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륜(天倫)
1. 부모 형제 사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2. 부모와 자식 간에 하늘의 인연으로 정하여져 있는 사회적 관계나 혈연적 관계.
창 밖에는 살 에는 고통이 담긴 겨울바람이 불었다. 시베리아에서 온다는 바람이지만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에서 그나마 풍량이 약해진다. 제아무리 청연이고 사시사철 따뜻한 땅이라 해도, 밖에서 술을 마실 수 있을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청연은 기숙사 방을 노크하는 상대에게 열려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손님이 왔음에도 부지런히 가방 싸는 걸 멈추지 않았다. 누가 들어올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찾은 게 이거지?”
“역시 자네 사무실에 있었나. 고맙네.”
“남자가 무슨 손거울을 가지고 다녀.”
“누님이 주신 물건이야.”
백영은 친구가 반나절동안 찾던 소중한 거울을 휙 내던졌다. 청연은 잽싸게 받아 들었지만 뒤이어 살살 던지라는 볼멘소리는 터져 나온 건 당연한 순서였다. 물론 그와 별개로 거울을 찾아준 친구의 요구까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그가 좋아하는 쌍화차를 타주느라 잠시 손을 멈추었다.
포트의 물이 끓는 동안 백영은 청연이 짐을 싸던 가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홀가분한 행동거지에 걸맞게 자리를 비우는 사람의 짐 치고는 적은 양이었다.
“크리스마스에도 근무를 하던 인간이 이런 시기에 휴가라니.”
“반나절은 이동하느라 바쁘다네. 부러워 할 일은 아닐 텐데.”
“여행 가기 좋은 계절은 아니잖아. 어딜 가는데?”
크리스마스에는 대영청 직원들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보내고 싶어 휴가를 내려 한다. 하지만 설날에도 본가에 내려가는 일이 없던 청연은 올해 크리스마스도 기숙사에 수도승과 비슷한 생활을 하며 보냈다. 백영 또한 크리스마스에는 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과는 잘 알고 있었다. 자청연은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책을 읽고, 수련을 하고, 때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술을 마셨다.
“잠시 본가에 가네.”
“자네 누님께서 계신다던.”
“혼자서 십 년 넘게 본가를 지키신 분이야. 누님이 곤란해 하신다면 못 본 채 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도리?”
명백하게 비웃음이 실린 미소였다. 기가 찬다ㅡ라는 표현이 더 걸맞을까. 청연은 남에게 비웃음을 사는 걸 끔찍이 싫어하지만 백영 만은 예외였다. 백영이 짓는 미소는 오래전 자청연이 천륜의 도리를 입에 담지 못할 사람임을 알게 된 날 부터 흘린 조소였다. 청연은 그 조소를 감당했다. 제주도 지영의 유일한 사이코메트리 능력자 앞에서 만큼은.
대화가 없어진 건 서로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었다. 둘은 이미 업무 시간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었기에 대화거리는 진즉 동이 나 있었다. 게다가 주로 라디오 방송처럼 떠드는 건 청연 쪽이었고 볼륨을 줄이거나 방송을 끄는 건 백영의 몫이었다. 따라서 청연이 조용해지자 둘은 다소 삭막함이 느껴질 정도로 말수가 적어졌다.
“너 거긴 뭐 하러 가는데.”
질문을 던진 백영이 한가로이 차를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청연은 글쎄, 라는 말과 함께 퍼 머플러를 챙겨들곤 나갈 채비를 마쳤다. 굳이 말한다면ㅡ
“나의 여죄를 따지러?”
여죄(余罪)라.
백영은 그 표현이 퍽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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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고향 마을은 봄꽃이 많이 피는 곳이다.
마을 초입 돌담길부터 심어진 살구나무를 따라 들어가면 벚나무 아래에는 집집마다 나눠 쓰는 장독대가 모여 있다. 그 앞 우물가에는 매 봄마다 매화가 만발한다. 그렇게 배나무 아래 피어있는 매화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 유독 자두꽃이 풍성하게 피는 곳이 그의 집.
마을 사람들은 청연의 집을 ‘두령님 댁’으로 불렀다. 이제는 우물가에서 사람을 기다려도 하루에 열 명도 보기 힘든 그런 작은 마을에서 유독 솟을대문 하나는 대궐 부럽지 않게 큰 집이다.
자청연의 집안은 근방에서 하나 뿐인 퇴마사 가문이다. 마을에 남아 있는 대다수는 명절 설날에 자식과 손자 보는 낙으로 살고 있는 노인들뿐. 하나 둘씩 도시로 떠나던 와중 마지막으로 초등학교가 정원 부족으로 폐교 되자, 아이 있는 가정은 모두 농업을 포기하고 상경했다.
노인들만 사는 곳에서 두령님이라는 대접을 받을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두령님 댁으로 불리는 이유란, 첫 번째는 청연의 집은 이미 몇 대를 걸쳐 그 곳에서 살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구마청 시절부터 마물이 나타나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무당부터 찾는 마을에서, 청연의 조부가 굿을 벌일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상들 덕에 청연의 집안은 고향 마을에서는 퍽 존중받았다. 그리고 조상들 때문에 청연의 조부는 끝까지 퇴마사 일을 고집했다. 비록 청연의 집안이 퇴마사의 명맥만 간신히 잇는 집안이라도, 핏줄을 강조하며 자식농사에 열을 쏟은 덕에 아들만 셋이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린 현상이 나타나면 경찰서보다 청연의 집으로 먼저 달려와 상담을 구했다. 청연은 그렇게 두령님의 아들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그런 집에서 자랐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조부에게 허리를 굽히며 대접하는 사람만이 있던 마을에서.
위로는 형이 두 사람, 누나가 한 사람, 아래로는 누이동생 하나를 둔 채.
봄꽃이 넘치게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하고 그의 부모형제가 줄초상으로 죽어가기 전 까지.
ㅡ4억의 생명 보험금 상속자가 될 때 까지 청연은 그 마을에서 살았다.
못 본 새 고향 마을은 포장도로길이 나있었다. 그 외에도 나름 변했다고 주장하듯 비닐하우스가 몰라보게 튼튼해졌거나, 동네 슈퍼의 담배 표시 스티커가 새것으로 변해있긴 했다. 다만 그런 변화는 도리어 오래된 판화에 새 물감을 덧바른 것처럼 이질적으로 다가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도드라지게 만들 뿐이었다.
청연이 가볍게 훑어 본 마을에는 그간 신식 건물이나 새 집이 들어선 흔적이 없었다. 오히려 헐려나간 집터나 남겨진 터가 더 많았다. 십년 전 낡은 목재로 지어져 있던 송아지 축사는 이미 텅 빈 지 오래였다는 듯, 가축 대신해서 반쯤 썩은 골판지 상자가 먼지와 함께 들어 차 있었다.
농사철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정말 적었다. 청연이 돌담길을 벗어나 살구나무 길로 들어서자 비로소 마주친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신기한 외지인 보듯 했다. 그러나 그중 한두 명이 두령님 댁 넷째 아들이 아니냐는 말을 꺼내자 곧 모두가 안색을 달리하고 그를 다시 보았다. 반가움보다는 꺼리는 기색이 역력한 눈초리가 따라 붙었음에도 청연은 태연히 인사하고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배나무와 매화나무 심어진 길은 청연이 기억 하던 것 보다 좁은 길이었다. 흙담 위 기왓장 너머로 자두나무 가지가 내밀어진 걸 발견하자, 어렴풋이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대부분은 작고 왜소한 몸으로 방울과 부적 몇 개를 가지고 나돌아 다니던 시절의 기억들이고, 그가 잊고 살던 유년의 기억이다.
홍안의 시절이 막을 내릴 때의 기억만 어제처럼 생생할 뿐. 나머지는 모조리 잊고 살던 게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며 걷는 길 끝에는 고향집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솟을대문 앞의 익숙한 그림자를 청연이 몰라 볼 리가 없다.
단아한 이마, 비단결 같은 긴 머리를 곱게 빗어 단장하고, 우물이 얼 정도로 추운 계절조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당을 쓸던 이를 어찌 잊을까. 청초하며 타고난 기품과 자애로운 성정. 꺾일 줄 모르는 자긍심과 타고난 고귀함. ㅡ마치 난초처럼.
“오느라 고생했구나.”
“누님. 들어가 계시지 그러셨습니까.”
하얀 입김이 솟아오르는 추위에도 꼭 십여 년 만에 돌아오는 동생을 반기기 위해 마당까지 나와 있는 형제는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자청아. 청연보다 네 살 많은 그녀는, 유일하게 청연이 꽃으로 비교 하지 않은 여자였다.
청연이 떠날 때와 똑같이, 마을 사람 모두가 흰 눈을 치켜뜨며 쑥덕거리는 와중에도 의연하게 그를 마중했던 누이. 그런 누이를 앞에 두고서야, 청연은 정말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다고 실감했다.
혼자 지내니까 난방을 전부 넣고 지내진 않았다는 청아 말을 감안하더라도 집안의 공기는 참 차가웠다. 약재방의 떨어져나간 문고리까지는 넘어갔지만, 다 쓴 형광등을 갈아 끼우지 않아서 어두컴컴해진 안방에서 태연히 화장을 지우는 청아의 모습은 청연을 침묵케 했다.
결국 두 사람이 마주앉은 건 온 집안에 난방을 넣고 형광등을 갈고, 낡은 공구를 이용해 문고리를 고치며 한바탕 집안을 들쑤신 이후였다. 청연이 드물게도 사람을 부르시지 그랬냐며 쓴 소리를 하는 와중에도 누이는 집안에서 사람 기척이 나는 게 마냥 기쁘다며 웃을 뿐이었다.
“잘 왔어 청연. 그간 소식만 주고받았는데 건강한 걸 직접 보니 마음이 놓여.”
“누님도요. 썩 좋은 일로 내려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런 집에서 혼자 사는 누님이 방송을 탄다면 곱게 비춰지진 않겠지요.”
찰나의 순간 누이의 표정이 일그러진 걸 놓칠 청연이 아니었다. 다만 태연한 청연에 비해, 그의 사려 깊은 손윗누이는 이번 일을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잠시 할 말을 찾던 청아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ㅡ아영이겠지. 그 아이는 마지막까지 의심을 지우질 못했으니까.”
“그럴 만도 합니다.”
오히려 가볍게 대답한 건 청연 쪽이었다.
두 사람은 내일 당장, 이 조용하고 볼품없는 시골 마을에 닥쳐올 외부인의 존재를 안다.
커다란 방송용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찾아올 방송국 사람들은, 12년 전 있었던 기이한 사건에 대해 취재 하겠다고 둘에게 연락을 넣었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그 때마다 끈질기게 찾아와 끝내 청아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의 집념이다. 결국 청연이 나서서 취재를 받아들일 때 까지 매일 같이 누이를 괴롭히던 자들은 퍽 못마땅 한 존재들이었다.
방송국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 할 지는 어렵잖게 예상이 갔다. 그들은 아마 사고 현장과 이 집의 대문을 유심히 카메라에 담을 것이다. 그리곤 온 마을 사람들을 들쑤시며 취재를 청하겠지. 꼭 12년 전 어느 집 사람들이 줄줄이 산짐승에게 죽었던 사건을 기억하냐며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마지막으론 살아남은 청연이 홀로 물려받은 미심쩍은 보험금과 유산을 특종인 것 마냥 요란스럽게 찍어 담아 갈 게 뻔했다. 일방적인 방향으로 찍는 영상들이 어떤 식으로 입맛에 맞춰 편집되고 방송 될지 대강 예상이 간다.
“청연아. 이번 일로 네가 얼마나 기분이 상했을지 안다. 마물에 대한 이야기는 밖에 꺼낼 수도 없고.”
매년 명절마다 안부전화는 나누었지만 청연이 집으로 돌아온 적은 없었다. 그 때문인지, 누이는 동생의 심기가 혹시라도 불편해진 게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이 태산 인 듯 했다.
“하지만 너무 노여워하지 말았으면 해. 아영이는 시집을 갔고, 너는 대영청에 들어갔으니 이 집은 나뿐이잖아. 나는 괜찮아. 이제와 어떡하겠어. 예전 일은 잊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
청아는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말로 모든 걸 마무리 짓고 싶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커다란 집에 그녀가 혼자 살고 있는 한, 매스컴을 타면 다른 기자들이 출입하려 들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지금이라도 취재를 거절 하라던가, 잠시 집을 떠나 있겠다는 말과는 정 반대였다. 묵묵히 이 집에 남아서 모진 일들을 겪더라도 괜찮다는, 감내하고 버티겠다는 인내심 하나는 청연이 감히 가지지 못한 것. 그만큼 높이 사고도 남는다. 청연은 누이의 말에 끄덕였다.
“누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럴 생각이었거든요. 방송을 타면 시끄러워지겠지만, 잠깐이겠지요. 방송국에 고발 하는 정도로 아영이의 기분이 풀린다면 이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생각 해 보면 그 애와는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죠. 이렇게 원망 할 줄은 몰랐지만.”
이제는 얼굴 본 지가 몇 년이더라. 기억도 안 나는 여섯 살 터울의 아래누이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제법 예쁘장하고 귀여운 인상을 타고난 동생이지만 유독 앙칼스러운 면이 있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형제들에게도 날을 세우던 여동생은 기어코 나이가 되자 집을 나가 결혼을 했다는 통보만을 했다. 줄초상을 겪으며 기어코 완전한 절연을 선택했기에, 청연조차도 이젠 없는 사람처럼 여겨왔던 형제였다.
“물론 누님도 얼마든지. 원하신다면 제 멱을 잡으셔도 되는데.”
잡지 않을 걸 알면서도 떠보듯 말 한 건 순전히 심술이다. 창백한 안색의 청아가 할 말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동안에도 그는 다만 웃었다. 이 상황이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에. 이토록 우스꽝스러울 수가 없다.
“살아 돌아온 게 저 뿐인 건 사실이니까요.”
12년 전. 유독 밤공기가 차갑던 날. 그 때의 청연은 스무 살을 앞두고 있었고, 이미 충분 할 정도로 자신의 자질을 알았다.
마을에 나타난 것도, 청연과 형제들이 잡으러 간 것도 멧돼지가 아니었다.
새벽에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서 형제들을 기다렸던 청아가 본 광경이란, 피갑칠을 한 옷차림으로 청연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던 모습이다. 나갈 때는 넷이었지만 돌아 올 때는 한 명. 그녀는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금세 깨닫고 사색이 되었다. 그렇게 집안에 남은 남자는 청연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와 형제 두 명이 멧돼지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경찰의 발표에도 모두가 수상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비단 마물의 존재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혼자서 보험금을 타게 된 청연은 TV 프로그램에 소개되기에도, 남의 입방아에 오르기에도 참 좋은 소재거리였다.
정말로 그가 혼자서 살아남은 건지,
혹은 짐승과 마물을 핑계로 형제들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도. 아무도 모른다. 달빛도 밤길도 어두웠던 새벽녘에 있었던 일을. 오직 청연만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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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은 참 어릴 적부터 봄을 좋아했다. 꿈결처럼 핀 하얀 꽃들이 좋았다. 집집마다 피어난 꽃들이 제각각 다른 향기를 풍기는 것도 좋았다. 봄이 돌아오면 만발한 꽃들을 지켜보는 것만이 답답한 시골 생활의 낙이었다. 봄기운 가득한 햇살을 받아 꽃망울 터트린 꽃들은 오로지 흰색 뿐. 복사꽃은 없어도 그곳이 청연만의 무릉도원. 자두꽃과 배꽃, 살구꽃을 피워내는 정원 한쪽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그곳은 어느새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청연만의 선계仙界였다.
그는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마음을 애태우고 갈망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성취를 전제로 삼는 꿈을 꾸다가 자신에게 실망하기엔, 자기자신을 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청연은 꿈을 꾸기 보다는 또 다른 자신이 되는 상상을 했다. 상상은 자유라서 그만큼 즐거웠다. 자신보다 월등하게 높은 재능을 가진 자식들을 권위로 깔아 내리는 아버지도, 걸핏하면 동생을 모욕하며 우위를 주장하는 형들도, 무능력한 조부의 히스테리도 무릉도원에서 상상 할 때면 전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청연은 때로는 식물학자가 되는 상상을 했고, 취미로 빚어낸 다기에 차를 끓이는 상상도 했다. 봄이 오면 눈꺼풀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여비 삼아, 봄바람이 떠미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삶은 상상만으로 참 근사했다.
ㅡ그러나 열다섯의 청연은 곧 그 상상도 버렸다.
복숭아꽃과 배꽃을 구별하지 못했던 청연이 조부의 굿판에서 부적을 매달아 둘 꽃나무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까짓 실수가 뭐 어떠냐고 말하지 않았다. 청연의 실수는 조부의 실수였고, 조부의 실수는 곧 집안의 망신이었다. 그의 조부는 봄철 내내 정원에 핀 하얀 자두꽃만 봐도 청연의 빰을 후려쳤다.
그해 봄이 다 가기 전에 청연은 모든 봄꽃을 구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두 번 다시 꽃구경을 하지 않았다. 청연의 무릉도원은 그렇게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날 아침 청연은 고소한 냄새와 함께 잠에서 깼다. 어릴 적처럼 누이의 마당 쓰는 소리로 잠에서 깰 줄 알았는데 의외라면 의외다. 청연이 부스스한 꼴을 하며 대청마루로 나오자, 누이는 아궁이 속 불쏘시개를 쑤시다 말고 그에게 인사했다.
“좋은 냄새가 나네요.”
“잘 잤니 청연. 마침 작년에 놓아둔 밤이 있길래. 네가 좋아했잖아, 구워준다고 해도 직접 해먹었을 정도로.”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누님. 참. 언제 이야기에요 그게.”
듣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다. 칼자국을 안 내고 무작정 아궁이 속으로 밤을 집어넣는 바람에 난리가 났던가. 청아가 놀라 달려왔을 땐 이미 청연의 옷이고 손이고 새까만 그을음에 걷잡을 수 없는 사태였다. 기억났냐는 말에 청연은 대답 대신 실없이 웃어 넘겼다. 이 집에 그렇게 그럴듯한 추억이 남아있었다는 게 믿겨지질 않는다. 하기사 누님은 이 집에서 퇴마 일을 강요 받은 적이 없는 예외적 존재였으니 남아있을만도 했다.
“식사 하자.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도 더 해주고.”
“그럴까요. 마당은 제가 쓸지요.”
빗자루대를 잡은 감각이 얼마나 생소했는지, 잠이 다 날아갈 정도다. 청연은 누이가 끓이는 콩나물국 냄새에 깊은 허기를 느꼈다. 몇 시간 후 집안을 뒤엎을 인간들을 생각하면 한가롭게 아침밥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어차피 올 방송국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연은 누이와 퍽 보통의 남매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주도의 풍경, 마물 때문에 아끼던 옷이 찢어진 이야기. 얼마 전 잃어버린 코바늘이 냉장고에서 발견 된 이야기, 수탉에 든 잡귀를 오일장에서 쫓아낸 이야기.
청연에게 비일상이 드문드문 섞인 이야기를 차분히 할 수 있는 상대는 손꼽히게 적었다. 그러니 혼자 지낸 누이는 더 적으리라. 비록 비일상이 섞이긴 했지만 서로의 말을 차분히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태도는 똑같았으니 대화가 통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꼭 한 시간 후 예상대로 방송국의 프로듀서는 집에 발을 들였다.대문부터 미스터리한 느낌이 좋다는 인삿말은 청연을 충분히 불쾌하게 했다. 당장 멍석말이를 해서 내쫓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건 그들이 불편해서라기 보단 촬영 스태프 전원이 남자인걸 확인 하고 나서였다. 청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툴툴대는 걸 들어버린 청아가 상황을 잊고 웃어버릴 정도였다.
그들은 대문을, 마당을, 아궁이를, 문간을 퍽 열심히 촬영했다. 손님을 모시기 위해 누이가 깔끔하게 치워둔 사랑방으로 처음에는 청연이, 그 다음에는 청아가 들어가 카메라 앞에 섰다. 약속한 대로 모자이크와 목소리 변조를 확인 하고서야 청연은 취재에 응했다.
12년 전 날 밤의 일은 이미 뻔한 레퍼토리였다. 마물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간에는 멧돼지 두 마리가 제령을 하러 간 아버지와 형제를 덮쳤다고 발표했지만, 진상은 전혀 달랐다. 일가족이 자살한 집터에 남겨진 사념이 마물을 불렀다. 퇴치에 의욕적이었던 아버지와 두 형제는 퇴마를 하던 중에 변을 당했고 청연은 혼자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외부인에게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프로듀서는 간혹 자극적인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의도는 명백했고, 원하는 그림이 뻔히 그려졌다. 과학적인 방식이든, 미신 섞인 방법이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청연이 야밤에 가족 셋을 죽이고 생명보험금을 탄 수상쩍은 무당 아들로 비치길 원했다. 이미 청연의 가족 중 한명에게 제보를 받은 이상 그들이 얼마나 편협한 시선으로 이 취재를 대하고 있는지는 대강 예상이 갔다.
때때로 기억을 핑계로 어영부영 넘기며, 청연은 본 적도 없는 멧돼지의 크기를 과장 섞어 말해야 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와 형제의 죽음에 대해서 할 말은 없냐는 물음에 끔찍한 사건이었단 말로 취재를 끝내버렸다. 퍽 기도 안 차는 경험임이 틀림없었다.
방송국 사람들이 돌아 갈 때 즈음엔, 중천에 떴던 햇빛이 그 기세를 조금 누그러트릴 때였다. 제아무리 청연이라고 해도 이런 피곤한 일을 겪고 나면 당장 뻗어버리고 싶었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그들이 방송을 어떻게 내든 정말 아무래도 좋아졌다. 애초에 방송 따위가 뭘 어쩌겠는가. 이미 끝난 사건이다. 마을이 떠들썩해져봤자 누이는 언제나처럼 대문을 굳게 닫고 생활할 테고, 청연은 대영청에서 마물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제주도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오늘 밤이었다. 마을 초입에 택시를 불러 공항까지 가도 시간은 충분했다. 차나 마시며 쉴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청연은 물론이고 청아조차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처음에는 놓고 간 물건이 있는 방송국 사람들일 줄 알았지만, 얼굴을 내민 건 청연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청연도 누이도 갑작스러운 방문을 그리 반기는 편이 아니었다. 마을의 안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이런 식으로 집을 찾아오진 않는다. 대문에 붙여진 여러 장의 부적이나 높은 담벼락은 자연히 교류를 끊고 살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청연은 대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누이가 퍽 반갑게 맞이하는 게 의외였다. 본적 없는 사람은 경계부터 하던 누이가, 이토록 반길만한 상대를 청연은 모른다.
예상치 못한 방문자는 특이한 구성이었다. 초등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남매와 빛바랜 갈색 중절모를 쓴 중년 남성, 뒤이어 부인으로 보이는 노년의 여성이 발을 들였다. 그 중 청연과 눈이 마주친 여성은 이쪽을 바라보며 다소 사나운 표정을 했다. 어찌나 확실한 경계심이었는지, 호기심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청연, 인사드리렴. 네가 온다는 소식에ㅡ”
“피곤하니 먼저 들어가 보지요. 이야기 나누십시오, 누님.”
청연은 곧 그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흥미를 잃어버렸다. 누이가 살갑게 인사를 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해도, 인연 없던 친척과 살갑게 굴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고모할머니라는 사람이 청연을 향해 내비치는 저 표독스러움이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는데 크게 일조했다.
헛웃음이 터졌다. 그 바람에 이야기를 나누던 청아와 친척들의 시선이 곧바로 청연에게 날아와 꽂혔다. 그런데도 어이가 없다 못해 짜증이 치솟았다. 누이만이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낯빛을 달리했다.
타이밍 좋게 전화가 온 건 그 때였다. 화면 위에 뜬 전화는 대영청의 번호가 아니라 백영의 개인 번호였다. 그렇다는 건 퍽 급한 일도 아니겠지만,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자리를 뜬 다음 전화를 받자,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오늘처럼 자네 전화가 반가운건 처음이야.”
- 이건 무슨 소리야. 너 사고 쳤어?
그럴 리가 있겠냐는 넉살 섞인 말에 떨떠름한 반응이 돌아왔다. 까다로운 친구이긴 하지만 그만큼 남을 잘 돌보는 사람인 건 이미 알고 있다.
“아니 다른 문제일세. 무슨 일이야?”
- 연말정산. 자네 행정반에 가져다 낼 서류 어디에 뒀어?
“그거라면 어제 가져다 뒀어. 휴가 때문에 미리 해놨지”
웬일로, 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일 하나 만큼은 남에게 책잡히지 않을 만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청연으로선, 그 반응이 다소 불만스러웠다. 물론 청연의 볼멘 말을 즉각 무시해버리는 상대인건 잘 알고 있다.
그 쪽은 별일 없냐는 조금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자, 예상대로 ‘없다’ 라는 말이 재깍 날아왔다. 물론 굉장한 변화라는 게 단시간에 일어났을 리 없단 건 안다. 그런 변화가 있다면 청연에게 당장 복귀 명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 대단한건 아닌데 인사이동 이야기가 다시 나왔어. 중앙지영의 신규인력 충원이라는데.
“이 시기에?”
- 이유가 있겠지. 이쪽에서 갈 사람이야 어차피 뻔하고.
제주도에 눌러 붙기 전까진 나름 이런저런 지방을 돌아다녔지만 신기하게도 서울만큼은 인연이 없었다. 복잡한 도시 생활을 선호하지 않은 탓도 있다. 몇 차례 이야기가 나왔던 인사이동이지만 딱히 청연이 아니더라도 이동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지금껏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어도 큰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 어쩌면. 마음의 눈금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좀처럼 없는 변화가 오늘 이 순간 움직인 건 어쩌면 장소가 이곳이라서 그런가.
“청연아.”
“미안한데 끊겠네. 저녁에 보세. 데리러 올 거지?”
- 내가 왜?
참 매정하게 구는 친구 같으니. 청연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는지, 누이는 청연이 전화를 끊는 걸 보자마자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 조금 상기 된 표정은 유독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고모할머니는 가셨어. 근처에 온 김에 들리셨대.”
“그랬습니까.”
“...이상한 분들이 아니셔. 내가 집에 혼자 있어서 걱정되시나봐. 가끔씩 들려주고 계실 뿐이야.”
“그건 참 몰랐네요. 감사해라.”
가시 돋친 말은 자신의 귀로 들어도 이질적이었다. 몇 시간 전 아침상을 함께 했던 동생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청연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어쩐지 긴장이 담겨져 있었다. 조금 우스웠다. 그녀는 대체 무엇이 그리 걱정이고 두려운 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청연이 가방을 들고 나서려 하자 누이의 안색은 완전 흙빛이 되어버렸다. 그건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감정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누님이 워낙 예쁘시니 그럴 만도 하죠. 아-그럼 슬슬 가볼까요. 비행기 시간도 있고.”
“정말이야. 오해하지 말아, 그런 분들이 아니셔. 혼자 남은 내가 워낙 걱정이라..”
“걱정스럽다니 뭐가요. 이제 여기엔 마물도 뭣도 없는데?”
피 냄새도 나지 않는데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선 이런 웃음이 나올 리가 없었다. 누구의 몸에서 나는 냄새인가. 숨을 멈추고 스치듯 웃음을 흘리며, 청연은 발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일 줄 모르는 누이를 향해 다시 되물었다.
“대체 뭐가 그리 걱정이랍니까. ‘누가’ 누님에게 해코지라도 할까봐서요?”
“ㅡ청연.”
“재밌군요.”
“청연아!”
누이가 그의 팔에 매달린 건, 무정한 얼굴로 청연이 가방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을 때였다. 절박함마저 느껴지는 얼굴. 동화 속 호랑이를 피해 마지막으로 내려진 동아줄을 붙잡는 아이가 이런 표정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청연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애원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애달프게 들렸는지 결국 청연의 발걸음이 멈출 정도였다.
돌아 본 누이의 아름답던 이마에는 몰라 볼 정도로 주름이 늘어있었다. 시간만이 주름이 늘게 만든 이유는 아닐 것이다.
“청연. 연아. 화가 났느냐? 화가 났지? 하지만 아니야. 정말 아냐. 아무도 널 오해하지 않아. 고모님은 그저 아무 것도 모르셔서 그래. 너를 모르셔서...”
“화가 났다니요. 모든 게 저의 부덕입니다. 누굴 탓 하겠습니까?”
아버지와 형 둘이 죽어나간 와중에 청연만이 살아 돌아왔다. 게다가 재산마저 청연이 차지하고 말았으니, 누구든 의심하고도 남을 일이다. 의심하지 않은 건 딱 한 사람이다. 자신의 팔을 잡은 채 흐느끼듯 애원하는 누이만이 청연을 믿었다. 그녀는 12년 전, 너라도 돌아와 주어서 고맙다며 청연을 안았다. 누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두나무 아래에서 주먹을 쥐고 배꽃과 복숭아꽃의 차이를 외우던 청연을 조용히 안아주었던 자상한 사람.
“아닌 걸 알아. 남들이 뭐라 해도 난 네가 죽이지 않았단 걸 믿는단 말이야. 화내지 말아라 제발-”
“네. 감사합니다. 누님. 항상 감사했어요. 그런데 참.. 왜 제가 화나지 않았단 말은 믿질 않으십니까?”
청연은 그래서 누이를 가장 좋아했다. 함부로 청연을 의심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현명함을 존중했다. 자신과 다른 형제는 참 사랑스럽다. 그런 누이의 현명함이 12년의 세월동안 한가지의 진실을 확인 하지 않고 덮어두길 원했다. 아직은 가족의 울타리가 필요했던 청아의 선택이었고, 그렇다면 청연은 사랑하는 누이를 위해 그 선택을 존중하고 따르기로 결정 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시간과 함께 그녀의 마음에도 의심이 생긴 것일까. 그게 아니면, 처음부터 누이는 믿지 않았던 것일까. 이제와선 청연조차 구별 해 내기 어려웠다.
ㅡ청연은 형제를 죽였을까, 죽이지 않았을까?
ㅡ누이는 청연을 믿었을까, 믿지 않았을까?
아무도, 아무도 모른다. 달빛도 밤길도 어두웠던 12년 전 새벽녘의 일. 그리고 누이가 버리지 못한 의심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누님은 한 번도 제게 형제들을 죽였냐고 묻지 않으셨지요.”
청아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깊은 물 밑에 잠겨있다 끌려 나온 사람처럼 어찌 할 바 모르고 그저 청연의 팔만 붙잡고 있던 손이 살짝 떨어졌다. 이제야, 당신 또한 내가 겁이 나기 시작했을까. 잔인한 물음들이 자꾸만 머리위로 솟아났지만 그걸 누이에게 던지지 않게 노력했다.
“한 때는 그게 누님의 배려라 생각했습니다. 헌데 시간이 지나 보니 알겠더군요. 진실을 확인하기 무서우셨습니까?”
“아니야. 청연아, 난 그저..”
“물어보셨다면 대답했을 겁니다. 제가 죽이지 않았다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실제로 마물이 죽고 경찰이 들이 닥치기 전, 대영청에서 먼저 사람들이 도착했다. 일의 전말을 전해들은 그들은 한 명의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를 데려와 청연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했다.
그들은 청연의 기억을 통해 두 가지를 보았다. 하나는 마물이 그의 아버지와 형제 둘을 찢어 죽이던 광경. 남은 한 가지는, 청연이 아버지와 형제의 숨이 끊어지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걸 보았다.
“누님. 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살리질 않았을 뿐이에요. 그들이 멋대로 죽어 갔을 뿐.”
12년 전, 마물을 앞에 둔 청연의 앞에는 죽어가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있었다. 피거품을 토해내며 상처를 틀어막으려 애쓰던 아버지와 충격에 빠진 맏형이 있었다. 한심 할 정도로 벌벌 떠는 셋째 형은 청연의 도망치는 게 좋겠다는 충고조차 듣지 않고 마구잡이로 나섰다가 단박에 꼬꾸라져서 목이 부러졌다.
피를 나눈 육친이 도륙 당하던 참람한 광경을 마주하며 청연은 다만 감상에 젖었다. 분명 여태껏 시골 마을에서 얄팍한 지식만으로 떵떵거리던 퇴마사들에겐 감당 못할 마물이다. 하지만 청연이 마음을 먹는다면 혼자서도 퇴마 할 수 있으리라. 그의 아버지를 구하고, 형제의 목숨을 온존케 할 수 있겠지.
ㅡ하지만 저런 마물 따위가 뭐라고. 천륜 따위가, 대체 뭐라고?
“살릴 가치가 없었지요.”
가족애가 희박했던 탓일까? 자기애가 뛰어났던 탓일까? 하늘이 내린 윤리를 중요시 하지 않아서인가?
치욕을 잊지 않는 성정 탓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봄날에 뺨을 맞고 구제불능이라는 선고를 받았던 앙갚음?
단지 십수 년 동안 억압 받던 마음이 발출 된 것뿐이었나? 오롯하게 그것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럴 리가 없다. 그 날 청연은 자신의 천명을 알았고 성정을 알았다.
그는 쭉 집안을 숨 막히게 했던 조부가 싫었다. 거리낌 없이 자식을 질책하고 압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던 아버지가 싫었다. 자신보다 무능했던 형제가 싫었다. 혈육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청연은 다만 흘러가버린 제 시간이 안타까웠다. 조금 더 빨리 이 순간이 왔으면 좋았겠다며 배덕한 사색에 잠겼을 뿐이다.
천륜의 고리에 갇힌 홍안의 시간은 더없이 아깝고 억울하기만 했다. 그래서 선택 한 것이다. 인성을 버리고 천륜을 져버리더라도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기로.
“왜 하필 그 때 깨달았을까요.”
주변을 밝히는 등불 하나 없는 밤이었지만, 한없이 찬란하던 순간이었다. 아버지와 형제의 숨이 모조리 끊어진 걸 확인하고서야 청연은 움직였다. 주변의 초목을 모조리 녹이는 산성과 독기 가득한 폭풍이 한바탕 휘몰아쳤고, 마물의 사지를 하나하나 베어내고 반으로 갈랐다. 사뭇 고요해진 사투의 현장에서 혼자 우뚝 선 청연은 후회를 하긴 커녕 후련하기까지 한 감정을 느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펼쳐 볼 기회가 없었던 힘을 깨달았고, 청연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날이었다. 기쁘다는 감정이 그가 알고 있는 윤리와 도덕으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종국에는 받아들였다. 타고난 성정을 어찌 할 것인가. 종이 위에 떨어진 먹물을 어떻게 지우겠는가. 잃어버린 인성을 찾거나 배울 수는 없다.
그 날 청연은 마물이 되었다. 오욕칠정을 간직한 채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천륜의 고리를 제 손으로 부수어내고. 태연한 발걸음으로 누이가 기다리던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열었다.
“ㅡ어쩌면 제 안에도 마물이 살고 있나 봅니다.”
비로소 청연을 붙잡던 청아의 손이 완전히 떨어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묵하는 누이에게 건넨 청연의 인사에는 여전히 친애가 담뿍 담긴 말이었다. 대문을 나서는 청연을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는 없었다.
제 동생의 기질이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 맹수는 아닐지언정, 조용히 스며드는 독안개 같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이와 청연은 참 닮은 형제였다. 얼음으로 된 뼈, 서리가 흐르는 피와 차디 찬 눈 덮인 살로 만든 겨울 같은 인간이다. 결심한 일은 냉정하게 행한다. 진실을 묻어두고, 안타까운 사고로 둘 만 남은 남매로 12년을 살았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 누이는 이 다음 만날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떤 선택을 하든 현명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니 뒷일이 걱정 되지는 않았다. 12년 전 집을 떠날 때와 똑같이, 청연은 후련하기까지 했다.
청연은 한 때 그의 무릉도원이었던 자두꽃 피던 정원을 뒤로했다. 돌아보지 않고 마을 초입까지 나가는 동안 여러 꽃나무를 흘겨보았다. 봄이 되면 한껏 흰색을 뽐내며 피어날 꽃들은 예전과 달리 기대되지 않는다. 대신 청연은 다른 걸 기대했다.
12년이 흘렀다. 청연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음을 방조 할 정도로 사람이 싫어 진 적은 그 후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범인(凡人)과는 분명 다른 자신의 성정은 잊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선을 넘겼고, 도리를 외면했으며 천륜의 고리를 깼다. 목숨의 경중을 다루는 감각이 남과 다른 건 의심 할 여지도 없었다.
살던 곳을 떠나서며 시작된 고찰이다. 마음의 눈금이 아직은 인간의 편을 들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고작 부모형제를 사지의 구덩이로 걷어 찼다 해서 굉장한 마물이 된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쭉 인간 거죽을 뒤집어 쓴 채 태연하게 삶을 마감하게 될까.
돌이키지 못할 선을 넘기고 혈육이 죽어도 웃어 넘기게 된 성정을 깨닫게 된 날부터, 청연은 마물을 향한 솔직한 흥미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부모형제의 상을 치르고 마을의 시선이 불편해서 집을 나선 후, 몇 년을 떠돌며 전국을 돌았다. 마물의 탄생과 근원을 조사 해 보기도 했고, 때때로 마물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얼마 후 본가에서 제주도로 돌아온 청연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인사이동을 신청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마물과 능력자들이 모인다는 중앙지부는 여태껏 살아본 그 어느 곳 보다 시끄러울 장소 일 것이다. 어쩌면 마물에 대한 좀 더 흥미로운 가담항설을 벗 삼아, 그의 인생에 재미있는 양념을 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순전히 흥미위주의 선택이지만 어차피 최소한의 도덕만이 남은 인생이다. 재미라도 남는다면 남는 장사라며, 그는 웃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제주도 지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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