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은 걸어 잠근 빗장만큼이나 그 집안의 위세와 평판을 의미한다. 때문에 청연은 담을 넘은 후, 직감적으로 주군이 암살을 명한 사내가 참으로 '좋은 집안' 의 독자임을 알았다. 빗장은 단단히 걸어두었으나 결코 높지 않은 집안 담장은 어느 기와든 금하나 간 게 없었다. 오래된 가풍에 걸맞게 낙후 된 구석 하나 없는 살뜰한 저택이었다. 명성과 권세를 휘두르며 행인을 무시하는 이들이라면 더 높은 담장을 지었겠고 환하게 담장을 밝혔겠지. 그러나 은은히 빛나는 등 몇 개와 발돋움을 하면 볼 수 있는 높이의 담장이다. 필시 오가는 이를 선별하지 않고 베푸는 집안 일 것이다. 검소하고 실속 있는 등롱의 모양이 그 생각을 뒷받침 했다.
청연은 등롱을 든 채 자신을 보고 얼어붙은 하인을 응시했다. 그리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목에 소리가 새지 않게 비수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 비수를 뽑아내자 피는 조용히 하인의 숨과 함께 흘러넘쳤다. 그대로 절명 한 것을 확인하자, 청연은 조용히 명령했다.
"독을 풀어라."
화계火計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취향 탓이다. 수단을 고를 수 있는 경우, 대부분 화계를 피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청연은 선명한 화염의 기억과 살이 타는 냄새를 잊고 싶었다. 아비가, 형제가, 누이가, 자식 같던 매가 불에 타 죽었다. 청연 또한 도저히 지우지 못할 화상의 고통에 아편을 먹는다. 그러니 타죽는 고통을 알고 있어서 피한다는 이유는 위선임을 알지만, 그래도 양보 하지 않는 최소한의 위선이고 자비였다.
그를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주군은 한 번도 청연에게 불을 지르라는 명령 한 적이 없었다. 물론 필요하다면 불 따위 얼마든지 지르겠으나, 지금은 억지로 이목을 모을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노인과 어린 아이, 잠든 자, 깨어 있는 자. 누구든 소리 없이 숨을 끊어라."
소리가 새어나가게 한 자는 먼저 숨을 끊겠다는 의미였다. 이미 청연의 아래에서 뜻을 함께 하는 자는 의중을 빠르게 파악하는 자들 뿐 이다. 파악 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자는 조용히 잊혀져갔고 제일 먼저 청연의 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예상대로 수하가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아 피 냄새는 더 진해졌으나 저택은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용했다.
"상자를 가져와라."
황자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볼품없이 만든다면 주군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다. 상아로 세공된 상자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깔아 일필휘지의 서신과 함께 보내는 것이 미덕일 것이다.
피 냄새는 점점 짙어졌다. 문 저편에서 집안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이가 검을 뽑아 들 때 쯤이면 화산의 절륜한 초식이 무색하게 스며든 독에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효율 좋은 비열함은 청연이 자가의 이름을 버리고 주군과 함께 얻은 것이었다.
"문을 닫으면 아무도 들지 말라."
가장 끔찍하게 죽이라는 말이 명령이었다. 그래서 청연은 그리 했다. 귀를 도려냈고 입을 찢었다. 눈알을 파내고 머리의 가죽을 벗겼다. 아름다운 상자에, 황자의 이름을 적은 종이와 함께 머리를 넣어 비단 끈으로 봉했다. 청연은 명령을 따랐고 화산은 독자를 잃었다. 다음은 네번 째 황자의 차례다. 소리 하나 없는 조용한 밤에 일어난 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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