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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세레

[AU] 나께서는 기억 하시는가


창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어스름했다. 술잔에 꽃잎을 띄워 신선 놀음을 했던 날에 보았던 달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술잔조차 쥐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 화상이었구나. 그걸 몰랐다. 참으로, 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치였고 아둔했던 자였다. 쥐고나며 자란 것에 아무런 의무도 모르고 의심 없이, 그저 살아 있는 것에 감사 할 줄 모르던 치기만이 가득한 사내아이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가혹 해 질 것은 없었다. 병가상사와 새옹지마라 하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잃기 까지 걸린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혼자서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제 오물조차 스스로 치우지 못하는 반병신이 되어 알게 된 수치는 도무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어찌 하면 좋은가. 이 원통함을. 수치와, 치욕을. 분노를.


“분한가.”

“...분하고, 원통합니다.”

“그 마음을 안다.”

“고명하신 분께서 어찌 아십니까.”

“고명하지 않기에 안다. 사람으로, 왕으로, 백정으로, 짐승으로, 볼모로 살았기에 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을 걸어온 이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살면서 처음으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뚱이를 얻었다. 화상자국은 돌이 킬 수 없이 깊어져, 백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자랑하던 피부는 이제 온데간데없다. 


“다시 검을 쥐길 바라는가.”

“어떤 이유로도 쥘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쥘 수 있었다. 아니, 쥐어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아흐레의 밤이 지나고 그를 구명한 은인이 데려온 곳에서도 불안은 언제나 뒤꿈치를 물었다. 약으로 재워두던 정신이 들 때마다 머리맡에 둔 애검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생을 향한 끈질긴 집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나를 따르겠다. 하였지.”

“...예.”

“살아있는 동안 왕으로, 낭인과, 검객과 지옥귀라 불렸지. 종국에는 나는 폭군이 될 거다. 역사상의 폭군 중의 폭군으로 불릴 테다.”


무정한 목소리였다. 백성을 잃은 왕처럼, 목표를 잃은 낭인처럼, 모두 베어죽여야 하는 검객처럼, 죽은 자를 짓밟는 지옥귀처럼 무심한 사람의 목소리.


“그럼에도 섬기겠는가.”

“어떻게 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무정함이 터무니없이 다정하게 다가왔다. 이곳이 지옥이기에. 지옥의 밑바닥에서 안주하게 된 작은 사상누각이기에 다정하게 들렸다. 지옥귀였으며 폭군이 되리라 말하는 검은 남자는, 청연이 거닐게 된 지옥의 문지기이자 인도자였다.


“당신께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수치를 갚을 유일한 길을 터주셨습니다. 어찌 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후회 할 텐데.”

“시험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연민이고 동정이셨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증오가 거짓이 아닌 것처럼, 당신의 흥미 또한... 실망 시키지 않겠습니다.”


순간 초가 타는 공기 속에 남자의 웃음이 실린 것 같았다. 잃어버린 오른 눈까지 모두 가릴 만큼 남자의 커다란 손이 청연의 눈을 가렸다. 모든 관문을 헤치고 출구를 찾아낸 아이를 상냥하게 어르는 손길. 청연은 차오르는 눈물을 느꼈다. 그것이 고이고, 흐르는 동안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밝힌 남자의 이름 한 자를 청연이 쉴 새 없이 불렀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도록 해준 단순히 은공이라고 표현 할 수 없다. 아흐레간 청연을 쫓아왔던 흉수를 갈갈이 찢으며 웃음을 터트렸던 모습은 진정 악귀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런 악귀라면 어떻단 말인가. 청연은 목숨을 부지했고 남자는 이제 곧 썩어 문드러질 몸을 한 반병신을 거두었다. 그런 악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모두 잿더미가 된 악몽의 끝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된 청연이 만난 것은 악귀도 짐승도 아니었다. 생면부지의 인간이 그를 구명했다. 살인이란 참혹하고 한심한 일이라 믿었던 세계가 함께 바수어졌다. 옳고 그름이 사라진 세계에서 이제 눈앞의 인물만이 정의가 되었고 세계가 되었다.


“한 맺힌 시를 어찌 다 읊겠습니까. 어찌 읊어야 하겠습니까.”

“칼로서 읊어야겠지. 자, 울지 말라.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마.”


반병신이 된 몸을 상냥하게 어르던 짐승 같은 주군을 만난 밤에, 청연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남은 것이 이름뿐이라 그것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고, 다만 자신과 주군 안에서 남겨두고 잊혀 질 이름으로 믿었다. 자청연은 죽었고 암주는 태어났다. 암주로서 태어나 처음 본 존재를 맹신하고 따르는 동안, 버리지 못한 이름이 품은 한을 풀기 위해 누군가를 숙청하는 삶 또한 시작됐다. 그 것이 당연해 질 때 즈음에는 평생토록 그럴 줄로만 알았다. 어리석게도 그리 믿었다.






마교의 본질은 참으로 간단했다. 약한 자는 도태되어 잡아먹히고 강한 자는 처절하게 짓밟는 약육강식. 그러한 본질 덕에 정점에 오른 자를 모시는 이가 되자, 이제는 암주의 이름을 가진 청연 또한 검 휘두르는 자가 되었다. 사람 가죽을 하고 짐승이 되고 악귀가 된 그의 주군만큼이나 암주는 처형하고 숙청했으며 도살하고 암해했다. 


시간이 지나자 거의 모든 자들이 청연을 모르게 되었다. 반병신이었던 사내가 이 년 만에 몸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을까. 본 적 없는 사내가 마공을 익혀 붉은 눈동자는 암적색에 물들여졌고 선인처럼 아름다운 머리칼은 이름만큼이나 검게 물들었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수밖에. 이름도 버리고 모습도 버리고 가문을 버린 남자가 하루건너 지끈거리는 화상과 뇌 안쪽을 들쑤시는 외눈의 고통을 이 악물고 참아내던 것을 모를 수밖에. 알지 못하도록 숨겼으니 누가 알았겠는가. 주군을 따르는 주제에 나약한 자라 욕보이기 싫어 종래에는 약을 빌리기 위해 발걸음을 죽이고 기루를 찾았다. 암주는 기루를 찾았을 뿐이었는데, 암주는 처박히더니 청연이 튀어나와 과거의 그림자를 만나버렸다.


“손님이 오셨었네.”


면사를 쓴 사내의 얼굴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긴 머리는 소매를 스친다. 발걸음은 춤을 추듯 가벼운 상대. 어느 하나 제가 알던 사람과 닮은 게 없었다. 

그러나 사내의 면사 너머 입이 움직이자 알아버린다. 네가 누구인지. 


“이상하게... 그리운 얼굴이야.”


어둑한 달밤에 퍼진 종소리처럼, 고요하게 울린 목소리만은 변하지가 않았구나. 집안의 괴이한 변을 듣자마자 단숨에 달려갔지만 문이 그토록 굳게 닫힌 적은 처음이었다. 하루에 몇 번을 날려 보낸 매도, 서신 받을 이를 찾지 못해 조용히 돌아왔다. 걱정이 걱정을 물어와 소식조차 끊긴 친우를 잃은 채 나락에 처박히자 너를 잊고 살았다. 


이제와 찾아간들 어쩔 수도 없으나, 친구의 생각이 날 때면 죽였던 마음이 슬그머니 되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고개를 들려 했던 청연의 목을 암주가 내리치던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 그리 내리치지 말 것을. 이곳에서 만날 줄 알았더라면 찾아 나설걸 그랬어.


“우리는 어디서 마주쳤을까?”


ㅡ유환. 우리는 나이가 먹으면 형산에 가세. 지천에 널린 돌산을 보면 서유기가 생각 날 테고, 혹시라도 미녀를 만난다면 자네가 의심하기야. 백면금모의 구미호가 꼬리를 숨기고 절세미녀로 나타나면 어쩔 텐가. 나는 사내 중의 사내라 절대 넘어갈 수밖에 없네. 그러니 대신 자네가 의심 해 줘야지. 술을 마시고 구운 은행을 씹으며 연주를 하면서 요물을 쫓으세. 나는 비파를 타겠다. 자네는 무엇을 연주 할 텐가. 이호를 켜겠나? 횡적을 불겠나? 금을 뜯겠나?


황금의 시간은 홍안과 함께 떠났다. 

너는 죽은 시간이 흐르는 깨어나지 못할 꿈에 갇혔고, 나는 아직 미처 죽지 못한 목숨으로 거처를 모르는 복수에 갇혔다. 돌아가지 못하는 시절의 기억만이 돌고 돈다. 그 곳에서 벗어난 운명이 어지럽구나. 

한 많은 인생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한이 서린 검은 누굴 향해 뻗어야 하는가. 시간이 무섭도록 흐르는 와중에 코를 찌르는 꽃냄새가 아릿하게 퍼졌다. 수 년 만의 재회였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꼭 오늘처럼 어둡던 밤이었다. 

저를 짐승이라 칭하던 주군이 눈을 가려주었던 그 날, 신세를 한탄하며 죽은 자와 같은 눈을 했다. 결심을 했고 선택을 했다. 염라대왕 앞에서 축생도와 아귀도를 향해 똑바로 걷더라도 모두 죽일 테다. 이 길을 선택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자를 모조리 죽이고 이승에서 치우겠노라. 


세상에 군림하겠다고 말하시는 주군을 목숨 바쳐 모시기로 한 다짐도, 간신히 온존한 목숨으로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도 전부 진심이다. 무를 수 없는 선택이다.


이미 오래 전 마교를 나왔다던 남자를 비망각까지 써가며 절실하게 찾았던 이유는, 오로지 이 날 이때를 위해서였다. 사람이 숨어있는 객잔에서 그가 가져다 준 서책에는, 청연이 듣고 싶어 하던 천 마디의 말보다 간결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간결함이 묵직함을 덜어 내는 건 아니었다. 책장이 넘어 갈수록 청연의 손톱은 바닥을 강하게 긁었다. 


꼭 오년 전의 날. 집안이 불에 타던 때,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마교에서는 각자가 세력을 불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알력다툼은 교주가 눈을 두지 않는 곳에서 점점 치열해졌다. 자신의 권세를 높이기 위해, 교주의 눈에 들기 위해, 더 큰 조력자를 찾았고 협력자를 쉴 새 없이 압박했다. 


그 와중에 자가는, 청연은 믿은 것이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면 그 낮은 담장을 아무도 넘어 오지 않으리라고. 흉수는 찾아오지 않으리라고. 멸문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어리석은 믿음의 대가로 너무나도 큰 것을 치렀다. 상대는 마교였기에. 


어찌 이리 허망 할 수 있단 말인가. 대를 끊을 만큼 철천지원수도, 요물이 부린 주술도 아닌데.

다만 편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교에 척을 둔 가문을 대하듯 모두를 죽이기로 간단히 결정했다.ㅡ간결하게 적힌 그 구절을 청연은 한없이 훑고 또 훑었다. 간단하고 처참한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새벽의 이슬처럼 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목숨을 사라지게 할 수 있었을까. 왜 그리 악착같이 죽음이 무서워 아흐레간 도망친 남자의 목숨을 끊으려 들었을까. 그렇게 끝까지 쫓아와 나의 세계를 무너트릴 수가 있단 말인가. 분노는 갈 곳을 잃었고, 겨우 구명해낸 목숨을 이어 받은 암주도, 청연도 서책을 마음을 태우던 증오의 불길에 좀먹혔다.





나께서는 기억 하시는가. 죽을 수는 없다며 살았던 아흐레의 기억. 비천하게 잘릴 목이 치욕스러워 구정물을 마시고, 추격자가 무서워 생면부지의 눈을 피해 밤에는 장독 안에 숨어 뜬 눈으로 지새던 밤. 거리 한복판에서는 배를 곪으며 토악질을 했다. 타 죽어가며 지르던 누이의 비명이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이명처럼 쫓아왔다. 애검을 쥐었으나 검사가 아니었다. 사냥감이 된 두려움에, 복수도 설움도 잊고 구명만을 원했던 짐승의 아흐레. 삶이라 부를 수 없던 비참함이 참람하던 날. 

나께서는 그 아흐레를 기억 하시는가. 기억한다면 대체 왜 기억 하시는가. 차라리 목숨을 구한 순간부터 잊어버리셔야 했거늘. 이토록 가슴에 남아 결코 잊지 못하다니.


기어코 그때 늘어트리지 못한 목을 왜 이제야 늘어트리는가. 이제는 조심스레 잘라줄 이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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