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야.
흠. 잠시만.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건 좀 용기가 필요 한 듯 하니까. 자. 손톱 한 번 봐주고, 괜히 목도 한 번 풀어주고. 머리 끝도 매만졌으니… 이제 괜찮아. 오늘도 나는 멋있고 평소와 별로 다를 건 없어.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은 하면서 사는 자청연이지.
아차. 그런데 자네 쪽이 들어 줄 준비가 되었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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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의 전투로 중앙청의 폐쇄가 결정 된 게 며칠 전이다. 순직한 두 명의 요원의 흔적은 청주 지청의 근조 화관으로 남아있었다. 다만 대영청은 언제나 조의와 등을 맞대는 곳이었기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해도 그리 오래 가질 못했다. 실제로 청연 또한 당장 순직한 요원들을 위해 묵념을 가진 게 전부였다. 오히려 두 명이라니 싸게 먹힌 게 아닐까 싶다ㅡ는 말은 함부로 입밖으로 내선 안되니 구별했지만. 본청이 날아가버릴 정도로 유래가 없는 전투였으니 더 말해 뭐하랴.
끔찍하게 쏟아진 마물의 숫자는 앞뒤를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덕분에 난생 처음 능력이 체력을 좀 먹을 때 까지 썼고, 후유증은 심각했다. 급박하게 청주 지청으로 연결된 게이트를 통과하고 쓰러진 후, 간헐적으로 관자놀이를 드릴로 쪼개는 고통이 뒤따랐다. 평소에 제아무리 단련해왔다 한들 소용 없었다. 기합이나 체력으로 전부 커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청연으로서도 후유증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직접 걸을 기력을 되찾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동안 병원과 청주 지청에서는 꽤 낯익은 얼굴들과 마주쳤다. 평소 일상에서 마주하던 이들은 저와 마찬가지로 각자 크고 작은 부상으로 쉬고 있었다. 다만 그 속에 너는 없었다.
끝내 멀쩡하게 병원을 걸어 나올 때 까지도 너와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최전방에 서는 사내이니 성할 리가 없다는 건 자명한데. 어쩌다보니 본 적이 없었다. 전혀 마주치질 못했군.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자 묘한 기분이 든 것이다.
그건 너를 향한 묘한 기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깨달음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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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마주치는 방법이야 간단하지. 너를 부르면 된다. 언제나 그렇듯 짧은 메세지 하나면 충분했다. 매끄러운 액정 위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뭐 하고 있냐는 말과 함께, 잠깐 얼굴 좀 보자는 메시지를 거의 동시에 보냈다. 보내고 나서야 네가 투덜거렸던 게 기억난다. 대답을 안 들을거면 왜 묻는 거야? 제법 타당한 질문이다. 그러게 말이지, 왜 일까. 대답을 알고 있어서? 아니다. 독심술사도 아닌데 알 리가 있나. 그냥 메세지를 보내는 남자가 항상 제멋대로이기 때문일지도. 게다가 받아주는 상대가 꾸준히 친절하고 사려 깊으니까.
"청연ㅡ"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걸어오는 상대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벤치 놔두고 왜 화단에 걸터 앉아있어? 그 스치는 질문에 픽 웃었다. 그러게. 어쩐지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은 기분이었거든. 맥 빠지는 대답이 이상하게 들렸을까. 아니면 언제나처럼 실없는 소리라고 생각 한 건지 너는 흐응, 하고 목소리를 흘리곤 가만 끄덕였다.
"유환. 나 커피 좀 사줘."
"...지금 커피 하나 사 달라고 나 불러낸 거야?"
"아니 원랜 내가 사려고 했는데... 동전이 하나도 없어. 저 자판기 지폐는 안 받더라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나보다. 네 입가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어이가 없겠지. 그런데 사실이거든. 자네 오면 코코아 하나 뽑아주려 했다니까. 보란 듯이 네게 천 원 짜리 지폐를 꺼내 흔들자 곧 푸슬거리는 웃음이 뒤따랐다. 동전이 있으면 지폐랑 좀 바꿔달라 말하자 너는 오히려 됐으니까 기다리란 말과 함께 맞은편 자판기를 향해 등을 돌렸다. 시선은 네 걸음을 쫓았고 자판기 버튼을 누르는 뒷 모습에서 멈춘다. 깔끔하게 묶은 라일락과 수국색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 마다 흔들거렸다.
그 광경을 보자 확실하게 깨닫는다. 지금은 분명, 일주일 전의 일상이 생각 나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오후 네 시. 일몰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는 밤을 준비하는 시간. 봄 바람이 기분 좋아서 당장 어디로든 걸음을 옮기면 이 계절에만 피는 밤벚꽃을 보러 갈 수 있다. 하지만 가지 않는다.
갈 리가 없다. 밤벚꽃보다 보고 싶은 상대가 왔으니까.
곧 네가 다가왔다. 금방 뽑아 온 자판기 커피 하나로도 느긋해질 수 있는 순간은 참 사치스러웠다. 때로는 싸구려 사치를 즐길 줄도 알아야 풍류지. 그 말과 함께 나는 컵을 받아들였다. 곧 옆에 앉은 네게 종이컵을 받아들인 채 가만히 있는 내 모습이 조금 낯설었나보다. 코코아를 입으로 옮기길 반복하던 네가 묘한 침묵을 깨는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냔 말에 나는 대답 하기 애매해졌다. 왜 그러냐, 무슨 일 있냐. 그런 말에 뭐라고 대답 해야하지? 아니면 평소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나불대던 입을 닫아버린 상황이 수상해서였을까. 나는 대답 대신 너를 응시한다. 분명 나는 궁색할 땐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편이지만, 쓸모 없는 말로 이 순간을 망치긴 싫었다. 그리고 이 기분을 얼버무리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은 조용히 흘러 넘쳐서 네 발치를 적셨다.
"음... 지금 말이야. 자네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고 싶은 말이 작지만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네 발치를 밀물처럼 한 번 훑고 간 마음이다. 입밖으로 내자 더욱 확고해진다.
"좋아하네. 유환."
네 표정은ㅡ... 아니, 시시한 설명은 관두자.
제멋대로지만 지금은 네가 어떻다 말하기보단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순간이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친구고 각자의 인생을 알아서 살겠지. 여태까지 그랬듯이 말이야."
혼돈으로 들어찬 확연한 비일상과, 밤벚꽃이 아른거리는 오후 네 시의 일상. 우리는 그 두가지가 절묘하게 맞닿은 특이점 위에 서있다. 진즉 알고 있던 사실이고, 발현자라는 이유로 아슬아슬 할 때 까지 까치발을 들며 서서 버티기도 했다. 이번 전투처럼. 그게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확실하게 느낀 게 있다.
"ㅡ하지만 이번 일로 느꼈어. 앞으론 조금쯤은 겹쳤으면 해. 내가 그걸 바라고 있단 걸 알았네. 간섭하진 않더라도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남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했어 난."
멀쩡하게 걸어서 건물을 나오며 깨달은 건, 우리는 같은 특이점을 밟고 있을 뿐. 결코 서로의 손을 잡아주거나 어깨 받쳐주고 지탱해주는 관계가 아니란 거다. 당연하지. 우리는 친구니까. 등을 맞대고 신뢰를 공유하는 사이. 그리고 그것 뿐.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주거나 어떤 연인들 처럼 춤을 추듯 함께 하는 관계는 아니지.
돌이켜보면 나는 너와 좀 더 나누고 싶은게 많았다. 알아 줬으면 했던 순간이, 알았으면 우리가 조금 변했으려나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전한 적은 없었지. 하지만 분명 그런 순간들은 실재했다. 어쩌면 너로선 이해하지 못할 순간이고, 내 일방적인 마음 일 수도 있겠다. 나는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있잖나, 유환. 내가 아무리 뻔뻔해도 못한 말이란 건 엄연히 존재 하거든. 커피 한 잔 하는 동안 여지껏 말 못한 게 무엇이었더라 돌이켜보려 했는데... 안되겠어. 다 돌이켜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 같아. 흠. 어디서부터 였을까. 언제부터 였을까. 지금부터 기억 나는대로 하나 씩 꼽아 볼 테니까 잠깐 기다려 봐. 손톱 한 번 봐주고, 괜히 목도 한 번 풀어주고. 머리 끝도 매만졌으니 하는 말이지만.
유환. 그러니까 사실, 나는.
네가 좋은 가게를 소개시켜주겠다는 말에 기대했다고.
너와 춤을 추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고.
발렌타인의 답례로 사탕을 고르다 답지 않다며 포기해버린 적이 있었다고.
침대든 소파든 네가 차지하고 있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고.
네 잘잤냐는 아침인사를 들었던 게 못견디게 즐거웠다고.
한 우산을 썼을 때는 비오는 것도 좋단 생각을 했다고.
함께 본 영화는 네가 나를 더 알아줬으면 해서 골랐던 거라고.
잠든 네 숨소리를 듣자 영생을 쫓는 삶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졌다고.
이어폰을 나눠서 들려준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 수 있게 됐다고.
복도에 쪼그려 앉은 채 내 시시한 이야기를 들어준게 민망하지만 기뻤다고.
다친 네게 뻔한 오지랖 밖에 부릴 수 없는 게 한심하고 짜증났다고.
옛 일을 털어놓는 네 안타까운 말을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머리카락 너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네 표정을 읽고 싶은 적이 많았다고.
내가 상상한 미래엔 생각보다 네가 많이 함께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이렇게ㅡ 비일상과 일상의 특이점 위에서 네가 다치지 않았는지 자연스레 찾아보게 되었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 해 보니 하나 하나 꼽아서 들려주기엔, 커피 한 잔으론 턱없이 부족하네.
만약의 만약에 네가 이 말들을 전부 들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우습다고 할까? 아니지. 너는 사람을 함부로 비웃지 않는다. 쉽게 조소하지 않는다.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주었고, 솔직하지만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게 무겁지도 아프지 않는 말이 되도록 건넸지. 그에 비하면 나는, 자청연이라는 사내는 참 쉽게 타인을 판단하고 어쩔때는 잔인한 말을 연출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이해도 공감도 기대하지 못해 드러내지 않았던 그림자 뒷편에서 만난 사람들.
처음에는 너도 나와 비슷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매사를, 타인을 대하는 데는 언제나 가볍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깔끔하게 대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나와 닮아 있었으니까. 얼핏 마주치며 대화 할 때, 너도 나와 비슷하게 운명에게 삶을 떠넘기는 사람 일거라 생각했지.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가볍고 가볍게. 골치 아픈 문제 따윈 없는 것 처럼 걸음을 옮기는 사람.
하지만 착각이 깨지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너를 떠보고, 말을 걸수록 내가 얼마나 명백한 오해를 저질렀는지 금방 알았다. 때로는 내가 먼저 남에게 말 한 적 없는 진심을 털어놓고 너를 대할수록, 섣부른 오판은 깔끔하게 깨져나갔다. 그리고 빈 틈새 사이로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틈새 안 쪽. 달의 뒷면에는 들끓는 번민이 있었다. 드러내지 않았던 고뇌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네가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보지 못했을 모습.
틈새 뒤에서 발견한 너의 낯선 모습은 금세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함부로 들쑤실 수는 없었다. 나로서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가 맞는건지 도통 가늠 되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여태껏 가만 서 있었다. 달의 뒷면을 관찰했지. 커피 한 잔으로는 다 꼽아 볼 수 없는 순간들을 겪으며, 멍청하게 서있기만 했었다. 그동안 너는 마치 투명한 수면 너머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어느 때는 희뿌옇게 흐려지다가, 때론 맑고 선명하게 변하기도 했다. 환영 같은 착각이었을까 그건. 변화를 말없이 지켜보며 너를 되씹자, 나는 때때로 즐겁지만 안타깝고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비로소 깨달은 거다. 틈새 사이로 달의 뒷면을 보며, 어느새 드리운 그림자 속에 잠기게 됐다는 걸. 나는 너무 느릿하고, 여간 지지부진한 인간이 아닌 모양이다. 그걸 오늘이 되서야 자조를 터트리며 깨닫다니. 첫사랑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우습지 않나? 아둔하고 느려 빠졌지. 중요한 논점을 흐리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감상들에 젖다가 이제야 알다니. 역시 자네가 들으면 우습다고 하지 않을까. 아닐 걸 알면서도 괜히 되묻게 되네.
나는 습관이 된 미소와 함께 너를 보며 말했다.
"대답은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아. 마음이 서로 다르다ㅡ 충분히 그런 대답 일 수 있으니까."
너에게 선물 할 숫자를 하나 골라보라 한다면 나는 만萬을 선택 할 것 같다. 일 십 백 천 만 억, 수를 헤아리는 단위 중 두번째로 많은 획을 그어 써야 하는 숫자. 애정을 담아 열 세획을 정성스레 네 손바닥에 써준 다음 그 위에 살짝 입맞추고 싶단 생각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네가 허락한다면. 멋대로는 굴지 않아. 열 다섯획의 억億은 네가 간지럽다 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미안 습관적인 핑계였어 방금건. 사실 억이라는 숫자가 너무 커서 자네를 부담스럽게 만들까봐 고른 일만의 숫자. 그 숫자 만큼이나 네가 나를 생각 해주기를.
내가 너를 생각 하듯이. 쫓고 말았듯이.
첫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굴게 되듯이.
"그래도 가능하다면, 자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면 참 좋겠네."
함께 손을 잡고 무대 위를 지켜 줄 순 없을까. 약속 해 준다면 나머지는 내가 준비 할 테니까.
두 사람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도, 무대도, 앵콜 타임에 던질 장미까지도.
우리의 귀찮은 과거는 잠깐 던져놓고.
나는 일만 번의 첫사랑이 어지럽게 펼쳐질 무대 위에서 자네가 영원히 내려가지 않았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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