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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소원을

실수 #17 돌이킬 수 없는 것과 없을 것에 관하여





정면에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실수' 했다는 것을.




- "네가 미워."




나름대로 내비쳤던 호의가 흙바닥을 뒹굴 듯 무시당한 경험도,

그렇게 정면에서 직접 타인에게 미움을 산 것도 처음이었다. 




- "나는 정말… 네가 너무너무 미워. 이렇게 사람을 미워할 수 있구나, 하고 놀랄 정도로."




그렇다곤 해도 이건 심하잖아.

쭉빵한 미녀가 팔짱을 끼는 꿈을 꿔도 모자랄 판에, 심란한 사내놈의 얼굴이 나오는 꿈이라니.






*






"이제 일어났냐?"




형의 질문은 인사와도 같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게 내게는 일상이다. 흘끗 시계를 보자 시간은 아침 열 시. 질려버렸다는 형의 태도에는 돌려줄 말이 없다. 아마 오늘도 학교에 도착하면 열 두시가 다 되어있겠지.




"어디 가?"

"…이 새낀 어제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은거야."

"아. 그랬지."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기억이 나는 거냐며 형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도 졸음이 가시지 않는 머리로 하품을 하며 된장국 그릇을 들었는데.




"출장 다녀오면 너하고 할 이야기도 있고."

"? 뭔데?"

"너 진로 상담 빠졌다며."




순간 국그릇을 든 손과 함께 몸이 굳었다. 

진로 상담. 그러고보니 그런 게 있었지, 라는 감각으로 대했다 보니 당연히 상담을 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조금 쯤은 생각 해뒀어야 했나. 보호자인 형에게 연락이 가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는데. 아버지에게까지 연락 닿은 게 아니라 형의 선에서 멈춘 건 다행이다. 하지만 그걸로 안도 할 수는 없다. 




"성적도 들어보니 난리가 났고. 게다가 출석률도 그렇고. 학교가 헬스 클럽이냐? 니 좆대로 다니게?"

"…아침부터 왜 화내고 난리야."

"계속 말꼬리 잡으면 재미 못 볼 줄 알아."




순식간에 식욕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상을 뒤엎고 나가는 역반하장의 짓은, 그래 솔직히 형 한테는 못하겠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자 형은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형이 아저씨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젓가락을 들 의욕이 안 선다. 시계의 긴 바늘만이 속절없이 움직였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힘드니까. 니 진로에 대해서는 다녀와서 이야기 해."

"별로…. 다녀와서든 지금이든 대답은 똑같은데. 아무 생각 없고. 진로니 뭐니, 알게 뭐야."

"……."




형의 얼굴이 뚜렷하게 분노로 물들여진 걸 본 순간 깨달았다.

ㅡ실수했다.




"전부터 이야기 안 해도 되겠거니, 그렇게 생각 했는데. 이번 기회에 짚고 넘어가야겠다 너."

"…."

"너 왜 내가 학교를 졸업만이라도 하라고 했었는지 아냐?"




시비조로 걸어오는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뚜렷한 억양이 묻어나왔다. 

이런 형 앞에서 나는 작아지고, 무력해진다. 평소와는 달리 찌르고 넘어갈 틈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였지. 진로는 어찌 됐건 졸업장이나 받으라고 했던 말을 형에게 들었던 것도 같은데.

듣고도 개무시 했던 걸 들켰을까.




"난 네가 학교를 개판으로 말아먹든 자퇴를 하든, 길거리에 나앉아도 네가 아버지나 나를 등에 업고 야쿠자가 되는 꼴은 안 봐줘. ㅡ너 아버지나 내 일이 우습게 보여?"

"……나 딱히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말을 안하면 모를 것 같냐? 각오가 안 되어 있는데?"

"야쿠자 되는데 각오는 무슨…."

"입 닥쳐. 말꼬리 잡지 말라고 했어."




그러고보니 이럴 때의 형과는 대화가 안 된다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어쨌거나 형과 나는 형제이고, 화를 낼 때의 상황은 대개가 비슷하다. 그리고 한 번 화가 나면 남의 말을 들어 쳐먹지 않는다는 것을 요즈음 잊고 있었다. 이렇게 지뢰를 밟을 생각은 없었는데.




"너를 들일 바에야 치히로를 데려오고 말지. 너보다는 각오가 잘 되어 있으니까. 알아?"




그러니까 거기서 왜 그 이름이 나오냔 말이야.


형도 나도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선은 피하지 않았어도 끝까지 형 앞에서 떳떳 해 질 수는 없었다.


야쿠자의 세계라. 사람 하나 쯤은 아주 쉽게 끝장나는 곳인 만큼, 나의 돌이킬 수 없을 선택을 막기 위한 형의 다그침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언제나처럼, 나는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나서 조용히 당황할 뿐이다.








*








오래된 기억. 

아마도 그 녀석에게는 비참할 정도로 찬란한 햇살이 들던 오후. 그리고 내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던 날. 

가만히 나무로 된 복도에 앉아서 마지막 짐을 챙기며, 캔버스백을 매던 그 녀석과 눈이 마주쳤었다. 


일전의 '시라카와 타쿠미' 라는 왠 늙은이의 병문안에 따라 갔다가 했던 말 덕분에 형에게 얻어 맞았던 나는 콧잔등에 시큰한 파스 하나를 붙이고 있었다. 그 시큰거리는 감각은 꿈에서라도 생생 하게 재연 될 정도로 마치 어제 일 마냥 생생하게 기억이 한다.


남의 일이라고 해도, 단 한 명 뿐인 가족을 향해서 하는 말로는 적절하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엄한 으름장과 형의 추궁이 나름대로 나를 반성시켰다ㅡ 라는 기특한 이야기 일 리는 없지.



다만 약간의 동정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형의 집에 굴러 들어온 나야 그렇다고 쳐도, 생판 모르는 남과 같은 집안에서 살아야 하게 된다는 스트레스는 제법 있었겠지. 어차피 친해지지 못한다면 부딪치지 않는게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니 시비를 걸어도 넘어가줘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녀석과 살게 된지 한달이 조금 안 되었는데. 내가 아마노가와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녀석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라도 되어 주겠다는 것 마냥 깔끔하게 모든 짐을 빼고 집을 나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멍청하긴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장지문 너머에서 들렸던 형의 안타까운 어조의, 하지만 단호하기 짝이 없는 거래와 이 저택을 슬픈 듯이 바라보고 있었던 시라카와 치히로를 보며. 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멍청하지만 알 수는 있었다. 이 집을 나가고, 모르는 사람이 되라는 요건은 그리 어렵지 않고 그만큼 잔인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는 것 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 시절 동정이라는 감정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열 여섯의 하뉴 타카히사는 너무 많은 것이 부족한 인간이었기에, 그의 화를 돋우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ㅡ어렵지 않게 적선한 동정과 호의는 간단하게 타인의 화를 불렀다.





"형의 말은 무시하고 그냥 여기서 살지 그래?"

"……."

"그래도 될 거 아냐. 어차피 이 저택 명의는 아직 네 앞으로 되어있다며.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릴 주택침입죄로 통보하면 알아서 사라져줄거고. 너한테 그렇게 소중한 집이면 계속 살던가. 돈이라면 대출도…." 

"ㅡ그거 알아?"




그리고 정면에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실수' 했다는 것을.


분노와 울분, 서러움과 안타까움이 모두 뒤섞인 얼굴로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지듯 쫓겨나도 차라리 이보다는 슬프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얼굴로, 시라카와… 아니 시구레 치히로가 말했다.




"네가 미워."




알기 쉬운 동정.

어렵잖게 부른 분노. 




"나는 정말…네가 너무너무 미워. 이렇게 사람을 미워할 수 있구나, 하고 놀랄 정도로."




'실수'가 지나간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그 안으로 쏟아지는 비난과 원망은 검은 손이 되어 '나'와 '너'의 발치를 뒤덮고, 이내 뱀 처럼 소리없이, 하지만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게 우리를 쓰다듬고 집어 삼킨다. 


결코 수복 할 수 없을 마이너스의 감정들은 아마도 내가 감당 할 수 없을 만큼의 양이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내가 했던 말이 그에게는 상처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감정을 나는 무시 해 버리면 그만일테지만, 그는 무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렌지와 라이트그린. 석양과 초원이 담긴 눈동자가 분노로 새빨갛게 타올랐던 어떤 햇빛 좋은 오후.

나의 실수는 그의 증오로 구체화 되었다.




"차라리 원한다고 해. 이 저택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할아버지의 조직이 너무너무 소중하니까 앞으로 나보다 잘 해나가겠다고…나한테 무릎을 꿇고 맹세해. 그러면 차라리 깨끗하게 포기해줄테니까.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안 들 테니까…!!"

"……."

"절실하게라도 바란다면…. 그래. 차라리 절실하기라도 하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빼앗아 놓고…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동정하는 널 이렇게 힘들게 미워하며 지내지 않아도 될텐데. 네가 미워서 미칠 것 같아 난."




작게 떨린 주먹의 무게를 몰랐다. 실수가 지나간 자리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질투가 피어났다. 

실수와 악의로 피워낸 꽃이 시들기 까지는 과연 얼마나 걸릴까. 그 양분을 모두 빨아먹은 꽃은 이제 또 어떻게 될까. 어떤 향기를 남기고 져버릴까.




"만약 네가 정말로 날 위해주고 불쌍하게 여겨준다면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딱 한 가지 남아있어."

"…말 해봐."






그리고 시구레 치히로는 입을 열었다.









*









점심시간이 다 되어 교실에 들어 갈 때면 언제나 딜레마에 휩쌓인다. 예를 들면 아침도 점심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먹은 식사는 더 배고프게 할 뿐이라서, 매점에서 빵을 사서 교실로 들어가야 하는건가ㅡ 하는 시덥잖은 고민들. 

바리에이션이 달라봤자 학교 식당에서 먹을지, 아니면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먹고 갈지에 대한 고민이 된다. 


한마디로 꽤나 많은 학생수를 자랑하는 아마고지만, 그래봤자 학생들이 가는 곳은 거기서 거기인 이상 아는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발견 할 수 있다는 거야. 


지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미움을 산 상대와 매점 한 가운데에서 딱 마주쳐도 이상 할 게 없거든.





"…밀크티 하나 부탁드립니다."

"120엔이에요."

"수고하세요."




시선이 마주쳤지만 서로를 응시하지는 않았다.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모든 것은 돌이 킬 수 없어졌기에. 그리고 앞으로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기에.






- "ㅡ더 이상 네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내게 해줘. 앞으로도 이렇게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힘들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







그 날 이후 2년이 지났다.

'시구레 치히로'는 그렇게 나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