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기분 좋게 깬 것 치고는 일진이 참으로 미묘했다. 면도를 하는 와중에 울리는 알림에 부리나케 두루마기를 챙겨 나섰는데, 번화가도 주택가도 아닌 영동대교 도로 위 갓길에 나타난 마물이라니. 외부인의 시야를 차단한다는 결계사의 결계야 완벽하겠지만, 겨울날 강가에 불어오는 바람은 마주 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섧게 만들었다. 게다가 유난히 아침 공기가 시리지 않는가.
마물이고 나발이고 이 짓을 뭣하러 하고 있는가 하는 탄식이야 이미 몇 년 째 하던 일이었다. 다만 마물을 랜덤으로 생성해서 서울 시내에 배치하는 어플을 쥔 잔학무도한 악의 비밀결사라도 있는가, 하는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일이 터질 뻔 했다. 전세버스 위에 올라타려 드는 마물을 보며 그때서야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청연은 강화된 각력으로 8미터 쯤 되는 거리를 단숨에 좁혀 마물을 난간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덕분에 반동으로 결계에 등짝이 화려하게 부닥쳤다. 남의 속도 모르고 환술사는 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침부터 고함질이었다. 아침 출퇴근시간이었다면 그 시점에서 수습하느라 사단이 났으리라. 그런 점에선 차라리 시간적인 여유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소리 없이 생겨난 꽃폭풍이 결계 안을 가득 메웠다.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는지 족히 삼 미터는 되는 몸을 웅크리던 마물이 드디어 이쪽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마물과 청연의 손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태도가 뽑히기 무섭게, 도심 한복판에서는 들릴 리 없는 이명이 수십 번 일어났다. 폭풍의 흐름 따라 춤을 추던 꽃잎은 마물에게 닿자마자 꺼먼 연기를 연신 일으키며 살갗을 녹여냈다. 등에 꽂힌 나이프를 걷어찬 다음 억지로 피부에 접촉한 후 연거푸 힘을 방출하자, 예상대로 한껏 발버둥 치던 마물은 곧 독기를 버티지 못하고 기세가 약해졌다. 난간과 가로등이 퍽 보기 좋게 부식되는 가운데 청연이 정수리에 태도를 꽂아 넣은 게 결정타였다. 마물은 괴악한 신음을 쏟아내며 녹아내렸다.
이른 아침의 전투는 그렇게 끝이었다. 영동대교 한복판에서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홑옷인 두루마기라도 걸쳐야 살겠다며 본부로 귀환 했을 때는 이미 몸에 열이 찼다. 자신에게는 부산스런 아침 인 것 치고는 얄미울 정도로 대영청 내부가 조용했다.
큰 상처는 없었지만, 청연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무실에서 감기약과 영양드링크를 챙겨 돌아가던 와중이었다. 저편에서 다가온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살갑게 손을 흔들더니, 들고 있던 차트로 그를 툭 쳤다.
“아침부터 고생했어. 화려했다며?”
“그 정도면 수수한 편이지. 좋은 아침이네. 철야인가?”
“그럴 리가.”
언제 봐도 의사치고는 화려한 복장이다. 백색 가운을 드레스처럼 소화하는 델타팀의 과장 가울의 눈동자는 생기에 차있었다. 특유의 위세는 분명 영물만이 지닌 카리스마와는 또 달랐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길이겠지 했던 게 이쪽을 살피는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일인가?”
“별 건 아냐. 임무 마치고 이쪽으로 왔다길래.”
명백히 용건이 있어 찾아 온 것인가 싶어 몸을 틀고 의아하게 바라보니, 별안간 그녀의 손에 쥐여있던 차트가 내밀어졌다. 내밀어진 의료기록부에는 몇 년 전 찍었던 청연의 사진과 지금까지 받은 진료기록이 소상히 적혀져 있었다.
“네게 뭣 좀 확인하려고. 중앙으로 오기 전에 신체검사는 했어?”
“했지. 몇 달 귀찮아서 피했지만 더는 못 피하겠던데.”
“이런 걸로 의료반 귀찮게 굴기야? 하여간. 어쨌든 이게 청연의 최신 정보인거네 그럼.”
이쪽이 끄덕인 걸 확인하자 그녀는 포켓에서 볼펜을 꺼내곤 그래, 하고 대답했다. 청연의 머리로는 그녀가 이런 아침부터 왜 반출 금지인 차트를 의료반에서 들고 나왔나 싶어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곧 가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혈압이 생각보다 높아서 확인 하러 온 거야. 이 그래프 보여? 매 년 조금씩 높아지는 거.”
“아... 그건 아마 집안 내력일세.”
가울이 들이민 차트를 확인하자, 과연. 의사가 아닌 제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1,2년 정도는 뚜렷한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가장 최근의 혈압과 6년 전 혈압을 비교해보자 그 차이가 확연하다.
기관에 들어 온지 벌써 6년 이다. 이런저런 지영을 떠돌아다닌 데다 구실을 들어 정기적인 검진을 피해왔다 보니 제 혈압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었지. 그 결과, 올해의 체력검진에서 고혈압과 정상의 경계에 걸쳐진 점 하나가 유독 못나보였다. 가울 또한 그 점이 신경 쓰였던가보다. 정기 검진 기록은 듬성듬성 빠져있기까지 하니까.
이제와 6년 전 어리바리하던 자신을 탓 할 수는 없지만 분명 곤란한 상황이었다. 당시엔 적으라고 해서 멋모르고 구구절절 꺼내려간 가족 내역이 귀찮아 질 때가 올 줄이야. 유독 명줄이 길었던, 혈압약을 챙겨 먹은 조부를 기억한다. 잊을 수가 있을까. 수발을 들 적 잊기라도 하면 손자가 자신을 죽인다며 소리를 지르던 사람인데. 청연이 시덥잖은 일을 기억해 내는 동안에도 상대는 태연하게 병력을 짚었다.
“어디 봐. ...그러네. 딱 봐도 합병증이잖아. 당뇨에 뇌경색? 누구셨어?”
“조부님. 그래도 약을 꾸준히 드셨네. 마지막엔 편히 가셨고”
미간을 찌푸려도 보기 좋은 모습이라니 퍽 신기하다. 가울은 아버지도 고혈압이셨잖아, 하고 작게 핀잔을 주더니 가만 차트를 훑었다. 이미 그 시선은 가벼이 술잔을 나누던 친구가 아닌 의사의 눈을 하고 있었다. 묘한 침묵을 채우겠다고 실없는 소리를 꺼낸 이유는 분명 그 탓이다.
“어느 쪽이냐 하면 나는 저혈압이 아닐까 했는데. 자다 일어나면 좀 끔찍하길래.”
“청연. 하루에 얼마나, 어떻게 자고 있어?”
망했다, 라는 표현은 아마 지금 이 순간에 사용 하는 게 적절하겠지. 적절한 단어가 적절한 순간 들어차면 사람의 말문이 막힌다. 싱글벙글 웃던 얼굴이 보기 좋게 굳어졌음을 자신이 알았으니 상대가 못 알아 챌 리 있을까. 이 것 만큼은 대답하다가 혼이 날까 무서워 입을 조개처럼 다물어버리니 가울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요즘 운동을 좀 덜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현장 그렇게 나가는 사람이 운동 부족이란 소리 하면 직무 유기 아냐?”
“엄밀히 말하면 직무는 아니지. 다만 필수적으로 체력 관리를 해야 한다 주장한다면, 음. 게으름을 피웠다고 할까 거드름을 피웠다고 할까. 내가 요즘 생각이 많아서.”
“청연.”
개구리 앞의 파리도 아닌데 혀가 뚝 멈춰버린 이유가 뭘까. 자기에겐 뱀 같은 구석이 있다고 밉상 맞은 소리나 해댔던 자청연이었으나, 지금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작금의 황소 개구리는 뱀도 먹더라.’ 같은... 뭐라고 할까, 쓸 때 없는 잡지식이 퍽 반갑지만은 않은 생각이랄까.
물론 그렇다고 가울이 황소개구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ㅡ 그녀의 외견은 오히려 흑과 백, 마치 중국에서 외교적인 호의를 보여주는 귀엽기까지 한 판다 같은, 아 판다라고 하면 휴가철에 신선들과 바둑이라도 두고 올 것 같은 묵군이 생각나지만 그거랑 이건 또 다르다고나 할까.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본다면...
“ㅡ청연. 쓸 때 없는 생각 말고 운동해.”
“옙.”
여부가 있을까. 청연은 신속하게 마음의 입을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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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운동 한다고?”
“안 한다고 할 수는 없었네. 그 상황에선.”
녹색 매트리스를 펼쳐놓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더니 생각보다 어깨가 뻐근했다. 5분전, 도무지 혼자 힘으로는 어깨를 바닥에 닿을 수가 없어서 허리라도 펴야겠다고 몸을 비틀던 때였다. 누군가가 상체를 꾹 내리 누르는 게 아닌가.
“유연성이 엄청 부족 한 것 같은데.”
“살살 누르게, 요즘... 운동을 조금 안했을 뿐이야. 요즘. 극히 최근!”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졸렬한 변명이었으니 남의 귀엔 오죽 했을까. 유환은 퍽이나, 라는 말을 끝으로 사정없이 내리 누르더니 기어코 청연이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그를 일으켜 세웠다.
유환은 종종 기숙사나 밖에서 마주칠 때 보다 홀가분해 보이는 트레이닝 복 차림이었다. 때론 차분해보이던 인상을 날려버릴 만큼 색달랐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을 채 표표히 활보했을 때는 구름 뒤에 숨겨진 달처럼 조용한 존재감이 있었지만, 사방이 밝은 트레이닝 룸에서 하얀 운동복을 입고 있으니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는 육상 선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청연은 팔을 쭉 뻗곤 어깨를 앞뒤로 움직였다. 평소라면 런닝머신으로 올라가든 뭘 하든 운동기구를 이용했겠지만 운 좋게 마주친 인물 덕에 오늘은 스트레칭만 끝내면 궤도를 달리 해도 괜찮을 듯 했다.
“자네 잘 먹고 잘 컸네 그래. 조금 찌워도 괜찮겠네.”
“응??”
“키 말이야.”
이제야 깨달은 게 우습지만, 새삼 유환과 자신의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는 걸 가까이에 서고 나서야 알았다. 마르긴 했을지언정 왜소한 체구가 아닌데, 왜 진즉 알아채지 못했는지 의아 할 정도였다. 유환은 금세 이쪽의 말에 담긴 의도를 알아 챈 듯 했다. 짓궂은 얼굴을 하곤 이쪽을 놀리려 드는 모습이 꼭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와 같았다.
“그러는 너는 좀 더 악착같이 먹어서 좀 크지 그랬어. 키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이상한데서 연연한다?”
“평소라면 연연 할 리 없는데... 중앙이라 그런가. 잘 먹고 잘 산 외국 사람이 유독 많아 뵈네.”
에둘러 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투덜거리는 와중에 청연의 머리에는 몇 명의 인물이 스쳤다. 청연을 가뿐하게 공주님 안기 하고도 남을 2미터의 건장함과 30센티의 미니멀함을 동시에 갖춘 늑대 영물은 그렇다고 치자. 화사한 베이비 핑크빛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까지도 그렇다고 치자고. 영물들이잖아.
하지만 혼자서 근방의 대형 정전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백만볼트의 사나이라던가, 주말 아침에 청연을 앉혀놓고 팔뚝만한 샌드위치를 작살냈던 델타팀 요원을 생각하면 억울하기까지 했다. 키 차이는 인종의 차이인가. 그런 걸까 정말. 황인종으로선 한계 극복이 절실했다. 모난 소리가 튀어 나올 수밖에 없다.
“키는 왜 그렇게 다들 큰 건지.”
“왜. 청연도 못 먹고 산 모습이랑은 거리가 멀어.”
“내 키와 허리 사이즈는 과거에 기인하지. 어릴 적에 밥상머리 앉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자네도 일주일 내내 나물반찬만 먹고 살아봐야 해!”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라는 짧은 투덜거림을 청연은 즉각 무시한 다음, 마저 팔과 다리를 쭉쭉 펴며 스트레칭의 마무리 동작에 들어갔다. 목에서 들리는 관절소리가 유독 컸다.
“두릅, 미나리, 시금치!”
“스트레칭을 화내면서 하는 건 처음 본다.”
“고사리! 달래! 곰취! 냉이! 돌나물! 콩나물! 난 야채고 채소고 모조리 지긋지긋해!”
“친환경 밥상 리스트야? 반잔 투정도 이쯤 되면 원한이 서린 것 같네.”
청연이 꽤액 하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유환은 약간의 한심함이 섞인 어조로 혀를 찼다. 마지막으로 발목 관절을 다 풀며 가만 생각 해 보니 눈앞의 이 남자와는 이 상황과 비슷한 일로 만났었더란다. 여전히 끝내주게 입맛에 안 맞는 대영청의 사내 식당에서 강낭콩 자반을 벌레 씹은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게 자신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말을 걸어온 쪽이 아마도 유환이었고.
“...내가 원래 그런 캐릭터가 아닌데.”
“뭐가?”
“그런 게 있네.”
“흐음. 혼잣말을 하는 건 좋은데 말야.”
준비 됐지, 라는 말에 청연은 목에 걸친 수건을 벽에 걸었다. 어차피 둘 뿐이고 저번에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런 말로 아주 가볍게 몸을 부딪쳐보자고 결정했다.
“넋 놓고 있으면 다친다고?”
예고조차 없이 얼굴 정면으로 하이킥이 날아왔다. 발뒤꿈치가 십 센티만 더 깊게 들어왔으면 코뼈를 박살 낼 거리에서 가드.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팔꿈치로 전부 막지 못할 흉부 아래로 연달아 미들킥이 들어온다. 순간 번개처럼 든 생각이란ㅡ
어랍쇼. 성격 나오네, 이 인간?
“자넨 내게 좀 더 상냥할 필요가 있어!”
“장담하는데, 이 정도면 상냥해.”
그 다음은 인정사정없는 난타전이었다. 공력을 담은 유환의 다리가 날아왔다. 청연의 손도지지 않고 집요하게 거리를 좁혔다. 무식 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주먹과 킥이 오갔다. 서로 순순히 맞아주진 않았지만, 제압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서로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했을 뿐인데, 이전 유환이 앓는 소리를 내며 대련했던 날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일반인 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발현자들의 싸움이란 살벌하단 말로는 끝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레프트 어퍼와 어퍼컷이 빗나갔다. 잡기는 없다시피 하기로. 암묵의 협정이다. 파운딩을 할 것도 아니니 어차피 상관없지 않을까. 청연의 목으로 날아온 묵직한 주먹은 예상보다 짧았다. 주먹을 막아 낸 다음 매섭게 뿌리치자 왼손이 얼얼하고 찌릿했다. 이 조차도 지금이 아니면 겪지 못할 못하는 고통이리라. 힘을 실어 명치로 꽂아 넣으려던 팔이 재빠른 몸놀림에 목표를 잃었다. 말없이 휘두르는 팔과 주먹이 빨라질수록, 움직임은 커졌고 힘이 실렸다. 페인트. 그 다음은 훅. 카운터를 노리는 걸 알았는지, 유환은 쉽사리 거리를 좁히거나 큰 동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말없이 휘두르는 몸짓은 점점 커지고 힘이 실린다. 몇 분 동안 끈질기게 동체시력으로 주먹 안쪽을 파고드느라 유환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체력을 꽤나 쓰고 말았다. 그래, 어쩌면 유환처럼 어지간히 공방을 회피하는 상대에겐 집요하게 거리를 좁히는 끈질김이 제 성격일지도. 덕분에 마물을 상대 할 때 쓰지 않는 근육까지 전부 보기 좋게 자극 중이었다. 이렇게 육탄전의 전투를 벌일 일은 애초에 거의 없으니 자극을 안 당하려 해도 안 당할 수가 없겠지.
그 짧은 시간,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은 참 편했다. 땀 흘리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도 말이다. 자연히 몇 번이나 간격을 벌렸다 좁히길 반복했다. 청연은 이 순간이 썩 마음에 든다는 걸 인정했다. 비록 사내 둘이서 오후부터 진창으로 주먹다짐을 하는 광경으로 비춰지더라도 말이다. 불편한 침묵이 싫어서 실없는 말로 채워 넣는 시간보단 훨씬 나았다. 그런 걸 깔끔하게 인정한 게 얼마만이더라.
그만 두자고 약속 한 건 아니었지만 맹공을 퍼붓다가 제 풀에 지쳐 서로가 멀찍이 떨어졌다. 끈끈한 땀을 닦고 나자,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자넨 퍽 익숙한가보군. 아이고... 허리야.”
“뭐 동생이랑 가끔씩 했거든.”
“차라리 나도 동생 쪽이면 나았을까...이쪽은 형님께서 아주 상대를 안 해주셔서.”
“사이가 나빴어?”
“동생 취급을 못 받았네.”
숨을 힉힉 몰아쉬며 한 대답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집안과 얽힌 기억들은 무엇 하나 좋은 게 없다. 그럼에도 생각이 나 버린다. 가끔씩 오래된 책이나, 교과서 안에서 발견한 포스트잇처럼, 건드리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다. 발견하거나 떠올려봤자 그립지도 소중하지도 않은 기억. 다만 오래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금 특별 할 뿐이다. 유환은 하얀 티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청연은 형제가 많다고 했었지?”
“형제가 셋. 누이가 둘. 나는 넷째. 덕분에 어지간히 성가셨지.”
“예를 들면?”
“글쎄... 그러고 보면 온천하던 날에도 물어봤었지? 발현자 전원이 형제면 어떤 분위기냐고.”
어느새 물병을 손에 든 청연이 단숨에 병을 비웠다. 물을 넘기고서야 갈증이 타는 듯 했단 걸 깨달았다. 땀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실내의 공기는 답답하고 피부는 후끈거렸다.
잠깐의 침묵이 머물렀다. 뒤를 돌아 본 청연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과거를 더듬어 본 만큼만 눈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ㅡ나는 비오는 날에는 퇴마사 취급을 못 받았네. 상성이 안 좋거든.”
“비오는 날? 아ㅡ그런가. 산성과, 독성이랬으니.”
능력을 잠시 동안이지만 직접 목도했던 덕분일까. 유환이 금방 제 말뜻을 이해 한 게 기뻤는지 의외였는지 청연의 눈이 다시 둥글게 휘어졌다.
“맞아. 내 꽃폭풍이 비에 녹으면 어찌 됐을지 상상 해 봐.섞여서 산성액이 되고 독액이 될 텐데, 지하수로 흐르기만 해도 대형사고지. 마을 주변이 썩어 문드러지는 걸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잖나.”
산성과 독성이 섞인 꽃폭풍을 만들어 날리는 능력은 당연히 마물에게 향했을 때가 가장 위협적일테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란 건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
청연에게는 비 오는 날이 바로 그런 위험요소가 늘어나는 날이구나 생각하면 이해가 어렵지는 않았다. 유환은 끄덕였지만, 한 가지의 사실을 지적했다.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네 잘못도 아니고,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젠 아니잖아?”
“음. ‘누가 어떻게 못 해주면, 너 알아서 해.’ ㅡ매사가 그런 식이었어. 형제들에게 쉴 새 없이 꼬투리를 잡히며 살았지.”
“...그렇구나.”
아마도 청연과 유환 두 사람 다 느끼고 말았을 테다. 따지는 게 우스울 정도로, 참으로 유치한 꼬투리였다는 것을.
사소하고 하찮았다.
졸렬하고 우스웠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마음이 울분처럼 쌓일수록 돌이킬 수 없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청연의 목소리는 조금 냉소적으로 젖어들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능력은 못 써, 아버지고 형님이고 자기가 퇴마 하겠다면서 잠깐 막고 있으라던가, 몰아 내라던가, 사람을 턱 끝으로 부렸지. 그래놓곤 퇴마가 끝나면 내게 한 일이 뭐였냐며 쏘아붙이는데... 짜증이 이만저만 치밀어 오르는 게 아니었어. 비 오는 날마다 저주 했던 것 같네. ㅡ어디든 가서 좀 죽어주지 않으려나, 하고.”
아주 잠깐이지만 트레이닝 룸의 공기가 습기 찬 듯 무거워졌다.
청연의 목소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 그건 목소리보단 시선 쪽이었다. 재빠르게 유환의 안색을 살피는 청연의 얼굴이 묘하게 긴장에 젖었다. 치기 어린 시절의 형제싸움을 다 지난 시절의 일이라며 들려주는 늙은이의 여유가 사라졌다.
여유가 사라 질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마지막 말은 실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이미 무능했던 아버지와 형제들을 내심 청연이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는, 이날 이 순간까진 단 한 번도 남에게 말 한 적 없었다. 남에게 터놓아서 좋을 일이 아닌걸 알기에 쭉 다물고 살았다. 그것을 귀신에 홀린 것 마냥 깜빡 입을 잘못 놀린 것이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마음을 너무 내려놓았을까. 엎질러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겠지만.
청연은 도로 태연한 얼굴을 하며 물병을 내렸다. 뒤통수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을 모른 척 하며 입을 연다.
“적어도 나 같이 형제가 많은 집안은, 누구 한 명이 정점에 서야 하는 구조야. 필연적으로, 정점이 되실 아버지나 장남을 위해 짓밟히는 사람도 있어야 했고. 짓밟힌 사람 중 한명이 나였지.”
“확실히 퇴마사 가문은 클수록 그런 분위기가 있는 거 같긴 해.”
“맞아. 차라리 철저하게 능력이나 실력으로 짓밟힌 거라면 납득이라도 했을 텐데.”
키도 나이도 보이지 않는 서열을 정할 때는 짐이 되었다. 남자 중에는 막내였기 때문에 홀대를 샀고 막내라고 귀여움을 받기에는 여동생이 있었다. 거지같은 집안이었지만 거기까지 말 할 필욘 없겠지. 청연은 크크크, 하고 속편하게 웃어버렸다.
뒤이어 너 그렇게 밟히면서 자란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하고 짧게 덧붙인 유환의 목소리가 참으로 평이했다.
사람의 마음과 태도는 시선과 눈동자에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 유환은 관찰하는 재미가 없다. 떠보는 게 쉽지 않고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기에도 어려운 상대다.
자청연은 종종 김유환을 달의 뒷면을 지닌 사내라고 생각했다. 달은 지구를 기준으로 언제나 앞면 밖에 볼 수 없다. 이 남자 또한, 타인에게는 철저하게 자신의 일부분만 보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이게 왜 과거형이냐 하면.
“그치만 다 그런 걸지도. 내 동생 새끼도 보통 성가셨던 게 아니었으니까.”
“흠.”
이렇게.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종종 뒷면이 보이곤 하니까.
누구나 타인에게 자신의 속내를 낱낱이 까발리지 않는다. 다만 유환도, 청연도 분명 남을 대할 때는 일관적으로 뻔뻔하게 구는 면이 있었다. 비치지 않고자 하는 일면은, 툭 터놓기보단 가만히 다잡고 웃음으로 대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뒷면이니 유환이라고 특별 할 리는 없다.
다만 청연은 유환이라는 사내의 앞면 보다는 뒷면 쪽이 종종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인간이지 않을까- 하는 경솔한 확신을 가지곤 했다.
태생처럼 타고 난 여유로움과 차분함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유환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 그림자들로, 남과 자신의 경계를 녹여내고 흐린다. 그러다가 어쩌다 동생의 이야기를 때때로 꺼낼 때면 유독 강렬해지는 것이다. 암흑에서 무채색, 무채색에서 유화물감의 그림처럼 선명한 뒷면이 유환에게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다 옛날이야기지만. 청연도 그렇지 않아?”
여기서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하면, 어떤 얼굴을 할까. 청연은 벤치프레스에 기대앉아 혼잣말을 가만 삭혔다. 다시 달의 뒷면이 자취를 감췄네. 아주 잠깐 소리 없이 웃어버리곤, 맞아- 하고 돌려주는 자신의 목소리 또한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나도 그렇네. 다 옛날이야기지.”
“지금은 독립 했으니까. 옛날 일은 생각 하면 머리만 아프지. 그랬었구나, 하고 넘겨버리는 게 편해.”
“나도 딱히 두고두고 못 잊고 있는 건 아니네. 애초에 내 원한은 한 번 사면 감당 못한다고.”
“그럴 거 같긴 하다. 근데 원한이 끈질긴 남자는 좀 별로일 걸?”
“얼굴로 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내 어디가 어때서!”
“네 어디가 어떻단 말은 한 적 없거든?”
아무 생각 없이 벤치프레스에 누워본 청연은 곧 꽥 소리를 내며 바벨을 도로 내려놓았다. 남의 무게에 맞춰진 바벨은 누가 쓴 건진 모르겠지만 파격적인 무게였다. 유환이 다시금 손목과 발목을 돌리는 와중에, 청연은 재미있는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라? 무기 쓰려고?”
“응? 그래. 간만에 불이 붙었네. 어울리게.”
“우와ㅡ 의욕이 넘치나봐. 살살 해줘.”
“자네야 말로 좀 살살해... 대뜸 면상으로 킥부터 날린 인간이.”
“나 무기는 제법 다룰 줄 알아. 괜찮겠어?”
청연은 벽에 세워져 있던 딱 일 미터 쯤 되어 보이는 긴 나무장대를 들고 왔다.
장대는 예상대로 휘두르거나 돌리는데 손목에 무리 없는 무게였다. 유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괜찮고말고! 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내심 쫄아 있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다. 그림자를 자유자제로 구현하는 능력을 쓴다면 어지간한 무기는 구현하고 제 몸처럼 다뤄 봤겠지.
반대로 청연은 나이프를 던지거나 검을 이용하는 능력은 출중하지만, 그 외의 무기와는 도통 연이 없었다. 어쩌면 이번엔 정말 호되게 두드려 맞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침을 꼴깍 삼키던 때였다.
- 마물 발생. 현재 좌표 전송중입니다.
치분한 목소리가 이질적일 정도로 긴급을 요하는 사항이 아닌가. 대련은 말없이 끝이났다 청연도 유환도, 서로를 마주하다가 깔끔하게 장대를 놓고 물병을 치운 후 수건 옆에 놓아둔 두루마기를 들었다.
먼저 투덜거린 쪽은 청연이었다.
“아니 이런 젠장. 생각 해 보니 나 오늘 두 번째 출동이라고.”
“운이 없다고 생각 해. 몸도 풀었고.”
“역시 순간이동이 필요해...”
“또 그 소리야?”
작은 핀잔이 뒤따랐지만 트레이닝 룸을 나서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알파팀 요원 둘은 그런 인간들이었다.
-
-
유환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청연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어찌나 세게 잡아 당겼는지, 켁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청연은 곧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래서 목덜미를 매만지며 자신을 잡아당기고 몇 발자국 떨어진 유환을 향해 원망 섞인 말을 던지려 했다. 방금 전 자신이 서있던 자리에서 파공음이 연달아 터지지만 않았더라면 꼭 그리 했을텐데.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 게 좋겠어."
그러게 말야. 대답은 삼키는 대신 공감하며 청연이 몇 발자국 물러났음에도 마물은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알파팀이 아무리 빠르게 출동 한다고 해도, 대다수의 마물은 발생 된 곳에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 주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청연이 유환과 함께 출동 하는 동안 마물이 움직였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복잡한 서울 도심의 번화가 한복판이 아닌, 공사 현장부지 안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엔 쾌제를 불렀다. 본디 마물은 크기부터 종류까지 모조리 천차만별이지만 위협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요원도 인파속에서 마물을 퇴치하는 상황은 반기지 않는 법이다. 지켜야 할 일반인이 많을수록 제약이 늘어나고 더 많은 인력이 요구되니까.
함께 출동한 장소는 낙성대 인근 초등학교 건설부지였다. 마주한 마물은 노루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 토끼형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쫑긋 선 귀가 네 개였고 눈이 여섯 개라는 점이 포인트겠지.
흙바닥에는 방금 전 공격으로 움푹 패인 자국이 남겨졌다.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사이즈 정도는 될까. 분명 위협적인데다 공격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저런 걸 맨몸에 맞으면 최소 갈비뼈다. 청연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두루마기를 여맸다.
"어쩐다. 내가 토끼몰이를 할 테니 자네 그림자로 꼬챙이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순순히 꼬치가 돼주진 않을걸. 잘못하면 네가 꼬챙이가 될 수도 있다?"
"살벌해!"
울상을 지었지만 유환은 되려 어쩌라고, 라는 반응으로 키득였다. 말을 말아야지. 그럴 바에야 이게 낫겠다, 라며 청연은 마물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곧 바람 한 점 없던 장소에 서서히 이질적인 공기의 흐름과 붉은 꽃잎이 생겨났다.
그 때 였다. 주변의 이변을 감지한 것일까. 아주 찰나의 순간 청연도 유환도 마물이 눈을 빛냈 걸 보았다. 직후 마물이 입으로 토해낸 보이지 않는 파공탄을 피하기 위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두 사람 다 양 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파공탄이 터지기가 무섭게 마물이 재빠르게 그들 쪽으로 달려들자, 청연은 폭풍을 움직였고 유환은 얇고 날카롭게 벼른 그림자를 구현해서 휘둘렀다. 마물은 다시 한 번 입을 벌려 공격을 토해냈다. 근거리에서 터진 파공탄은 바닥에 부딪치며, 야구배팅장의 배팅머신이 내뱉을 법한 둔탁한 소리를 수차례 냈다. 이어 흙먼지가 가라앉기가 무섭게 청연과 유환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잡았어?!"
"피했어!"
꽃폭풍에 의해 시야가 흐려진 탓이었을까. 완벽히 마물을 시야에서 잃었다. 마물의 움직임이 너무 변칙적이기도 했다. 유환은 그림자를 휘두른 시점에서 이미 마물이 자신의 팔을 디딤돌 삼아 딛고 튀어 나갔다는 걸 알았다. 몸놀림이 엄청나게 빠른데다 귀가 네 개나 되는 만큼, 소리나 기척을 탐지하는 능력이 다른 마물보다 훨신 뛰어나다는 걸 그제야 파악했다.
두사람 다 빠르게 시야를 되찾았지만 마물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인이어로 들려오는 공간 결계사의 말이 유일한 위안이다. 폭풍우 속에서 몸을 재빠르게 안개화 시켰던 청연이 원래 몸으로 돌아오자마자 인이어를 고쳐 끼우며 말했다.
"결계 밖으로 나간 것 같진 않다는데."
"그런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낼 자신 있어?"
"어렵네."
"...감마팀이 쫒고 있다니까 잠깐 기다려보자."
유환의 차분한 말에 청연은 두루마기를 툭툭 털며 찧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공사 현장 안으로 날쌔게 튄 마물을 쫓아 들어가기엔, 척 봐도 내부가 너무 복잡했다. 발현자라고 해도 근본은 평범한 인간이다. 내부 구조도 모르는 판국에, 발자국 소리를 숨기지도 못하니 다가간다 한들 또 도망쳐버리면 모두 허사다. 이럴 땐 인간보다 훨씬 정확한 본능과 직감을 지닌 감마팀을 믿고 기다리는 게 최선임을 알지만 답답함을 마음은 숨기긴 어려웠다. 어쩐지 오늘은 잘 풀릴 듯 안 풀리는 날이라며 투덜거리는 투정을 유환은 무시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체감 상으론 이십분이었지만, 실제론 십 분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을 테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해서도 아닌, 어이없는 이유로 청연은 버럭 화를 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이 엄동설한에 츄리닝 차림으로 튀어나온 사람을 세워둬?!"
참 뜬금없는 인간이다, 라고 생각했을까. 공사 부지 쪽을 바라보던 유환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관절 누구에게 터트리는 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추위에 떠는 모습이 청연의 모습은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환은 장난스러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넌지시 말했다.
"천막을 세울 순 없잖아. 좀 참아봐. 아까 전의 불붙은 기센 어디 갔어?"
"어딜 갔을까. 꽃잎과 함께 사라져버렸나..."
"그냥 춥다고 생색이 내고 싶은 거 같은데."
"맞네."
"인정 하기냐고."
어이가 없어도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며 청연이 투덜댔다. 하여간 옆에서 춥다, 춥워 라는 말을 연발하는 사람이 있어서인가. 어느새 듣고만 있던 유환도 춥기는 하다며 중얼거리고 말았다. 타박을 주긴 했지만 분명 두루마기 하나만 걸친 채 무작정 기다리기엔 좀 가혹한 날씨긴 했다.
청연은 천막을 덮어 둔 공사장 자재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이제야 좀 춥다는 말을 꺼내며 팔짱을 낀 유환을 훑어본 다음 건설 현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쪽에는 감마팀 요원이 움직이고 있다는데, 멀리에서 보면 그저 아무 일도 없어 보인다.
"ㅡ우리의 능력은 참 쓸모가 없어."
"왜?"
청연의 말은 참 태연했다. 문득 어제 저녁 널어놓은 빨래의 존재를 기억 해 냈다는 어조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뜬금없는 말이라 유환의 의문은 이상한 대답이 아니었다.
청연은 답답하게 가린 앞머리를 알면서도 습관처럼 눈빛을 마주치려고 유환의 얼굴을 보았다. 곧 웃음을 흘리곤, 우리라고 말하면 실례겠지ㅡ 라는 말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렇잖나.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람을 살리고 있을 뿐, 개인의 능력은 사람에게 도움 되는 게 아니란 생각을 해.”
오히려 반대가 아니겠나, 라며 묘한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청연의 표정을 유환은 어떻게 느꼈을까. 청연은 일말의 궁금함을 감추고 계속 말했다.
“약육강식의 생태계도 아니고 파괴하고 마물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능력이라니. 비단 알파팀이 아니더라도 그래. 발현 능력은 사회를 형성해야 하는 인간에겐 마냥 축복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
청연은 한 때나마, 발현자란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못하는 날카로운 도끼를 들고 걸어다니는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태어난 성정도 존재의 시작도 다른 감마팀과는 다르다. 베타팀의 발현자들은 실로 다양한 능력을 가졌으니 전부 해당 된 다곤 말 못하겠지. 그러니 어쩌면, 자신이 알파팀에 들어 왔다보니 생긴 감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 얘기가 퇴마부 한정이라면 부정은 못하겠네. 마물이 없었다면 의미 없었을 능력들 꽤 될테니까.”
유환의 대답은 청연에게 있어서 뜻밖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가만 내려다보다며 절반정도는 동의한다는 말을 넌지시 던졌다. 왜 절반만의 긍정인걸까. 궁금했지만, 청연은 일부러 다른 말을 했다.
“난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못하는 도끼를 멋대로 들려주더니 평생 감시 받아야 하는 기분이라고 생각 한 적도 있었어. 그럴 바에야 차라리 맘껏 휘둘러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우왓, 무서워."
“어릴 적 생각이야.”
“싹수가 노랬구나 자청연...”
변명을 해보자면. 턱없이 어릴 적의 생각이다. 스무 살은커녕 열 살을 조금 넘겼을 적 무렵의 생각.
"그럼 왜 휘두르지 않았는데?"
“그걸 묻기야? ...그래도 결국 사회를 살아야 하는 인간이니까.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프라이드지.”
배제하기 위하여 무작정 발톱을 휘두르는 건 짐승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금 느낀다. 절제는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프라이드 중 한가지다. 사람이길 포기하지 않는 한 끝까지 끌어안고 가야지. 어차피 아직까진 사람에게 휘두를 이유가 없기도 하고.
청연과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발현 능력을 지녔다는 것 말곤 대단한 공통점이 아닌데, 어쩐지 술술 입이 움직였다는 걸 가볍게 시인한다. 자면서도 수식을 계산 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인간이라면 어쩌면 저보다 더 좋은 대답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유환은 곧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말야ㅡ 근데 우린 지금 실제로 마물을 퇴치하면서 인명을 구하고 있는 중 이잖아.”
“난 발현능력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한 거야.”
“알아. 내 말은, 그 본질이 어떻든 간에 드러내지 못할 능력이라고 해서 가치가 퇴색하는 거랑은 다르다는 말이야.”
“뭐가 다른데?”
“네 발현 능력이 순간이동이었다고 쳐. 그럼 지금이랑 같은 생각을 했겠어?”
“음...”
청연은 대답 대신 침음에 담긴 소리를 흘렸다. 유환은 거봐, 하는 목소리와 함께 작게 미소했다. 소리도 없이 가만 웃는 게, 한 낮의 오후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긋함이 있었다. 가만 등 뒤를 따라붙는 그림자처럼, 목표를 조용히 쫒는 사냥꾼이 가진 여유로움.
“깨진 유리창의 법칙 같은 거야. 부정적인 부분이 한번 부각되면 유독 크게 인지되지. 잘 생각 해 봐. 사람들이 도끼를 들었다는 요소만으로 널 평가 할지. 내가 생각하기엔, 그건 아닐 걸?”
“물론 아니지. 손에 뭘 들었든 미모부터 평가해야지.”
“아 예 그러세요. 퍽이나.”
진심으로 대답했는데 이 싸늘한 반응은 뭐냐며 청연이 물어보았으나, 유환은 뭐겠냐는 말을 할 뿐이었다. 스칼라니 벡터니 뭐니 구현 수식이 어쩌구 하던 인간답게 법칙을 들고 오네 그래. 청연이 핫핫거리며 웃자, 유환은 다만 스스럼없이 마주 웃어버리곤 더는 말 하지 않았다.
마물을 퇴치하러 대기 중인 와중에 나누는 대화라니. 그냥 이 상황이 웃겨서, 청연은 낄낄거렸다.
“가끔씩 내일 당장 마물과 능력이 사라지면 번 돈을 자영업 치킨집에 들이붓고 쫄딱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느끼는 게지. 자네가 오면 닭다리는 많이 넣어주겠네.”
“그런 생각을 왜 지금 하는 거야? 고려 해 볼게. 근데 난 다리보단 다른 부위가 좋더라.”
까다로운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확 목뼈나 다섯 개 넣어 버릴까보다, 하는 괘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채점을 미뤄둔 시험지를 보고 자연스레 정답을 알아낸 사람처럼 유환이 말했다.
“그치만 이제 좀 알겠어. 하하.”
“뭐가?”
“너, 능력을 쓸 때 보다 나랑 주먹을 휘두를 때 더 즐거워 보여. 성미에 맞아 보인다고 해야 되나.”
“...”
청연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할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유환의 입에는 삐뚜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쪽이 알기 쉽긴 하지? 한 번 뭉개놓으면 철저하게 짓밟혀서, 실력으로도 두 말이 나올 필요가 없으니까. 납득도 되고.”
“...맞아.”
참 묘한데서, 정말 이상한 곳에서. 종종 통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쩌다가 대련을 하며 한 번 흘린 말인데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청연은 지금 그의 앞머리 안쪽의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것 봐. 달의 뒷면에는 눈이 달렸다니까. 그렇지 않고선 이럴 순 없지. 이것 봐.
“유환 자네도, 알고 있잖아?”
그 잠시 동안의 시선이 얽힌 채, 인이어를 통해 마물을 캐치했다는 감마팀의 소식이 들릴 때까지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청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동안 유환은 구현화 시킨 그림자를 가볍게 한 번 휘둘렀다.
무얼 하는 건지 의아했던 것도 잠시였다. 청연은 유환이 가만 땅을 보며 그림자의 크기를 가늠하고 있는 걸 금방 알았다. 아직 오후 두시가 채 되지 않았다. 아까 전 유환의 사정없이 잡아 당겼던 목을 풀며, 청연은 본부로 돌아가서 그림자가 가장 길어지는 시간을 알아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연. 귀 좀 빌려줘. 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안 되니까.”
재밌겠다니까 정말.
청연은 뒤를 돌았다.
-
-
- 다 왔어?
“거의 다. 정수리가 보여.”
- 좋아. 셋 세고 나면 뛰어 내려.
“놓치면 정말 고소 할 거야.”
- 너 법원이랑 친해? 한 번 믿어 보라니까. 뛰기나 하셔.
가만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는 사람이 더 떨릴만한 높이었다. 아파트 건물 오 층 높이에서 청연은 아래에 있는 마물을 내려다보았다. 거리가 있는 만큼 작긴 했지만 방금 전 놓쳤던 마물이 분명하게 보였다. 인이어를 통해 차분히 숫자를 세는 유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셋, 둘, 하나.
- 지금.
신호를 끝으로 청연은 망설임 없이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강화된 신체는 가속도가 붙은 팽이처럼 몇 차례 회전했지만 청연의 눈은 목표를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포착했다. 마물을 속박한 둥근 그림자가 보인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떨어져 내린 청연이 추락을 멈춘 건,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 덕분이었다.
ㅡ호언장담 한 만큼의 실력은 분명했다. 떨어져 내리는 인간의 몸을 받아내는 연산 속도. 무시무시한 지능이잖아. 크, 하고 웃음이 넘치듯 흘렀다. 마물의 몸통에 나이프를 쑤셔 박기가 무섭게 발현 된 청연의 꽃폭풍은 마물을 찢어 발겼다.
지면에서 튕겨나간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누운 채 로 몇 초가 지났을까. 돌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일격필살의 기세로 눈치 채지 못 했을 때 공격하자고 계획은 짰지만ㅡ 소멸의 문턱에 몰린 마물은 마지막 발악처럼 고막을 찢는 비명을 지른 채 청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섯 개의 눈을 일제히 제 쪽을 향해 치켜뜨더니 직선으로 달려드는 마물을 보며 청연은 핫, 하고 마른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곧 마물이 그림자에 꿰뚫리는 데는 채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끼르륵 거리던 마물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끝내 네 귀를 모두 늘어뜨리더니 소멸했다.
“안 다쳤지ㅡ?”
추락하는 인간을 받아내는 연산 속도다.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소형 마물을 꿰뚫는 데는 십 초도 걸리지 않을 건, 능히 가능 하리라 짐작했다. 청연은 마저 누워버린 채로 팔을 들더니 흔들흔들 흔들었다.
“반고리관이 손상 됐을 거야. 예쁜 간호사를 불러줘.”
“예쁜 민 우는 왔는데.”
“뭐?!”
상체를 벌떡 들고 일어나봤지만 아무것도 없다. 뒤늦게 속았구나, 하는 걸 깨닫고 유환을 노려보았으나 움츠러들긴 커녕 푸슬거리는 웃음이나 짓고 있었다. 화를 낼수록 손해로군. 청연은 금세 계산을 하고 도로 누워 툴툴댔다. 움직이기 귀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애먼 간호사를 부르짖는 인간에게는 얽히기 싫다는 것 마냥 멀찍이 떨어진 유환은 두어번 일어나라는 재촉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순간이동 능력자라도 불러 줘?”
청연은 마침내 고개를 들곤 씩 웃는 유환을 보다가 홍소를 터트렸다. 그래 맞아. 순간 이동 같은 것 말이야. 암호 같은 말을 킥킥 주고받으며 일어나 흙먼지를 털자 머지않아 주변을 확인하는 델타팀과 인이어의 복잡한 통제가 이어졌다. 이럴 때 농담이나 주고받고 앉아있다니. 참. 알았다고. 순간이동 능력자라도 되지 않는 한 시간은 살뜰하게 써야 하는 법이다.
유환과의 대화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묻어버린 기억이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념을 일깨우곤 했다. 실없는 소리를 한두마디 섞어 기억을 꺼내보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는 건, 청연에겐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림자처럼 조용히 파고든 상대 앞에선 어찌보면 당연할까.
원한다고 해서 그림자를 떨어트리거나 붙여둘 수는 없듯 자신도 이남자도 참 어쩔 수 없는 사람들 일수도 있겠다.
아마도, 유환의 보호색은 여유로운 그림자 색일 것이다. 제 모습을 감추는 듯하면서도, 마주하게 될 때면 언제 그랬었냐는 듯 형태를 갖추고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비치고 웃는다.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실수하듯 이쪽의 속내도 조금은 까버릇 하게 되는데 어찌 할 텐가.
청연은 그런 상대가 한 명 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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