 같았다. 청연에게도 T에게도 서로가 가치를 가지거나 발견 해 낼 만 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타인이 아니었다. 


T가 학교에 와서 하는 일이란 뒤의 뒷자리에서 가만 책을 넘기는 것뿐이었다. 그는 죽은 듯이 그 자리에 녹아드는 법을 배운 사람 같았다. 요란하게 굴진 못해도 가만 잡초처럼 밟혀 죽는 걸 못 참는 청연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T는 혼자 있는 교실에서 좋아하는 문장을 소리 내서 읽다가도 사람이 오는 기색이 있으면 가만 입을 닫았다. T는 남자치고는 그토록 예쁜 목소리를 가졌으면서, 국어시간이 아니라면 내뱉는 말이 하나 같이 짧았다. 

T에게 흥미가 생긴 이후로, 창가 밖 화단에서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듣던 청연으로서는 불만스런 일이었다. 


흥미가 생긴 이후로는. 아참 그래, 흥미가 생겼던 때.


집 밖에서 능력을 쓰는 일은 거의 없던 청연이 T에게 능력을 쓰는 장면을 들킨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날 따라 흩날리는 꽃이 보고 싶었다. 꽃보라인가 눈보라인가. 예전에 보았던 봄날의 하얀 꽃무리들이 그리웠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청연은 자두꽃도 배꽃도 살구꽃도 가만 보고 있기가 힘이 들었다. 하얀 꽃을 볼 때 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억들이, 뇌리 한 구석에 치우지도 못하도록 남아있으니까. 

붉은 꽃잎들이 종이꽃가루처럼 휘날리는 아래에서 청연은 가만 눈을 감고 어지러울 정도로 맑은 하늘만 보았다. T의 발걸음 소리를 듣기 전 까지는 그렇게 했다.


T는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다. 청연은 낭패라는 생각을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았다. T는 청연의 주변으로 다가와 몇 번을 훑어보았다. 청연은 대답 할 생각이 없었다. 귀찮게 군다면 흠씬 두들겨서 팬 다음, 도랑에 면상을 처박게 해줄까. 험악하게 굴려 했으나 T가 한 말은 다른 말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낀 책을 몇 번 매만지다, 혹시 책을 읽는 동안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청연은 거절했고, T는 곧바로 납득하더니 자리를 떴다. 


그 날부터였다. 청연이 T를 제대로 인식 한 게. 흥미가 생겼던 게. 타인을 눈으로 쫓았던 게.


갑작스럽게 생겨난 흥미를 졸졸 쫓아다니며 들이댈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날부터 청연의 눈은 조용히 T를 쫓았다. T는 그 사실을 알고도 내버려 두었다. 청연을 무시하는 것과는 달랐다. 말하자면 용인이었다. 


그 해 눈부신 여름날의 아침에 두 사람이 함께 등교를 하게 될 때 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둘은 자신의 일부분을 드러내길 용인한 상대로서 서로를 대했다. 청연은 학교에서 하교하는 동안 오백원짜리 동전으로 학교 담장을 긁으며 걸었다. 그 쓸때 없는 행동을 시야에 넣으며 T는 두 발자국 뒤에서 조용히 걸었다. T는 그렇게 걷다가 때때로 기억났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 때 그거, 어떻게 했던 거야? 그 질문에 청연은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 하는 것은 용인했다. 청연과 T는 외딴 섬에 갇혀 서로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처럼 무심하지만 확실하게 서로를 인식했다. 


인식과 용인은 조용한 침식 같았다. 비바람에 소리 없이 깎이는 바위처럼, T의 용인은 청연의 경계를 조금씩 깎았다. 반대로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T의 질문도 난폭하게 찍힌 흙발자국 마냥 청연을 침범하려 드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래서 청연 또한 T의 침식을 허락했다. 서로의 침식과 용인이 익숙해 질 때쯤엔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초여름이었다. 







청연은 종종 T에 관한 기억을 떠올릴 때 마다, T와 함께 걷던 날의 하늘을 생각한다. 어느 날은 오래 묵은 진주색처럼 이른 아침의 하늘이고, 어느 날은 누이의 뺨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오후 네 시의 하늘이다. 그 하늘을 함께 보며 둘은 더울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낡은 신작로를 함께 걸었다. 


T와 청연은 3월의 봄 보다는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T는 청연이 어떻게 그런 마술을 부렸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질문 해 봤자 답 할 생각이 없단 걸 깨달을 정도론 청연을 파악 한 것 같았다. 그만큼 청연도 T를 조금은 파악했다. 


청연은 T가 이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인생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굉장한 야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고 있는 사람과 거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T는 어떤 목적이 있는 사람처럼 가만히 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일상 속에 긴장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따금 T는 수업을 한 귀로 흘리며 공책에 빼곡하게 글을 채워 넣었다. 일기 일 때도 있었고 소설이나 시 일 때도 있었다. 또, T는 대체로 이성적이었지만 어떠한 순간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감상적이 되는 사람이었다. T는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 할 땐 예리하게 날 선 반응을 돌려주곤 했다. 


예를 들면, 청연의 형이 거들먹거리며 고등학교 앞으로 차를 끌고 온 어느 날이 그랬다. 


"H 씨의 아들이 너구나."


T의 걸음이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여느 때처럼 청연이 T와 함께 하교하던 여름 날이었다. T의 옆에 하얀색 승용차 한 대가 서더니 조수석 창문이 열렸다. 그는 일면식 없는 운전자가 자신을 부른 이 상황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청연 또한 그 승용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큰 형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순식간에 불쾌 해졌다.

얼마 전 면허를 따고 자유롭게 차를 몰고 다니게 된 큰 형은 으스대고 뻐기기를 좋아하는 성미다. 그 만큼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심한 사람이다. 하지만 설마 전혀 모르는 상대에게 이럴 줄 이야. 

청연은 아연질색 했고 T가 은은하게 짜증을 냈지만, 큰 형은 꿋꿋하게 둘에게 말을 붙였다.


"소식은 알고 있다. 마침 청연이와 병원으로 가려던 길이다. 너도 아버지 뵈러 가야지."


청연은 확신 할 수 있다. T는 들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가 읍내 병원이 아닌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근방의 하나 뿐인 호스피스는 청연의 조부가 입원한 곳이기도 했다. 

T는 생판 모르는 남이 함께 동승을 권하는 게, 아버지를 뵙고 가라는 참견을 건네는 게 죽을 만큼 싫었을 것이다.


조용한 진노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났다. T의 입꼬리는 비스듬하게 올라갔고, 고쳐 쓴 안경 너머의 시선은 한층 차가워졌다. 카시트 끝을 툭툭 치는 발걸음은 짜증에 버무려진 초조함이 섞여있었다. 청연은 구정물에 발을 담근 사람 마냥 얼굴을 구긴 T의 분노를 느꼈다. 돌아 갈 때도 데려다 주겠다며 웃는 멍청한 큰 형은 평생 모를 분노였다. 


확고한 분노 앞에서 청연은 T의 눈치를 보는 대신 이 묘한 동창을 조용히 관찰했다. T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데려다 주셔서 고맙다는 겉치레나 인삿말 조차 없었다.


다음날 T는 학교를 결석했다. 이틀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 T는 평소보다 눈매가 거뭇했다. 조금 피곤한 눈치였다. 

이틀 전 일에 대해 말을 던져야 하나, 넘겨야 하나. 잠시 고민한 청연은 오히려 아무 일 없이 넘어가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다고 결론 지었다. T가 의자에 앉기 무섭게, 청연은 뒷좌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말은 T 쪽에서 먼저 걸어왔다.


"네 할아버지가 아프신 줄은 몰랐어."

"...나도 몰랐어. 아버지 위중하셨어? 호스피스로 옮기신지도 꽤 되셨다면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어차피 곧 죽을 인간인데 걱정해서 뭐해."

"효자하곤 거리 있네."

"남 말 하지 마. 동의하는 주제에."


청연은 어이가 없었다. 청연의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을까, T도 소리 없이 따라 웃었다. 그러고 보면 T는 청연에게 네 웃는 얼굴은 나쁘지 않다던 칭찬을 하기도 했다. 

청연은 이 순간 혈육이 죽어가는 와중에 어떻게 웃어 넘길 수가 있냐는 겉치레가 필요 없어서 정말 좋았다. T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참 교실을 채우던 웃음이 잦아들자, 놀라울 정도로 조용해진 공간에서 T의 시선이 움직였다. 청연의 책상 위에 올려진 진로 상담서는 벌써 몇 달 째 빈 칸이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T는 그걸 캐치 해냈다.


"청연, 너 대학 가려고? 학과는 어딜 쓸 거야?"

"어디든지, 붙을 곳으로."

"의외네.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그럼 어떻게 보였는데."


T는 엄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한 번 쓸었다. 곧 생각을 정리한 T는 거미 다리처럼 가느다란 중지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뚜렷하게,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 인간."


당시에는 몰랐지만 T의 평가는 제법 정확했었다. 청연은 잠시 할 말을 잃곤 T를 바라보았다. T는 자신의 평가가 너무했나 싶어 청연의 눈치를 살피고 있진 않았다. 오히려 네가 말 해달라 해서 해 준거라 당당하다는 시선이었다. 태연하게 시선을 받아 넘기며 청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맞아. 지금은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목적이야."


청연은 어젯 밤 난생 처음으로 내내 빈칸으로 제출하던 진로 상담서 위에 펜을 들었다. 이미 T도 얼핏 눈치 챘을 것이다. 청연의 집안은 대학교 진학이라는 짧은 한 마디를 아무렇지 않게 적어 낼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T는 교과서를 반듯하게 정리하며 청연의 말을 가만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이유 모를 질투가 솟아나서 이번에는 청연이 질문을 던졌다.


"너는?"

"결심 한 건 있어. 하지만 결정은 나중에. 아직 기간이 남아있거든."


결심과 결정은 다른 문제지. 능숙하게 단어를 나눠 쓰는 친구를 앞에 두고 청연은 가만히 침음을 흘렸다. 한참이나 그의 가느다란 목선을 바라본 청연은 무슨 기한이냐 물었다. 

T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필통을 열고 펜을 고르고 있는 손길에 평소와는 다른 망설임이 있었다. 곧 T는 평소처럼 까만색 볼펜을 골랐다. 청연의 시덥잖은 질문에 꼬박꼬박 답하던 때와 똑같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를 버린 어머니가 다시 연락 해오면 용서 할 기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생각 해 보니, T가 어머니를 언급 한 건 이 전으로도 후로도 이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열 아홉살의 청연은 금방 알았다. 혈육에 관심 없다는 T가 왜 아버지의 병동을 외면하지 않는 지. 시골 생활에는 맞지 않아 보이는 데도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까닭. 참으로 간단한 이유이지 않나. 

솔직하기까지 한 마음. 청연에겐 불가능한 그 솔직함이 부러워서, 어리석다고 평가 하긴 싫어졌다.


만약 T의 욕망을 저울대에 올려본다면, 맞은편 저울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올려야 할 것이다.

마치 청연의 욕망을 저울대에 올려본다면, 맞은 편에는 조부의 죽음이 있듯이. 


이미 청연의 조부에게는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가 떨어져 있었다. 정확한 시간과 때가 정해 진 건 아니다. 하지만 죽음의 날이 다가올수록 청연은 수선스런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19년을 살아온 인생에서 조부의 죽음이란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선이었다. 어쩌면 이 집안에서 멀어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안은 장남인 큰 형이 잇겠지. 그러면 형은 이제 자기가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지는 사람이 된다. 이 곳에서 청연이 형을 돋보이게 만드는 존재로서 머릿 수를 채우던 삶을 이어갈 필요는 사라지지 않을까. 청연은 제발 그렇게 되길 희망했다. 어디든 상관 없었다. 대학교를 입학하여 기숙사이든 어디든 들어갈 수만 있으면 좋았다. 이 곳에서 지냈던 시간을 잊어버리고, 새 삶을 받은 것 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기회. 도무지 버리기가 힘든 욕심이다. 


청연은 하나 둘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학생들 때문에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업 시간 내내 저울대를 그리며 낙서를 했다. 조심스럽게 비교 해 보는 자신과 T의 욕망은 어쩐지 같은 무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청연은 누가 볼까 무서워 식기 창고 옆까지 누이를 데려와 대학 입학 원서를 내밀었다. 누이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안방으로 사라졌다. 청연에겐 천 년 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 동안, 누이는 아버지의 인감 도장을 몰래 꺼내왔다. 빨간 인주가 찍힌 입학 원서를 내려다 보며 청연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제 욕심을 모조리 채운 행복에 벅차서 누이의 손을 붙잡고 맑게 웃었다. 


뻔한 이야기다.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대학 합격을 알리는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다. 누이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 큰 형과 함께 조부의 장례식 때 입힐 수의를 준비하던 아버지가 전화기를 잡았고 통화가 끊어지기 무섭게 노성이 오가고 청연이 끌려 나왔다. 


살면서 그렇게 많이 맞아 본 적이 있던가. 아니, 그토록 모욕적으로 맞아 본 적이 있던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가레침이 들어찬 재떨이가 청연의 이마에 부딪쳐서 튕겨 나갔다. 평소 무능한 아버지와 형을 조소하던 아들이자 동생을 뜯어 고칠 기회로 여긴 모양이다. 묵직한 주먹이 청연의 머리를 후려쳤고 코뼈가 부서질 뻔 했다. 기겁하던 누이가 자신의 잘못이라 외치며 무릎을 붙잡지 않더라면 청연의 얼굴에는 파란 멍이 아니라 빨간 피가 튀었을 것이다. 

다만 누구의 피가 튀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청연이건 아버지건 큰 형이건 누군가는 폭발 했을 것이다. 청연은 끝까지 두들겨 맞았고 조소가 따라 붙었다. 다만 누이의 뺨을 때리려는 아버지를 보고, 차라리 다리를 자르지 그러냐며 비아냥 거린 결과는 곧장 돌아왔다. 청연은 곧바로 아버지의 발길질에 배를 걷어 차이고 사랑채로 쳐박혔다. 

사랑채 안에서 청연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대학 따윈 안 보낸다며 소리치는 아버지가 청연의 모든 계획을 깡그리 엎어 버릴 때 까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밤 집안은 쥐 죽은 듯 한 침묵 속에서 누이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만 들려 왔다. 


누이는 참 많이 울었다. 우는 내내 청연에게 사과했다. 하필 그 때 두부를 사러 나가서 미안하다고 울었다. 


아. 누님 어째서. 


당신께서 미안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미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도 미안 해 하지 않는 집안이라면 진즉 뛰쳐 나갔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나간다면 당신은 이 집에서 어떻게 될까. 청연은 서럽게 웃었다. 이 빌어쳐먹을, 사랑하는 육친. 당신만 없었더라면 버렸을 감정과 사람이 한둘일까. 


청연은 곧 만월로 차오를 달을 보며 완벽하게 절망했다. 조부와 아버지는 뛰어난 발현자로 태어 날 수 없었다. 누구든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태어 날 때 부터 자신의 삶을 선택 할 순 없다. 청연에게도 해당 되는 이야기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그걸 모른 적은 없었지 않았나. 이제 아버지가 죽고 형제가 죽을 날 까지, 평생 머릿 수나 맞추는 등신 같은 동생으로 사는 수 밖다. 그런 삶에 의미가 있는지 따져 뭐하랴. 인생은 선택 할 수 없다. 왜 순응하지 못하나. 왜 이 세상에서 버리지 못할 희망을 가지다 환멸 품길 반복 할까. 세상사가 다 무엇이라고. 전부 부질 없고 하찮을 뿐인데. 

사랑채에 처박힌 청연에게 누이는 문지방 너머에서 끝없이 사과했다.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은 사과였다.




T가 청연을 찾아 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일주일 간 학교를 나가지 못한 청연은 T의 소식을 하나도 듣지 못했기에 뜬금 없는 방문이었다. 큰 형은 T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며칠 전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곧 서울로 간다는 친구를 막을 순 없었던 모양이다. 

청연은 커다란 밴드를 덕지덕지 붙인 얼굴로 T를 마중했다. 누가 봐도 두들겨 맞은 얼굴이었다. T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지만 왠지 금방 수긍했다. 툇마루에 앉은 두 사람에게 누이가 따뜻한 차를 한 잔씩 가져다 줄 때 까지 둘은 가만 앉아있었다. 

입을 먼저 연 건 T였다. T는 청연이 학교에 오지 않은 동안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느라 자신도 학교를 나가지 못했음을 담담하게 밝혔다. 딱히 안타까움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T는 그걸 바라고 온 건 아닐테다.


"벗어나는 건 화려하게 실패 했나보네."

"그렇게 됐어."

"벗어나면 뭘 하고 싶었는데."

"글쎄. 기억 안나."


얼버무리는 것 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었다. 대학 입학 원서만 쓰면, 조부가 죽기만 하면 모든 게 잘 될거란 생각들은 모두 일희일비에 불과했다. 더 상상하고 기대 하는 건 의미가 없어서 청연은 잊어버리기로 했을 뿐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익숙한 일이었다. 지금껏 상처 받고 절망 하지 않기 위해 19년간 해온 일 중 하나였다. 잠시 바보 같은 생각을 해버렸다며 조소하고 넘기면 그만이지 않나. 그렇게 생각 하는 가슴 한 켠이 썼다 할지라도 말이다.


"앞으론 벗어 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말 못해."

"그럼 벗어나지 못 하겠네. 넌 준비가 덜 됐으니까."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말이었다. 청연은 죽일 듯 노려보았으나 T는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안경 너머로 청연을 훑는 T의 붉은 눈동자는 마찬가지로 차가웠다. 차라리 모두 다 버리면 될 걸. 그렇게 툭 내뱉은 T의 말에 청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청연은 한참 후에서야 그러는 너는 준비가 된 거는 질문을 보복처럼 내놓았을 뿐이다. 

청연의 물음에 T는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장례식이 끝날 때 까지 연락은 없었어. 어머니에게 용서는 과분해. 나는 평생 증오하며 살기로 했어."


T는 노래하듯 말했다. 청연은 그 말 속에 담긴 담담함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담담 할 수가 있나. 그토록 끈질기고 진득하게 원해온 욕망이면서. 

청연은 감정적인 갈망을, 이성적으로 증오하겠다 결정한 T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게 유독 도드라지는 날이었다. 그를 다시금 부르려고 한 청연을 이번에는 T가 가로 막았다.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야."


이미 전학 수속은 끝났어. T가 덧붙이는 말들은 하나같이 시시했다. 함께 살던 할머니가 어느 자식네 집에서 살게 되었는지, 살던 집은 언제 허물릴 지. 떠나는 날이나 장소에 관한 말은 하나도 없었다. T는 그런 사람인 걸 새삼 깨닫는다. 청연과 T는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달랐다. 그저 서로 마음의 편린을 보이기로 용인할 상대 일 뿐. 스쳐 지나는 인물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살아가는 동안 시야에 넣고 돌볼 인간이 아니다. 그걸 알아서, 청연은 T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청연도 이 집안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T가 고등학교 3학년이란 시기에 전학을 가건 말건 알 바 아니었다.


청연은 T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는 떠난 후 어떻게 지낼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서로의 미래에 관심 없는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히 끊겼고, T는 자리에서 일어 날 타이밍에 맞춰 차를 비웠다. T는 빈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거나, 후일을 도모하는 말은 그들 사이에 결여 되어 있었다. 무심함이 꿰뚫고 간 솟을 대문 앞에서 청연은 T를 배웅했다. 

그런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청연에게 T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여태껏 알고 지낸 T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다정하다. 


자청연.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과 T의 다정한 목소리를. 

가득 찬 보름달을. 아주 오래토록 잊지 못할 거라고.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선명했다. 남자치고는 선이 고운 몸과 덜 익은 석류색의 옅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으며 작게 반짝였다. T에게서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위화감은 대체 무얼까. T는 제 앞에 있지만 마치 먼 곳에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모든 정의가 끝난다면, 너도 네 일상이 덧없게 느껴 질 거야."

"……."

"곧 견디지 못하게 되겠지. 네가 중요하게 여겼던 게 모두 쓰레기 같았단 걸 깨닫고, 자기 연민에 가득차서 어쩔 줄 모를 모습이 선명해."


내가 그랬거든. 그렇게 짧게 첨언한 T의 표정은 첫사랑도 한 적 없는 청년 마냥 순박하고 맑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청연은 그 미소가 진짜인 만큼,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 담긴 독사 같은 시선을 알게 되었다. T의 말은 마치 오래토록 빠지지 않을 잔가시처럼 청연을 찔렀다.


"잘 있어. 너는 제법 즐거운 관찰 대상이었어."


불러 세우거나, 그게 무슨 의미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T는 비닐하우스와 교회 사이의 골목으로 사라졌다. 어둠이 깔리고 그의 자취를 완전히 지우는 동안 청연은 한참 그 자리에 있었다.


일상이 덧없게 느껴 질 거라고? 청연은 제 일상을 돌아보았다. 누가 깨우기 전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로 향하는 일상, 수업을 듣는 일상, 약재방의 약재를 다지고 아버지가 쓸 부적 만드는 종이 재료를 사오는 그런 일상들은 이미 보람도 쓸모도 뭣도 없다. 아주 예전부터 청연의 일상은 덧없었고, 자기를 달랠 수많은 사자성어들을 외워보아도 쓸모가 없었다. 똑똑한 멍청이. 청연 또한 이 관찰일기를 멈추며 T를 정의 했다. T는 그저 남들보다 반응이 독특했을 뿐인 상대였다. 시니컬하고 매사를 삐뚤어진 성미로 대하는. 그런 인간을 친구로 두지 않아 다행일지도 모른다. 친구로 두었다고 해도 별로 달라 질 건 없었겠지만.


청연은 솟을 대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때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대문을 피갑칠을 한 옷으로 혼자 열고 들어 올 순간을 몰랐다. 천륜의 고리가 부서지고 믿어왔던 윤리가, 도덕이, 규범이 조각 나 버릴 날을 상상하지 못했다. 누이를 제외하고 모두가 죽어 나간 건 꼭 일 년 후의 일이었다. 



누이는 세 개의 관을 붙잡고 통곡 한 후 혼절을 했다. 청연은 그런 누이를 단단히 안으며 태연했다. 


태연한 척을 한 게 아니었다. 청연의 머릿 속에는 죽은 아버지나 형을 향한 감정이 들어 찰 새가 없었다. 생각보다 많은 퇴마사 집안에서 조문을 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이 조문을 핑계로 찾아간다면 제법 괜찮은 연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혹자는 한꺼번에 가족을 잃은 충격에 청연이 현실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 하는 듯 했다. 모르는 소리다. 청연의 머릿 속에는 T의 말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네가 중요하게 여겼던 게 모두 쓰레기 같았단 걸 깨닫고, 자기 연민에 가득차서 어쩔 줄 모를 모습이 선명해.


그랬다. 정말로 그랬다. 청연은 화가 났다. 기대하지 못할 세상에서 이십 년을 살게 해놓고, 이제와 자유를 적선하다니?


좀 더 빨리 이런 날이 찾아왔어야 했다. 입학 원서에 희망을 걸고 누이를 버리지 못하고 집안을 떠돌던 막내 남동생이었을 때 이런 날이 찾아왔어야 했어. 그렇담 배덕한 자신을 다그칠지언정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어쩌란 말인가. 청연은 뿌리 깊은 환멸을 느꼈다. 어그러진 건 맞춰보기라도 할텐데 깨져버린 천륜과 파탄난 성정은 손 쓸 수가 없다. T는 기간을 정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기간을 정하지 못해 놓쳤다. 청연은 한참이나 얼굴을 가린 채로 웃었다. 이제 청연을 비웃을 사람은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곤 견딜 수가 없었다.


맛있는 걸 먹어도 술을 마셔도 잡담을 나누고 영화를 보고 운동을 하며 책을 읽어도, 즐거운 것은 한 때일 뿐.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즐거운 일은 잠시 동안의 위안일 뿐.


T의 말이 옳았다. 그런 부질 없어질 위안에 기대서 사람으로 살아갈 의욕은 별로 없었다. 그렇지 않나. 인생은 화무십일홍. 제 아무리 화려하게 피더라도 결국 지고 마는데 무엇에 기대서 살라고.


제 뺨을 때리던 조부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데, 청연은 여전히 자두꽃을 보며 숨이 막혔다. 누이와 청연. 단 둘 뿐인 집에서 스치듯 웃을 일이 생겨도 곧 시린 환멸이 따라붙었다.


목숨이, 삶이 하찮게 느껴지는 환멸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숨이 멎을 날 까지 들러 붙은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니. 그래 좋다. 그렇다면 그런 건 인간이 살 수 있는 삶이 아니지. 마물이 되어, 초월자가 되어 환멸을 비웃어 넘기며 그렇게 살아 주겠노라고 청연은 집을 나와 육 년을 나돌았다. 역마살이 끼인 인간마냥 아무렇게나 떠돌아다녔지만 원하는 걸 간단히 얻게 해 주진 않겠다는 듯 번번히 허탕만 치는 일이 반복됐다. 여덟 번 째 퇴마사 집안이 종착지였다. 조문을 와 주셨던 일이 정말 고마웠노라고 입발린 인사를 하러 간 후 며칠을 제 집 처럼 드나들며 환심을 산 다음 남의 집 서고를 열어 책을 훔쳐 왔는데도 원하는 건 없었다. 오래된 한자를 읽고 머리를 쥐어 짜보아도 환멸을 뿌리칠 방법은 없었다. 어디에도.


그리고. 그래서. 그 다음에는. 

네 능력을 사겠다고 말하며 필요로 하는 곳에 굴러들어가 떠돌고 또 떠돌고 떠돌며 참 많은 이들을 만났다.




- 당신도 그럴까 싶어서. 우린 꽤, 마물과 인간의 교차점에 있잖나.


예를 들면, 제법 그럴듯하게 인간 흉내를 내는 마물. 

세상사에 환멸 따위 느낄 수도 없이 오래 오래 살 존재를 알게 되자 때로는 질투를 했다. 

흥미도 안타까움도 꾸며 낼 수 없을 정도로 진솔한 존재라, 그 곁에서 맴돌기도 하고.



- 아이 같은 면이 있네, 청연.


예를 들면, 황록색 눈동자로 다정한 인세와 덧없는 진리를 지적하는 인간.

그는 혈혈단신의 몸으로 발버둥 치는 즐거움을 논하는 어른이었다. 

저보다 훨씬 너그러운 존재 앞에서, 정말로 어린 아이 같이 말을 건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 청연은, 사람으로 겪은 것들이 싫어?


청연의 삶을 꿰뚫어낸 어떤 청년을 만나기도 했다.



살아간다는 건 천 피스 짜리의 퍼즐을 맞추어 가는 과정인가 보다.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걸 맞추는 과정을 즐기거나, 완성 될 그림을 기대한다.


하지만 청연은 비어있는 액자와 퍼즐 조각을 손에 들고 아연질색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란 걸까. 이 퍼즐을 모두 맞추고 사람의 삶을 완성시킬 의욕이 자신에겐 없었다. 완성이 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어차피 사람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을 그림인데. 


T. 너는 진즉 알았던 거구나. 내가 이토록 간절하게 빨간약을 찾아 헤매는 삶을 살게 될 거라고. 그래, 자네는 내 친구가 아니야. 다만 선구자였지. 게다가 나보다 현명했잖아. 자네는 자네만의 기간을 정했지. 원하는 게 분명했고 부정조차 하지 않는 솔직함. 그건 이제 청연 또한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T는 청연과 달리 욕망에 시작과 끝을 정해놓았다. 그 현명함이 부러웠다. 자신 또한 그랬으면 좋았을걸. 청연의 환멸은 오래 전 부터 시작되었고, 퍽 깊었다. 하지만 시작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끝낼 타이밍을 가늠하지 못했다. 대체 언제까지 빨간약을 찾아 헤매게 될까.


매트릭스의 주인공은 일상에서 기묘한 감각이 따라 붙는 걸 견디지 못하고 빨간약을 고른다. 주인공에게는 약을 선택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선택에 따른 삶을 산다. 자신 또한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연은 꿈에도 몰랐다. 이리 길고 오랜 시간 동안 빨간약을 찾아 헤매는 여정을 떠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사람으로 태어나 겪은 것이 싫었냐는 질문에 가슴이 꿰뚫린 삶을 살 줄이야. 마물과 인간의 교차점에 서서 덧없는 진리를 꿈꾸는 사람으로 살 줄이야. 사람으로 태어나 즐겁게 웃을 만한 일이 생겼다 한들, 나를 웃겼던 모든 게 결국 대단치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 삶의 이유로 연결 할 수 없음을 실감하는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친구와 보내는 일상에 웃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침대 맡에서 느끼는 이 환멸. 


끝까지 집요하게 따라 붙는, 묵직하게 가슴 한 켠에 얹히는 세상사를 향한 환멸. 나는. 그게. 너무나도. 싫어. 


그래서 내내 찾아 헤맸다. 빨간약을, 혹은 빨간약을 건네 줄 사람에게 데려다 줄 검은 승용차 한 대라도 좋으니까.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모두 맞아도 좋으니까 제발. T. 가르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졌어. 자네가 답을 내려놓지 않고 사라져버린 공백 속에서 나는 예전의 싫었던 기억과 환멸만을 되짚는 삶을 반복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재밌는 걸 알려줄까 T. 난 아주 재미있는 직업을 가지게 됐어. 파란약을 먹은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야. 어떤 위화감도 환멸도 느끼지 못하며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조소하면서도 지키고, 이렇게 빨간약을 찾고 있지.



아.

이 메마른 삶을.

사람으로 태어나버린 삶을.

때때로 일상이 덧없고 하찮아지는 삶을.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막막해지곤 해.



청연은 양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시각이 차단되자 모든 감각은 청각에 집중됐다. 

조용히 잠든 유환의 숨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에는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박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청연은 그 소리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끔찍한 진실을 되씹었다. 아마도 빨간약을 찾기 전까진 평생을 이렇게 살겠구나. 사람으로 태어나 멈추기 전 까지 울려퍼질 심장 소리에 갇힌 채로. 죽기 전까지는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끔찍하단 말인가. 현실을 되씹는 기분은 처참했다. 울고 싶어지는 절망을 누구도 이해 하지 못하겠지. 이해 받는다면, 혹은 이해 해 주겠다며 받아 줄 사람이 나타나면 울면서 도망칠 지도 몰라. 


사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며 납득할 환멸을, 사람으로서 간직 한 채 살아야 할 날은 아득하다. 심장 소리는 끝까지 따라 붙었다. 청연은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잠을 청하려 노력했다. 내내 심장은 멈출 줄 모르고 울부짖듯 쿵쾅거릴 뿐이었다. 살아가는 걸 멈추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듯 고집스러웠다. 12년 내내 빨간약 찾지 못한 남자의 야속한 심장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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