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히로~"
아무도 초대한 적 없는 공간에 발을 들이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기숙사의 방문을 열어 줄 때 느끼곤 합니다. 그는 어느새 나의 참 좋은 친구가 되어있다고 말이에요.
"어서와 미쿠오."
아마 오늘도 커피포트에 물을 한가득 담아 끓일 것 같습니다.
*
"그러고보니 우리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 해?"
"응? 아마도-... 으음…."
엑, 기억 못하는거야-? 하고 미쿠오의 볼멘 목소리가 날아왔습니다. 생각치도 못한 불만을 산 것만 아니라면 좋을텐데. 저는 미쿠오의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습니다. 조금 습한 날씨인데다 사내놈의 방이라 산뜻할 리 없는 방의 분위기지만, 미쿠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석 위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립니다.
티스푼이 천천히 커피에서 작은 소용돌이의 흐름을 만드는 동안 기억을 더듬어보았습니다. 미쿠오와 친해졌던 기억.
"…잘 모르겠는데? 우리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나."
"그치? 실은 나도 그래."
"갑자기 그런건 왜?"
"궁금해서?"
"와, 실없다."
진솔하다 못해 조금은 실례일지도 모르는 감상이지만 미쿠오는 마냥 웃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친해졌는지, 지금 그런 것을 따지는 것에 뭔가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친구란 그저 지금 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즐거울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래도 계기는 있었어. 2학년때 같은 반이 되서였잖아. 기억 안 나?"
"아, 맞아맞아. 치히로 너 또 과자 잔뜩 만들어와서 쭈뻣거렸었지."
기억이라는 것은 헤집을수록 선명해지는 걸까요. 쭈뻣, 이라는 단어는 솔직히 그닥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에 대한 평가란 의외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올바르게 내려 줄 수 있는 것이다 보니 반론 하기는 힘듭니다. 심지어 미쿠오의 말에는 일정비율의 사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치히로는 그 때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미쿠오 넌 하나도 안 변했어."
"칭찬이지?"
"응."
"그런 점은 여전하다니까."
미쿠오는 조용히 전병 비닐을 뜯었습니다. 저는 따뜻한 녹차를 조심스레 입으로 넘기며 작년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일 년 전. 사용하던 교실과 층수가 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교는 지금껏 제가 알고 있었던 장소가 아닌 낯선 곳이 된 것 같았습니다. 얼굴을 알고 있던 이들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새로운 교실에 적응한다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랬을까요. 저처럼 우울해보이는 인상 때문에 성격적으로 오해를 받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나마 친했던 친구들이 모두 다른 반으로 뿔뿔이 흩어진 만큼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데는 노력을 거듭해야 할 테지만, 남에게 호감을 사는 인상도 아닌데다 말주변머리는 어찌나 부족한지. 간신히 왕따 노릇은 면하고 있지만 새학기에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상당했더랍니다.
"라이더부 처음 간 날에도 뭐 먹을 거 만들어 간 거 아냐?"
"…!? 어떻게 알았어?"
"거봐~ 역시 안 변했다니까."
"으음…으으음…그치만 사람은 뭔가 같은 걸 먹거나 같은 행동을 하면서 쉽게 친해질 수 있다고 하니까…."
사람은 먹을 것을 건내는 사람과 더욱 빨리 친밀감을 쌓을수 있다던 말을 어딘가에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확연하게 호감을 살만큼 잘생기지도, 입담이 좋지도 않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처음 보는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아. 치히로. 이 녹차 카스테라 맛있다."
"커피 카스테라도 있긴 해."
"에이 커피에 커피 카스테라는 좀 아니지."
"그건 그렇네."
미쿠오와 함께 카스테라를 우물거리고 있자니 그 말은 마냥 틀린 거 같진 않는데 말입니다.
어찌됐건 지금은 기숙사 방에서 같이 놀 정도로 친해졌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레퍼토리를 바꾸는게 좋았을까 싶긴 하지만. 응…말 거는게 너무 부끄러워서. 그때 미쿠오가 말 안걸어줬으면 만들어왔던 간식들은 다 나 혼자 먹었으려나."
"그거 혼자서 다 먹으면 살 찐다?"
"그 점에 태클을 걸다니……."
물론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학년이 된 첫 날, 쇼핑백 한 가득 만들어간 마들렌은 거의 마흔개 쯤 됩니다. 만들어 간 건 좋았지만, 어떻게 말을 걸며 나누어 주어야 할지 한참을 쭈뻣거리고 있었더랍니다. 아마 미쿠오가 그 쇼핑백을 눈치 채 주지 않았더라면 만들었던 상태 그대로 다시 들고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어쩐지 점점 선명해진다."
"뭐가?"
"처음 만났을때, 미쿠오가 대뜸 그거 뭐냐면서 나한테 달라고 했잖아?"
"아 맞아. 그때부터 네 과자 무지 맛있었어."
손바닥을 짝 하고 치던 미쿠오는 '아하' 라는 표정으로 뭔가 납득 한 것만 같습니다.
처음 만났던 미쿠오는 처음 보는 제게 이름을 물어보는 것 대신, 그 봉투 안에 든게 뭐냐는 말과 함께 눈을 반짝거렸습니다. 여전히 지금과 큰 차이 없는 핑크색의 후드라던가, 반짝반짝 거리는 눈동자는 물론이고 옆집 소꿉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마음 편해지는 태도가 아직도 엊그제 같습니다.
결국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 만큼이나 미쿠오도 변한게 없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미쿠오의 질문에 제가 구워온 마들렌이란걸 어색하게 털어놓자, 조금은 호들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탄하고. 다른 친구들의 몫이 있다는 말에 저를 데리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원' 안에 집어 넣어주었습니다. 미쿠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주는게 가능한 신기한 친구였습니다.
"치히로는 진짜 재주가 좋았었지 그때부터~"
"아니지. 그 때부터 '재주'가 좋은 건 미쿠오 네 쪽인데."
"?? 무슨 재주?"
"그런 게 있어. 음...일단은 비밀이야."
비미일? 목소리를 늘리며 황당하다는듯 제게 반문하던 미쿠오가 그게 무슨 의미냐고 답을 요구하는 건 알았지만,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는건 쑥스러우니 관둘겁니다.
*
"시구레, 너 어제 학교에서 뭐 했어? 마리 머리 잡아당겼다는 거 정말이야?"
"……?"
여름방학이 끝난지 일주일. 아직은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졌던 학교의 수업이 끝나고 옆분단에 앉아있던 미쿠오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며 교과서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에 했던 일에 대해서는 진즉 이야기를 했었고, 어쩌다보니 화제는 방학동안 헤어스타일을 바꾼 클래스메이트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대화 도중, 날카로운 어조로 끼어든 사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습니다. 평소 대화를 나눌 기회가 그리 없었던 같은 반의 여학우는, 미쿠오와 제 사이를 비스듬하게 가리더니 제게 상상도 못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제 7시쯤 뭐 했어?"
"마리…라면 옆 반의 오자키 마리양 말이야?"
"맞아. 너 어제 학교에서 마리네한테 놀자면서 괴롭혔다면서. 그거 진짜야? 마리한테 왜 그런건데?"
"…뭐?"
벙찐 얼굴로 한박자 느리게 물어보자 혀를 찬 여학우가 다시금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하나 같이 저를 아연질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침 떼지 마. 어제 저녁에 체육관 앞에서 마리네한테 같이 놀자고 추근거렸다고 하는 거 다 들었어. 머리카락 잡아당기고 이리저리 더듬으려고 했다며? 걔 지금 엄청 놀라서 우리반 근처에도 오기 싫다잖아!"
"어제…는 분명히 학교에 있었지만 제빵실 말고는 다른 곳으로 들린 적 없어. 게다가 추근거리다니 그런 적…."
"거짓말 하지마. 마리가 직접 자기 입으로 네가 맞다고 그랬어."
"……."
"마리한테 제대로 사과해. 실망이야 시구레."
턱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오자키 마리는 분명 1,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동급생입니다. 말수도 적고, 같이 이야기 해본 적은 아마 손에 꼽을 만큼 적었던 상대입니다. 조용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테니스부 활동을 내심 열심히 했던 여학생. 그 정도가 제 기억에 남아있는 전부입니다. 이성으로서의 호감이란 말을 사용 할 이유도 없을만큼 제 안에서는 존재감이 작은 사람에게 추근거릴 리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 한다고 해도, 눈 앞에서 저를 노려보는 클래스메이트는 간단히 믿어 주지 않겠죠.
"난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인정해. 그런 적 없어. 정말이야."
"와……너 진짜 뻔뻔하다. 그럼 마리가 없는 일 만들어서 너한테 덮어 씌우는 거고?"
"그런 말이 아니라…난 진짜 그런 일 한 적 없어!"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겠다는 강합적인 태도나, 몰아붙이는 말투. 저는 그런 것들에 약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제가 해본 적도 없는 일에 대해 추궁당하고 강요당하는 건 결코 익숙할 수 없습니다. 억울함에 속이 답답하게 차오르는 느낌인데, 이걸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걸까요.
"와, 진짜 놀랐네. 깜짝이야. 미카 너도 아무리 그래도 무섭게 그렇게 다그치면 안되지, 친구끼린데"
"……."
"미카 너도 치히로가 여자애들하고 말 잘안하는 거 알잖아. 얘가 여자애들이랑 이야기 할 때 얼마나 말 고르는데. 엄청 오래걸려. 핸드폰 번호라도 달라면서 추근대려면 한 시간은 걸리다가 실패할 걸?"
"그래서?"
"할말 있으면 마리랑 직접 이야기 하는 게 맞지."
순식간에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생각치도 못한 위안이라고 할지, 저를 감싸준 미쿠오가 빤히 미카를 보고 시선을 마주했습니다. 자칫 저 때문에 기분 상하는 말싸움을 하면 어쩌나 싶어 놀라기도 했지만, 적어도 지금의 저보다는 논리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미쿠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카가 노려보는 상대는 저에서 미쿠오로 바뀌었습니다. 미쿠오는 제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채 여전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내 친구 중에 그런 짓 할 사람 없어."
"……마리도 꾸며서 이야기 하는 애 아니거든?"
"그럼 오해가 있었던 거 같으니 둘이서 이야기 하면 되겠네. 마리 지금 어딨어? 내가 불러올까?"
"됐어!"
우리반에 오기 싫다는 애를 어떻게 끌고 오라는 거야. 미카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다시금 저를 쏘아보곤 그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폭풍에 휘말린 사람마냥 멍청히 앉아있던 저는 뒤늦게 오만가지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처음에는 황당함, 그 다음에는 터무니없는 비방을 향한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실망'이라는 말이 부르는 참담함.
미카가 사라진 곳을 쭉 바라보던 미쿠오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더니 보란듯이 한 숨을 푹 쉬었습니다.
"와, 진짜 무섭게 쏘아대네."
"……난 그런 짓 한 적 없어."
"알아."
너는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닌걸.
그 말은 이내 누군가에게 '실망'을 샀다는 저를 위로해주기에는 정말 충분한 말이라서, 그 짧은 순간 들불처럼 번졌던 분노를 잠재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쿠오의 말에 의하면, 저는 화가 나면 반말을 하던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거나, 얼굴에서 완전히 표정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방금 전에도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슬쩍 제 눈치를 살피던 친구가 작게 헛기침을 합니다.
"있잖아, 치히로 너 '도플갱어 소문' 알아? 아니면 학교 7대 불가사의 리스트라던가."
"……?"
"모르는 거지 역시?"
작게 끄덕인 제 얼굴을 보더니 역시나, 하고 중얼거리던 미쿠오가 몇번이나 으음, 하고 짧게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 후 몇번이나 저를 훑어보고 '여기 있는건 진짜 치히로가 맞으니까.' 라는 말을 한 후, 교내의 소문에 대해 입을 연 미쿠오의 말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 뿐이었습니다. 새벽 한 시의 연주자, 형체없는 지옥견. 저주받은 계단과 양호실의 네번째 침대. 눈물을 흘리는 비너스상과 2-A의 흐느끼는 소녀, 학교를 배회하는 남자 그리고….
"또 다른 나?"
"응.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게 나타난다는데…혹시 마리가 본 건 그게 아닐까 싶어서."
"그치만 그런건 어디까지나 소문이잖아. 정말로 피해자가 나타난거면…."
"실은, 나 다른 반 애들한테도 자기 말고 도플갱어가 나타나서 치히로처럼 억울하게 추궁 받았다는 경우를 들었거든."
말도 안된다는 말이 입밖으로 터져나오려고 했지만, 이럴 때 미쿠오가 마냥 농담을 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는 더더욱 답답한 마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곤 좋아하는 아이에게 추근거리거나 머리를 잡아당기는 유치한짓을 할 바에야 학교 앞 편의점에서 꽃씨라도 사서 심어 키운다음 화분을 가져다줄거라는 분기탱천한 저의 주장에 미쿠오는 웃어버렸습니다. 보는 제 쪽까지 조금은 기분이 후련해질만큼 크게 말입니다.
"걱정 마. 나도 치히로가 안 그랬을 거라고 믿어."
"……."
"친구잖아 우리."
아마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말인데도, 새삼스럽게 머쓱함과 감동을 함께 받게 되는 건 이렇게 억울한 상황이라서겠죠. 그렇지만 상황을 제쳐둔다 해도, 고맙고 쑥스러운 건 변하지 않을겁니다.
문득 아무도 초대한 적 없는 공간에 발을 들이려 하는 사람이 있듯, 나 또한 누군가의 공간에 어느새 발을 들였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어서와요 나의 작은 방에 온 친구. 그리고 고마워요 나를 친구로서 맞아줘서.
"고마워 미쿠오."
그 후로 며칠 간, 저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의 소식이 몇 번이나 제 귀로 들려왔습니다.
학교 세면대에 물을 넘치게 틀어놔서 복도를 물바다로 만들었다던가, 교무실에서 선생님에게 프린트물을 받아서 나온 학생에게 장난을 쳐서 몽땅 프린트를 못 쓰게 만들었다던가. 사람 머리에 칠판지우개를 던져버렸다는 우습지도 않은 장난들. 하지만 가장 심각했던 오해는 저의 도플갱어가 나타난지 정확히 열흘 후, 지나가던 학생의 머리 위에서 화분을 떨어트렸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아니었다는 말을 믿어주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쿠오가 저를 믿어준 친구 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겁니다. '가면라이더 부'와의 기묘한 인연은, 그렇게 보다못한 미쿠오가 제게 라이더부에게서 도움을 받는 건 어떠냐는 제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커피를 전부 마셨네요.
이 다음 이야기는, 카스테라를 다 먹고 꾸벅꾸벅 졸면서 팔찌 구슬을 꿰고 있는 미쿠오에게 장난을 친 다음 하는 걸로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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