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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소원을

유예 #18 일단락一段落





"내가 네 사정도, 아무것도 모르고결국 너를 아무것도 몰랐고, 이해하지 못했다고…담담하게 받아들일거라 생각하냐?"

"……."

"─상처받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온다는게 의외라는 것 이상으로 깨닫고 말았다. 내가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그래. 상처 받았었던 건가 난. 

이제서야 깨닫다니 지독하게 느려 빠진 놈이었구나.










*









새벽 바다는 무서울 정도로 추웠다. 긴팔 와이셔츠가 아니라면 십중팔구 감기에 걸릴 날씨였다.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는게 그리워질만큼의 날씨인데도, 차가운 모래사장에 주저 앉은 다음 무작정 바다를 바라보았다. 


기온은 피부에게 꽤 가혹한 날씨였지만, 쏴아 하는 파도소리가 몇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조용히 생각에 몰입 할 수 있다는 건 역시 좋아. 간밤에 있었던 조디아츠와의 싸움이 끝난 후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건, 영웅 행세는 관두라는 성질을 긁어대는 소리를 듣고서 얌전히 이불 덮고 잘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지는 와중에,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무작정 바이크를 끌고 도로를 질주했다. 장갑 없는 손이 새벽 공기에 얼어붙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한참동안 엔진 소리를 울린 다음 바닷가에서 멈춰섰다.



텅 비어있는 머리로 생각 할 거리가 뭐가 있냐는 질문을 누군가 던질 수도 있겠다. 

그러게. 별로 똑똑한 머리도 아닌데 이상하지. 자꾸만 잊을 수 없는 것 마냥 어떤 말들이 떠오르고 또 떠오른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란, 기계 팔의 절그럭 거리는 소리와 초침 소리가 기분 나쁠정도로 또렷했던 조디아츠의 말이다.




너야말로 학교가 그렇게 나오기 싫으면 관둬.




정곡을 찔렸다, 라고 표현 해도 좋을 것이다. 


애초에 그다지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학교는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중학교 시절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돌려줄 말이 없을 정도니까. 전혀 기억에 없거든. 퇴학만은 간신히 면했지만 몇 번이나 전학을 했고, 전학을 가는 것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그건 내 자신이 '남'과의 특별한 애착이나 인연을 느끼지 못했던 탓도 있었지만, 타인의 일에는 지독 할 정도로 무심했던 인간이었으니까. 남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차라리 죽지 그러냐는 말과 함께 비웃는 다던가. 무심하기 짝이 없는 말을 몇번이나 했던지.


언제든 학교 따위 언제든 그만 둬도 문제 없단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기차 레일보다도 지루한 인생인데 학교를 구태여 다닐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고, 졸업을 하고 나서 뭔가가 크게 달라질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학교를 왜 다녔냐고 물어본다면, 답은 하나. 그만 둘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말을 꺼냈다. '학교 그만 두겠습니다.' 라는 말을. 

확실하게 자퇴 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꺼낸 말은 아버지의 얼굴을 굳게 하긴 충분했다. 일방적인 통보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지만, 예상대로 모든 이야기는 '형이 돌아오면'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까지만 해도 모든 걸 끝내는 방법은 이게 최적이라는 고집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미적지근하게 아쉬움을 표현할 녀석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끝낼 수 있는 방법. 한 여름 중 선향 불꽃을 함께 태웠던 추억은 분명 없어지진 못해도, 이렇게 의미 없어질 거라 생각하며. 정을 끊어내기 위한 완벽한 방법을 선택하기 위해 자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더란다.




제 소원은 타카히사 선배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조디아츠' 만큼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선배가 걱정 하실만한 일은 없을 거에요.

말하지 않았나요. 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알고 있을 셈이었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앞에서 초조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몇 안되는 관계였다. 나름의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미도리카와 슈지'는 그러한 인물들을 대표하는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을 포함하여 상당히 많은 인물이 등을 돌렸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정신 차려보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실망에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당연히 알 수 없을 사람의 마음을, 감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만은 그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감히 사람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으니까. 등 뒤에서 칼을 꽂을 사람이 없을 거라는 무방비함은 어찌나 얄팍했던가.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또 배신 당하게 될 바에야 두 번 다시 사람과, 타인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쩔 줄 모르는 내 자신을 직시하며 몇번이나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이럴 바에야 모든 것을 정리한 다음, 깔끔하게 학교를 관두겠다고.




"상처 받지 않았을 리 없어."




하지만 뒤를 돌아 갈 곳이 어디에 있겠어. 도망치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란 없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무의식 중에 라이더부의 근처를 얼쩡거리며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식별하기 힘든 신뢰나, 이 빠진 모양의 애정이라 한들 누군가에게 부정당할 권리는 없다. 설령 나조차도 내 감정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슈지를 만난 것으로 확실해졌다. 상처 받았다는 말을 입에 올릴 정도로, 감히 실망을 입에 올릴만한 신뢰나 애정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그래. 상처 받지 않을 리 없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타인을 향한 무정한 말들, 혹은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고 내뱉었던 말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폭력'을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던 나라고 할지라도상처 받지 않을 수는 없어. 

선향 불꽃을 함께 태우고 바보짓이라고 밖엔 할 수 없는 나날들을 함께 보낸것이 내게는 고작이 아니라 제법 크게, 손톱 안에 박혀서 빼지 못한 가시처럼 박혀왔다. 방 한 켠의 서랍장에 롤링페이퍼를 고이 집어 넣었던 날 생각 했었지. 나는 이곳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한 것 같다고. 


고작 삼 개월의 시간동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고, 버릇들은 쉽게 고쳐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내가 '이대로도 괜찮겠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해 준 곳이었다. 그래서 상처 받았던 거야 난.



픽 하고 터진 웃음.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 바다의 백사장에서 모래를 가만 움켜 쥐었다. 손바닥을 펴자 모래는 금새 흩어졌다. 

사람과의 관계가 이렇다고 생각해왔다. 언제나 흩어져버릴 것이고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손에 조금이라도 모래가 남아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흩어지지 않았으면 해. 웃기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우습지도 않을까. 적어도 나는 내 자신을 생각하며 웃어버리고 마는데 말야.









*








불안한 의심을, 웃어버릴 마음을 맞닥드리고 싶지 않았다.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을 거란 안이하고 가볍기 짝이 없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괜찮을 것이라고. 배신 따위 할 리가 없다는 마음이 그렇게 가볍게 부정당했다. 


슈지가 조디아츠 스위치를 눌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걸린 이틀의 시간동안 내가 무슨 짓을 했냐 하면, 일단 욕실의 거울을 깨고 방 창문을 의자로 깼다. 그 다음은 뭐… 열 받은 상황에서 뭐가 눈에 제대로 들어 올 리가 없어서 정신차리고 보니 형이 하나둘 보관해뒀던 CD가 든 박스부터, 차례대로 집히는 물건을 던졌다. 형도 아버지도 없는 이 집에서 날 말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다음엔 학교 관둬야겠다는 결심도 굳히고. 뭐 그랬던 폭풍의 이틀이었는데

뭐든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 이후가 큰일인 법이다. 슈지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일단은 마음을 추스리고 집으로 들어 간 순간, 현관문을 연 내게 형은 들고있던 컵을 내던졌다.그 이후엔? 쥐어팬다 라는 단어가 귀엽게 들릴 정도로 인정 사정 없이 나를 패대기 쳤고. 


인간의 몸은 정직하다. 조금만 맞아도 머리가 팽팽 돌거든. 머리를 토코노마에 박아서 이젠 그만 때리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만두긴 개뿔. 형이 플라스틱 꽃병을 집어 들 때는 정말로 식겁하고 말았다. 다시 생각 해 보면 죽일 셈이었을까 그 인간은. 하여간 꽃병은 잽싸게 피했지만 그 후로도 형의 구타가 멈췄냐고 물어보면 영 아니올시다. 코피가 날 때까지 나를 팬 형이 제 기운이 빠져서 자리에 주저 앉을 때까진 정말 죽는 게 뭔지 알겠다 싶었던 몇 시간이었다. 





"실망이다. 정말로."

"……."

"네가 학교에서 다쳐오는 거, 당연히 알고 있었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 요즘 즐거워 보였으니까."

"…."

"사람을 팬 상처가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타카히사 네가 전 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 자퇴? 누구 마음대로?"




그런 말은 제발 손에 들고있는 커피 포트를 내려놓고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무색하게 형은 나를 향해 포트를 집어던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뜨거운 물은 없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하셨는줄 아냐?"

"…하지만 그땐 정말로 그러고 싶었고…."

"─간단히 번복 할 말이라면 처음부터 꺼내질 말라고 이 멍청한 놈아! 그 정도의 각오도 없어 넌!!"




각오. 

사람을 마주하는 각오. 아 그래. 언제나 이렇게 깨닫는 게 늦지. 실수가 빈번하고, 모든 게 서투르기 짝이 없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자취를 감춘 이들 때문에 받은 상처는 분명 적지 않다. 하지만 그 탓에 모든 관계를 단절 한다면, 난 분명 후회 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있잖아 형. 나한테는 그 순간, 학교를 그만 두는 수 밖엔 없다고 생각했어.


누군가를 믿는 것 때문에 수반되는 고통을 알게 된 순간, 두 번 다시 사람은 사귀고 싶지 않다고. 그런 생각을 했어.

한편으론 나를 믿어 주거나, 혹은 지금도 믿고 있거나, 내가 생각없이 휘둘렀던 주먹에 아파했을 사람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 해 본적도 없었지. 그 정도로 타인을 향해 무심하고 무지했던거야 난. 지금도 한심하고 무심해질 때가 있어. 그렇게 형편없는 놈이 되어 가나봐. 



 


-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잖아.





문득 슈지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모르잖아. 말 하지 않으면. 

너희와 지냈던 시간이 꽤 즐거웠고, 앞으로도 즐거울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런 상황을 생각 해 본 적 없었다고. 


ㅡ너희들을 꽤 좋아한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말 한적 없다면 결국 의미가 없는 것과 똑같겠지. 그저 멋쩍다는 이유로, 해본 적이 없고 준비 되지 않았다는 말로 관계의 단절을 쉽게 입에 올리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죽을 것만 같아졌다.

 실망스러움에 고개를 떨구고, 감히 형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사과를 여전히 입밖으론 내지 못하고 그저 우물 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형이 말했다.






"도망치지 마 타카히사."





영문은 모르겠지만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 말이 너무 냉정해서가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해서였다.


   








*









다짐이라던가. 결심이라던가. 그런 것으로 사람이 쉽게 변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오늘의 나는 기껏해야 어제의 내가 예상 할 수 있는 범주 밖에는 변화 할 수 없다. 

결국 형의 말에 끄덕거린 그 날도, 자퇴 따위 절대 안 하겠다는 약속은 끝내 못 했다. 다만 이 건에 대해서 만큼은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렇게 간신히 자신을 향한 숨구멍을 열어줬을 뿐. 자퇴라고 하는 막다른 선택지에게 약간의 유예를 선고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 지금은 안 하겠다고.




"-엣취!"




이것 보라고. 결국 요 꼴이야. 천천히 밝아오는 아침해를 보며 낭만에 젖는다던가, 새로운 나 자신이 되겠다는 다짐이 나한테는 불가능 해. 고작해야 일단락, 그렇게 표현했다. 


믿고 있다던가, 그런 말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주제에 멋대로 배신 당했다고 상처 받는 건 정말로 우스운 꼴이니까. 그러니까 판단하는 건 조금 나중에. 퇴부서도 안 쓰고 나간 주제에 엮인 굴비 마냥 줄줄히 사람 피곤하게 한 녀석들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끌고 온 다음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 태연하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날이 올까. 라이더부에서 지내는 시간이 즐거웠고, 앞으로도 즐거 울 것 같다고. 그런 말을 입밖에 내놓는 나 자신이 어색하지 않은 날이 올까. 나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타인과 얽히수록 모르는 일들은 부풀어오르는 풍선처럼 가득해지니까. 



서서히 밝아져오는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남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옅은 파란색으로 그 모습을 달리했다. 보라색 때문인가. 잠깐이지만 마냥 유약하다고 생각해왔던 후배의 말이 생각난다. 저도 가만있지는 않을거에요. 멈추게 하거나 때려눕히던가ㅡ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쥐었지. 위로 해 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자극 받을 정도로 흔들리지 않던 눈이 퍽 인상 깊었다. 평소에는 참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근본은 나보다 건실한 자식이었구나. 묘하게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어질러져 있던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가 듯 생각은 천천히 정리 되었다. 어딘가의 회장 나으리라던가 책벌레의 문예부원처럼 머리가 좋다면, 생각도 계산도 깔끔하게 할 수 있을텐데. 나는 고작 이런 생각을 하는데도 몇 시간이나 걸린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잖아. 지구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전을 하듯, 화성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전하니까. 말도 안되는 생각 따윌 하며 천천히 백사장을 걸었다.



그저 파도소리만이 주변을 메운 바닷가에서 픽 하고 웃었다.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그래도 웃었다.


운동화를 들고 한참동안 바닷가를 걸었다. 바닷물이 지나간 자리, 물기를 머금은 모래는 간단히 흩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감촉이 마음에 들었기에 꽤 오랫동안 바닷가를 산책 한 다음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망치지 않을게. 약속도, 보장도 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만 두는 것으로 무엇도 해결 할 수 없다면. 도망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