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살의殺意를 기억합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차없이 짓밟았던 말을 들었던 때를 기억합니다.
얼굴 조차 모르는 상대를 향해, 처음으로 '죽어버려' 라고 생각했던 최초의 순간.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ㅡ그럼 빨리 죽어버리면 되겠네. 저 영감이 뒈지면, 형이 더 편해진다 그거잖아.」
살의를 느꼈던 순간을 기억하는 이상, 그렇게 쉽게 용서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닐까요.
*
꼭 이 년 만이구나, 라고. 나무로 된 문지방을 정확하게 밟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살았던 집에 대한 감상 치고는 간소하기 그지 없지만, 솔직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 뿐입니다.
그리곤 잠시 마당 한 구석으로 시선이 스쳤습니다. 문득 마당에서 피워놓고 치우는 걸 잊었던 소용돌이 모양의 모기향 재를 아쉽게 바라보며 짐을 들고 나갔던 때가 기억납니다.
청소를 하는 걸 깜빡 잊었다며,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을 기억 해 내던 일상적인 행동이 슬펐던 순간.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이 저를 씁쓸하게 만들었던 이 년 전의 떠나던 날.
더 이상 모기향의 잔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키우셨던 분재들이 흔적도 없는 것 처럼 말입니다.
분재와 잔재는 어디로 갔을까요.
이젠 지나가버린 시간 속, 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것들은 지금 쯤 어디에 있을런지.
그런 생각따윌 하고 있었더랍니다.
"왜 그래?"
"아. 죄송합니다."
"아냐. 오랜만이긴 하지, 들어 와."
내 집처럼, 아니 실제로 자기 집을 올라선 그는 저를 안내했습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보폭이 그가 저를 얼마나 배려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들어가서 앉는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는 이 집에 살았던 전 주인이었으니, 안방으로 오라는 말만을 남기고 가도 충분했으련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자가 '하뉴 코우세이' 라고 하는 사람이라는 걸 진즉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안주인' 노릇은 톡톡하게 하고 있나봅니다.
그는 가만히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날씨라느니, 방석의 푹신함 따위를 이야기하면서도 연신 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윽고 우리가 방석 위에 앉아, 따끈한 녹차가 서로의 앞에 놓일 때 까지 그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만 보고 있으면 새삼 '하뉴' 와는 참 반대인 사람이라고 실감하고 맙니다.
"그럼, 새삼스럽지만. 오랜만이다 치히로. 잘 지내는 것 같네."
"네 덕분에요. 저는 잘 지냅니다. 형님도 건강하셨던 모양이네요."
"에이. 내가 오랜만에 본다는 식으로 말해도 넌 그러면 안 되지."
"그런가요. 하하."
녹차가 든 잔을 천천히 손에 든 채 돌리며, 그는 무릎을 끌어앉았습니다. 편하게 앉아, 라는 말을 제게도 해왔지만 저는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 상태가 편하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겠지요. 그리고 저도,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이 없으니 상대가 불편하게 여긴다 한들 신경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타카히사랑 같은 학교 인 걸 아는데 말이야, 찾아오지도 않고."
"빙빙 돌려서 이야기 하지 말아요 형님. 저에게 하뉴를 잘 부탁한다, 그런 말을 하시려는 건 아니잖아요."
"그거야 뭐… 그렇긴 하지."
그는 잠깐 망설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언제 그랬냐는 듯, 등을 곧게 세우며 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기백, 이라는 것을 구태여 이런 식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만 본인 나름의 각오 표명이란 걸까요.
"좋아. 우리가 오래 이야기를 끌어봐야 좋을 건 없겠지. 당사자들보다도 바깥이 시끄러울 관계니까 우리는."
"그렇죠."
"전화로 물어봤던 진로에 대해서, 이젠 슬슬 대답을 듣고 싶다. 네 입으로 일부러 여기까지 온다고 했으니, 이젠 얼버무릴 필요는 없겠지?"
'바깥' 이라고 하는 관계는, 아마도 이 미닫이 바깥에서 시라카와파의 부조합장을 따르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겠지요. 혹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소수의 '시라카와'란 이름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찻잔을 세게 내려놓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제 감정을 달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은, 조금 쯤은 뜸을 들이고 싶어졌습니다만. 마음과는 달리 그런 식으로 행동 해 보았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담담히 입을 열었던 것 같습니다. 제법 태연하게 말입니다.
"대학에 진학 할 생각입니다."
"……."
"진학에 실패해도 시라카와 집안과는 관계를 끊게 되겠죠. 전 이제 '시라카와 치히로'가 아니니까요."
굳이 이렇게까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후벼파는 것으로 타인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든다는 것은, 잠시 동안 굉장히 솔깃한 선택지였기에 이번 한 번 만은 그 충동에 따르고 말았습니다.
"이제 만족 하십니까?"
그의 쓴웃음을 보며, 가슴 속 한 구석에서 밀려들어오는 울컥함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요.
하지만 이런 패배자의 분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는 사실이 이제는 슬프지도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저 슬프지도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저를 착찹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
시라카와 파派는 카나가와 현에서는 목에 든 힘을 뺄 필요가 없을 만큼 제 구역이 확실한 조직ㅡ 야쿠자입니다. 지금이야 여러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 간다면 전부 칠십 오년 전, 지금은 은퇴한 1대 조합장 '시라카와 타쿠미'에서 왔습니다. 법 보다는 주먹이 가까웠던 시절 수많은 폭력단을 모조리 힘으로 누르고 인협寅協과 의리를 내세웠던 할아버지는 날고 있는 새도 우습잖게 떨어 트릴 수 있는 사람이었고, 할아버지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을 때는 이미 근방에서는 대적 할 조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딸의 결혼을 코앞에 두고서도 '큰집'에 다녀오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는 무용담을 들었을 때, 저는 할아버지가 '시라카와 파' 라는 것에 쏟은 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야쿠자는 야쿠자일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는 지체없이 손에 피를 묻히고 범죄와 폭력, 억압과 불합리를 휘두르며 사는 집단입니다. 제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남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주머니를 터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의 온상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얽히는 것을 꺼리는게 당연합니다. 제게는 한없이 상냥하고 다정하셨던 어머니조차, 할아버지의 이 일을 몸서리 치게 싫어하셨다고 하셨으니 아마도 저의 어머니는 '보통의' 사람이었으리라고 조용히 짐작합니다. 할아버지가 세우신 조용하고 아늑한 목조 저택에서, 족히 백미터는 되는 거리를 조직원으로 일열로 세워서 진행시켰다는 결혼식 사진을 보면 저조차도 아연질색 했었으니 말입니다. 당사자였던 어머니는 아마 견딜 수 없으셨겠지요.
어딜 보아도 평범하지 않은 세계, 태연해 질 수 없었던 환경들.
데릴사위를 들여 조직을 계승 시키고, 야쿠자를 싫어하는 딸을 구슬리며ㅡ 자신이 쌓아 온 것을 내세우며 살아온 할아버지.
그저 철없던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할아버지를 '멋있다' 라고 생각했던 저는, 이제는 할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호주머니를 채우는지 알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잃고도 의연하게 자랄 수 있게 저를 키워주신 할아버지를 향한 애정의 연장선, 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직과는 티끌만한 관계도 없는 주제에 조직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면 우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물 속에서 태어난 파리가 하수구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데도 그 선택을 포기하듯이. 더러운 야쿠자라고 매도 당할 지언정 '시라카와 파' 에 대해 나름대로의 애정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게는 말입니다.
"날씨가 좋구나 치히로."
"…창문을 닫을까요?"
"아니다. 놔둬라. 하늘 색이 맑다."
다만 모든 것에는 끝이 오는 법인가 봅니다. 낡은 창문 밖,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는 게 사는 낙인 것 처럼 침대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는 더 이상 저나 조직원들이 알고 있던 '두목'으로서의 시라카와 타쿠미가 아닙니다. 그저 치매에 걸려 오락가락하는 평범한 늙은이일 뿐.
오래된 것들은 먼지가 쌓여 사라지듯, 더 이상 조직의 권력 다툼에 힘을 실어 줄 사람이 아니게 되자 많은 이들의 할아버지의 곁을 떠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두목으로서의 할아버지가 아닌, 그저 저의 가족인 할아버지가 되었을 뿐입니다.
"네 애비는 언제 온다 하느냐."
"곧 오실거에요 할아버지."
"오는 길에 돋보기 가져 오라 일러라. 과일도 좀 사오라고 하고."
"그럴게요. 뭐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복숭아. 그리고 치히로 너는 저기 앉아 공부해라. 중학생 때 부터 제대로 공부 해 둬야 사람은 쓸만 해 진다."
"네. 그렇게 할께요."
더 이상 기다려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지 않는다던가, 이제는 고등학교를 졸업 할 나이가 되었다던가. 그런 말들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마치 녹이 슬어서 바스라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스라든 것을 다시 수복 할 수 있는 수단 따위는 없습니다. 세월을 원망 할 수는 없겠지만 가슴 아픈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저는 조용히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보고 있던 앨범을 덮었습니다. 엄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할아버지와, 여섯살인 제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웃고 계신 부모님. 그리고 할아버지를 따랐던 많은 조직원들. 그런 것이 당연히 영원 하리라 생각 했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을 적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무도 선물 해 주지 않을 복숭아를 사러 가는 길은 익숙할만도 하건만.
먼지 쌓인 골동품의 취급이란 것은 익숙 해 질수록 분할 뿐 인가 봅니다.
"네가 여섯 살이었던 어린이날에…."
"……네."
"치히로 네가 여섯 살 적에 연을 날렸다. 잉어 연을. 빨갛고. 아주 커다란 놈으로 니 애비가 사왔지. 어찌나 서툴게 연을 만들던지 내가 꾸짖고 다 만들어버렸다. 내가…."
"……."
"그렇게 큰 놈을 만드는 동안 네가 주변을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던지……아마 그 잉어 연이 아직 창고에 있을텐데 말이다. 다시 날려보고 싶구나. 딱 저 창문에서 보일 만큼 높게 날리면 되겠어."
이제는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그리고 찾아 올 리 없는 곳에 놓아둔 낡은 축음기 같은 할아버지지만. 저에게는 너무 소중한 가족입니다. 비록 치매에 걸렸다고 해도 할아버지는 저의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라서… 가끔 무언가가 치밀어 오릅니다.
다시 누군가가 찾아올 수 있기를. 저 병실의 문을 열고 할아버지의 안부를 살피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기를. 마지막 날까지, 할아버지의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할아버지를 향한 관심을 다시 돌려놓고 싶어서.
다름 아닌 내가, 내 손으로 할아버지가 키워주셨던 만큼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도, 저는 할아버지가 해오셨던 일이 옳지 않다고 해도 그 길을 걸을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해꼬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ㅡ누군가는 비웃어버릴, 그럴 이유만으로도 말입니다.
"……. ……."
"네…할아버지. 저도 기억해요. 정말 즐거웠었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언제 왔느냐 치히로?"
"즐거웠었어요 정말……."
믿어주세요 할아버지.
저는 정말로, 그럴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어요. 죄송해요. 당신이 주셨던 이름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서.
*
"만족하냐, 라고 묻는다면. 그래. 미안하지만 이걸로 흑백은 확실히 가려졌네. 안심했다고 대답해야겠지. 조직에서 다음 조합장 이야기가 나올 때, 잠깐이라도 '시라카와 치히로'의 이름이 거론 되는 게 나로선 마음 편하지는 않으니까."
"……."
꽤나 차분히, 그는 머리카락을 더듬거리다 대답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던진 시선은 마치 제 눈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하뉴 코우세이가 이 년 전 저에게 '시라카와' 라는 성을 버리는 조건으로 할아버지의 병원비와 저의 진학에 들어가는 돈을 지원하겠다는 말을 들었던 때와 마찬가지로ㅡ 저는 현실이라는 것을 의외로 똑바로 인식 하고 있나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담담 할 수는 없겠지요.
시라카와 파는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2대 조합장이 물러남과 동시에 '하뉴 잇세이' 라는 이름의 3대로 그 흐름은 바뀌었고, '하뉴' 부자가 조합장에 눌러 앉음과 동시에 할아버지가 지으셨던 시라카와 저택에 사는 것으로 정점에 앉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시라카와' 라는 이름으로 된 할아버지의 유산은 모두 타인의 몫이 되었습니다.
어디나 그렇듯, 변화하는 흐름에 따라 떠밀려 지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모기향의 잔재와 할아버지의 분재, 낡은 잉어연을 저택 어딘가에 놓고 와버린 저처럼 말입니다.
"사과하지는 않으마. 비열하다 해도 좋아. 하지만 나도 동생 뻘 되는 녀석과 자리싸움을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툭 튀어나온 손목의 뼈가 도드라지게, 그는 주먹을 쥔 채 가만히 바닥을 내리 누르며 허리가 뻐근하다는 듯 자세를 바꿨습니다. 마치 자신의 어린 동생을 타이르는 것 같은 동작입니다. 물 흐르듯, 너를 적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지만 왜일까요.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에는 제 발 밑을 흔들고 있다는 감각으로 이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결국 제 손으로 할아버지의 저택을 떠나야 했을 정도로, '하뉴' 라는 이름의 사람들은 저를 밀어냈습니다. 가볍지만, 매섭게. 마치 파리를 쫓아 내듯이.
"ㅡ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거야 너는.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어르신의 병원비를 그 나이에 혼자 다 떠맡고 중졸의 졸업장으로 일한다... 그런 건 무리잖아. '시라카와'로서도, 어르신을 모른 척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거고. 그런 식으로 생각 해 줄 수는 없을까. 네가 후계자 자리에서 내려온 걸로 모든 게 해결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지요."
"……."
"정말입니다. 빈정거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딱 마시기 좋게 식어버린 녹차를 목으로 한 모금 넘기다가, 저는 그의 방 안에 걸린 작은 가족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조금은 낡은 것 같은 사진은 액자에 소중하게 걸려 벽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뉴 잇세이. 아마도 그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 고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하뉴 코우세이. 그리고……작은 키의 하뉴 타카히사.
저도 모르게 차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울컥 하는 감정은 이제는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형님의 말씀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협박이라는 식으로는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아요. 제가 할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했던건 사실이지만…그럴 수 없다는 현실에 놓여 있단 것도 압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용서 할 수 있어요. 하뉴 코우세이. 당신은, 용서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인정 할 수 있는 그런 상대에요. 당신의 자리를 위협한다면 열여덟살 짜리의 후계자라도 집안에서 쫓아 낼 수 있는 각오가 된 사람. 하지만."
"……."
"그런 각오조차 없이,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어요. 인정 할 수 없어요."
문득 화가 납니다.
길을 가다가. 낡은 앨범을 덮을 때라던가, 비가 오는 날 혼자 우산을 펴는 순간. 할아버지의 무릎 관절을 주무르는 조용한 새벽녘, 혹은 통장의 남은 생활비를 확인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자기 앞에 놓여있는 밥그릇 속 쌀 한톨이 어디에서 오는지, 누구의 주머니에서 누구 목에 칼을 들이밀고 나온 것인지도 모르고, 설령 알게 된다 한들 짊어질 각오 따위 한푼도 없는 녀석에게 내 자리를 빼앗긴 것이 화가 납니다.
화가 나서, 죽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뉴 타카히사라는 존재를 목전에 둘 때면.
"그렇담 여기엔 왜 오겠다고 했던 거야? 타카히사와 마주치는 게 싫은거라면 전화로 말 해줬어도 충분했는데."
"그건…."
"?"
"……잉어 연을 가지러 온 것 뿐이에요."
아아 역시 분하네요 할아버지.
창고 안에 잉어 연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와 살았던 집을 내줘야 한다는 건 역시 분해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습니다.
물러나야 할 때 였습니다.
*
잉어 연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내려 놓은 채 거의 실신한 듯 침대 위에 엎어 진 것 같습니다. 내집이었던 곳이라고 해도,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공간이 된 집입니다. 말하자면 적진이랄까, 네에. 아군진형은 아닌 곳인걸요. 그런 가시방석 같은 곳에서 고슴도치처럼 굴어야 하는 상대를 만나버렸으니 솔직히 진이 빠집니다.
그래도 무사히 만나서 돌아왔고, 용건이었던 물건도 가져왔으니 다시 그 곳에 갈 일이 없다는 점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조금은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되는데는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교복을 갈아입으려던 찰나, 거슬리는 감각을 깨닫고 느릿한 동작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 날의 살의殺意를 기억합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차없이 즈려밟았던 말을 들었던 때를 기억합니다.
얼굴 조차 모르는 상대를 향해, 처음으로 '죽어버려' 라고 생각했던 최초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런 순간을 과연 잊을 수 있을까요.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의 저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입 밖에 내선 안되는 말이 존재는데도 하뉴는 그 선을 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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