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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세레

느린 봄


그 해는 유독 봄이 느리게 흘렀다. 착각 인 줄 알았지만 자두꽃이 피는 시기가 예년보다 늦었다. 조부와 형들이 친척을 만나러 간 사이, 마당 바위에 앉아 가만 자두꽃을 보던 청연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 건 누이였다. 요즈음 서리가 내려 앉은 날이 많아서 그래. 날이 개면, 훨씬 따뜻한 햇살이 며칠만 내리 쬐이면 금새 봉오리가 필 거라는 말이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누이에게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자두나무를 보았을 뿐인데 마음을 읽은 것 마냥 그녀는 청연이 원하는 걸 알았다. 누이는 청연이 자두는 먹지 않아도 자두꽃을 좋아하는 것을 안다. 신기한 누이다.



"청연아, 심심하니?"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어차피 막내인 아영이는 또 떡을 받아온답시고 갔다가 함흥차사로 조잘대고 있을 것이다. 청연은 한숨을 쉬며 바위에서 내려왔다. 딱히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누이가 불쌍해서는 아니다. 다만 누이는 청연보다 고작 여섯살 많을 뿐인데도 이미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고 안주인의 역을 맡고 있었다. 사기 그릇 한 잔 분량의 물 만 움직일 줄 아는 쓸모 없는 발현 능력이 밝혀진 날, 이 가족 사이에서 그녀의 위치는 못이 박혔다. 누이는 부단히도 그 위치를 지켰고 청연은 그걸 한심하게 생각 할 때도 있었다. 일곱 식구의 밥을 짓고 가정이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걸 보고 있자면 시골 생활이고 퇴마사고 나발이고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하지만 청연이 어떻게 생각하든 누이는 제 위치를 받아들인 듯 했다. 신발을 고쳐신고 마당으로 나온 청아가 희게 웃었다.



"아니야. 어차피 아영이도 늦을테고, 아버지께 말씀 드렸으니 같이 장 보러 가자."

"네."

"혹시 뭐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말 해도 괜찮아."

"...네?"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 청연이 반문했지만 청아는 잘못 들은게 아니라는 듯 다시금 알려주었다. 네가 가지고 싶은 것 말이야.



"작년 생일에 아무것도 못 해줬잖니."



매번 오빠 생일만 챙기는 게 여간 민망한게 아니야.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청연의 머리를 쓸었지만, 그 상냥함이 조금도 기쁘질 않았다. 

생일이라니, 애초에 이 집안에서 그런 걸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나신 큰 형과 아버지가 선심을 쓰듯 고기를 몇 근 사와 먹는 날이 생일이었다. '생일 잔치' 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는 인생임을, 청연보다는 그녀가 더 잘 알텐데. 누이는 기필코 뭔가를 사주겠다고 마음 먹은 모양이다. 작은 형님은 어쩌고요. 아영이는 어쩌고요. 그렇게 되물었음에도 청아는 빙긋 웃으며.



"그건 내게 해결하는 요령이 있단다."



라고 말 하더니 고운 손으로 청연을 잡아 끌었다. 얼마나 기뻐보였는지, 보는 청연이 감히 만류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사코 청연이 가지고 싶은 건 없다고 말을 해도 듣질 않았다. 누이의 생소한 모습은 읍내 장터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청연이 누이의 옆 얼굴만 보게 했다. 


읍내 장터는 오늘 만 날이라는 듯 온갖 풍물거리를 파는 장사치가 가득했다. 그 중 제일인 건 막과자의 달달한 냄새와 도톰한 찐빵 냄새였다. 평소라면 필요한 것 만 사가지고 갈 청아가 옆길로 새자, 청연 혼자로선 도저히 말릴 수 가 없었다. 무엇을 보든 청연의 이름을 부르며 먹겠냐고 물었고, 조금만 신기한 게 보여도 가지고 싶지 않냐며 물었다. 청아는 도무지 마루바닥 청소가 끝날 때 까지 사흘 밤 낮을 집 안에서 가만 두문불출 하던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청연은 이미 누이의 눈부신 시간이 퇴마사의 팔자를 타고난 집안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 걸 구해줄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누이이기에, 청아이기에, 차라리 그녀가 가지고 싶은 걸 대신 사주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 할 정도의 온정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청아 쪽에서 단칼에 거절 해 버렸기에 허사가 되어버렸다. 청연은 두 번을 권할 만큼 붙임성 좋은 동생이 아니었다.



"정말로 가지고 싶은 게 없니?"

"괜찮습니다."



청연은 대답과 함께 차갑게 웃었다. 언제였던가. 막내 동생인 아영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적이던가. 그 작은 아이가 실내화를 신으면 예쁘게 펼쳐지는 레이스가 달린 양말이 가지고 싶다며 조른 적이 있었다. 밥도 먹지 않고 굶으며 대든 결과, 여동생은 삼 주 동안 실내화가 없이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조부는 가차없이 열 살도 안되는 막내동생의 실내화 주머니를 빼앗아서 아궁이에 버렸다. 아버지는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청아에게 동생 하나 가르칠 줄 모른다며 매섭게 다그쳤다. 그까짓 양말 하나에 언성을 높이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고 조소하면서도 청연 또한 외면하고 누이들을 뒤로했다. 그르친 인간은 조부와 아버지 뿐만이 아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고 제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이 집안은 정신이 나갔다. 그리고 이 정신나간 집안에서 청연이 저 혼자 잘났고 멀쩡한 척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멀쩡한 인간이 못 된다면, 열망 할 것도 열망 해선 안 될 것이다. 가슴을 찢을수록 자기 손해 아닌가. 그러니 가지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았고 화가나도 참았다. 기쁨도 슬픔도 욕망도 내리 누르고, 만약 발發 해도 좋은 감정이 있다면 분노로 하자고 선택 했다. 분노는 미소와 함께 차갑게 흩뿌려졌다. 곧 청연은 웃는 방법이 이것 하나 뿐 이었다는 듯 비웃을 줄 아는 인간이 됐다.



"정말로 하나도 없어? 아무 것도?"

"괜찮아요."



누이는 깊게 실망 한 듯 했다. 넷째 남동생에게 번듯한 선물을 하는 것으로 제 욕심과 뿌듯함을 채울 요량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에 드러난 슬픔은 거짓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다시 장터로 발을 옮기고 싶어 하는 것을 청연이 도로 데리고 왔다. 뭐든지 좋아. 책을 사고 싶진 않니? 하모니카나 라디오는 어떠니. 혼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서 숨겨 둘 테니까. 어르고 달래듯 청연에게 내려진 다정한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귀에 닿을 때 마다 불쾌할 뿐이었다. 고맙지만 불쾌한 친절을 거절하고, 다만 청연은 집으로 갈 것을 재촉했다. 결국 누이의 고집으로 사온 박하사탕과 초콜릿 몇개가 청연의 주머니 안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집에 돌아오자 이미 형들과 조부는 돌아와 있었다. 사람의 인기척이 나는 걸 느꼈는지 부랴부랴 떡바구니를 들고 온 아영이 청아의 곁에서 저녁 식사준비를 돕는 동안, 청연은 해야 할 일을 했다. 조부의 약재방에서 인삼 뿌리를 다지는 일은 심심하고 재미가 없었지만 집중하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었다. 빻아낸 인삼가루를 포장해서 천장에 매달아두고 나오는 길에 청연은 이질적인 소리를 들었다. 긴 나무 장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소리의 근원지는 마당이었다. 마당에는 조부와 큰 형이 함께 서 있었다. 첫 아이라고 유독 아낀 장남이 저 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발현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게 자랑스러워 막내 여동생과는 겸상조차 시키지 않고 키운 형님이셨다. 넷째인 청연도 같은 사내였지만 같은 줄에 서본 적은 없다시피 했다. 살얼음판 같은 장소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다. 청연은 큰 형에 비하면 철저하게 서열이 낮았다.

그러니 부딪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며 대부분은 피했는데, 오늘은 유독 눈이 갔다. 큰 형이 쥔 하얀색 나무 장대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인 지는 모르겠지만, 이상 할 정도로 하얀 장대는 청연의 시선을 끌었다.


머잖아 청연은 그 나무 장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친척 지인의 집 보수공사를 도와주는 대신 500 년을 산 주목 나무 한 그루를 잘라와서 만들었다는 나무 장대였다. 조부는 저녁 식사 내내 심기가 좋았다. 본디 마魔를 쫓는다는 영험한 식물 중에 하나인 주목나무가 500 년을 묵었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겠냐며 들뜬 소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좋다, 라고 생각 하는 게 맞다. 그까짓 장대 하나 없다고 한들 퇴마를 하는데 무어 큰 어려움이 있겠는가. 오히려 영험한지 아닌지도 모르는 나무 하나를 베어다 장대로 깎아내는 멍청한 짓을 하루 내내 했다는 조부를 보기좋게 비웃어 주어야 할텐데. 청연은 식사를 끝내고 새로 쓴 부적을 말리며 담담하게 인정했다. 책도 하모니카도 라디오도 필요 없었다. 박하사탕이나 초콜릿보다도 퍽 쓸모 없는 나무 장대가 유독 탐이 났다.


부적이 마른 걸 확인하자 청연은 마당으로 나갔다. 조부와 아버지는 약주를 마시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지 안방의 불이 꺼져있었다. 봄 밤에 전구등 하나 켜놓지 않고 나무 장대를 휘두르고 있던 큰 형과 눈이 마주쳤다. 큰 형은 청연을 흘끔 바라보다가 곧 하던 일에 매진했다. 청연은 태연한 얼굴로 그저 형이 장대를 휘두르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저녁을 먹는 내내 창술, 봉술, 온갖 그럴 듯한 체술 이야기를 하며 귀鬼를 쫓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 마냥 거들먹거리는 조부를 보는게 하루이틀이던가. 청연은 진즉 넌더리가 나 있었고, 청연보다 더 오랫동안 그 허풍 섞인 말을 들어온 큰 형 일 것이다. 이런 집안 따위 지긋지긋하다며 형제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할만도 할텐데. 참, 자가의 형제들은 서로를 돌봐주는 정 따윈 없는 인간들인가. 웃음이 나올 정도다. 천륜을 거스르지 못하고, 다만 자식과 손자 된 도리로 웃어르신을 모시고는 있지만 누구하나 행복하지 못한 정신나간 집안임을 다시금 실감 할 뿐. 



"가지고 싶으냐?"



바람을 가르는 작은 소리가 났다. 청연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란, 한 번도 제 것을 양보하지 않았던 큰 형이 돌연 코앞으로 장대를 들이 밀었다는 사실이다. 청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렇게 대단한 물건은 아닌 것 같다며 넌지시 말하는 형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큰 형의 눈은 유독 순하고 선해보였다. 


청연은 손을 들었다. 그리고 형이 들이민 장대를 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세차게 허공 가르는 바람소리가 난 건 그 때였다. 청연의 코앞에 있던 장대는 어느새 형의 등 뒤로 돌아갔다. 허리와 팔 사이에 장대를 낀 큰 형은 여유로운 얼굴을 했다. 청연을 빤히 지켜보며, 좋은 구경을 한다는 듯 큰형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분수를 모르는 놈 같으니."



청연은 큰 형의 순한 미소가 자신의 조소와 닮았음을 깨달았다. 그 말을 끝으로 큰 형은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마당 한 구석으로 주목나무 장대를 던졌다. 주목나무 장대가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영원토록 잊지 못할 소리였다. 큰형의 방 문이 닫히고 문고리가 잠궈지는 그 순간까지 청연은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뒷편에는 조용히 다가오는 누이가 있었지만, 일부러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ㅡ누님. 저는 저 물건이 가지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과연 자상한 누이는 무엇이라 말할까. 어떤 말이든 청연이 원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라비를 설득해서 주목나무 장대를 네게 주겠다고 약속 하지도 않을테고, 네 것이 아닌 이상 포기하라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가지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봐도 괜찮다고 대답 했을 뿐이다. 끝까지 하지 않는 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당신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말하지 않아도 누이는 알았다.



"...청연아. 용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께서는, 참 어찌도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시는지. 

아무에게도 드러낸 적 없는 마음인데. 누구에게 듣고 직접 본 것 마냥 아시는지.


청연은 제 손에 박하사탕을 쥐어주는 누이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 해 봄이 지나기 전에 청연은 주목나무 장대를 든 형의 앞에서 맨손으로 퇴마를 했다. 굳은 표정으로 저를 보는 형님을 향해 소리 없는 조소를 남긴 채, 청연은 박하사탕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빨래가 엉망이라며 패악을 부리는 큰 형과 기분이 좋은 남동생 사이에서도 누이는 찧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고 손빨래를 다시 했다. 곧, 큰 형이 질렸다며 주목나무 장대를 패대기 치는 걸 보고 청연은 태연하게 장대를 주웠다. 분수를 모르는 놈은 제 아무리 대단한 물건을 가져다 놔도 다룰 줄 모르는 법이지요. 죽일듯이 노려보는 형님을 무시하고, 청연은 누이의 빨래를 도왔다. 누이가 쓰던 빨랫줄을 걷어내고, 새하얀 장대를 걸고 형을 비웃으며 그 위에 빨래를 널던 순간은 참으로 즐거웠다. 느리게 흘러온 봄은 그렇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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