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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소원을

화성 #24 나의 꿈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하루 세끼 밥 굶을 일 없이 잘 먹고 잘산다, 였던가. 비슷한듯 다른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런 뉘앙스의 격언이 있다는 것 쯤이야 고전문학 낙제생인 나도 안다. 다만 밤샘에 가깝게 눈만 붙이고 학교에 가기 위하여 일어나는 날이나 바짝 운동하기로 마음 먹은 때가 아니면 좀처럼 이불에서 기어나오질 못해서 문제였던거지. 사상과 행동은 별개의 문제고 결국 익숙한 쪽을 고르는게 사람의 본능이라 이거야.


그래서인지 오늘 같은 날은 잠을 깨는 순간부터 당첨 복권을 긁은 기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뒷목을 잡아 누르던 무거운 졸음은 온데간데 없고,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의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으니까. 일찍 일어났고 밥 굶을 일도 없을테니 이것만큼 좋은 일이 또 있겠냐고.


조직원들이 없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 작은 도련님께 드리는 인사라며 등을 보이며 인사까지 하니 안 받아줄 순 없고, 넌지시 세상살이 이야기나 조금 한 다음 세면을 후다닥 끝냈다. 평소라면 두시간 가까이 걸렸던 머리 세팅도 음, 그런대로 괜찮지. 이정도면 빠르고 정확하니까. 시계를 흘끗 보기가 무섭게 형의 부름에 나가보자 완벽한 아침밥이 준비 되어있었다. 생달걀에 된장국에 고등어 구이. 두툼한 크기의 교자 옆에 떫은 콩까지. 단백질 천국이야? 영양 밸런스가 맛 간거 아니냐고 이거,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형은 흘끗 아버지를 가리키셨다. 아마도 아침 식사의 완벽한 불균형을 초래 한 건 아버지였나보지. 신속하게 입을 닥쳤다.




"학교 소식 들었다. 고생 많았더구나."




차마 반찬에 대해 찌르기는 뭣하여 가만히 국그릇에 코를 쳐박았는데, 코로 두부를 뱉어 낼 뻔했잖아. 

마주보고 있는 형만이 그런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신나게 히죽거린다. 아서라 인간아 원 참.



"…아닙니다."

"학교 좀 조용히 다니라고 한 것 같은데."



아. 그런 말 하셨던가. 모른 척 슬그머니 잡아 떼어야 하나 고생 해 봤는데 국그릇 넘어 형의 눈빛은 NO 사인을 보낸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잘 했 다. 사내새끼면 밀어 붙일 줄도 알아야지. 네가 날 닮은건 진즉 알았었으니까."

"……."

"오늘은 그래, 학교 안 가냐."

"갑니다. 평일입니다 아버지."

"얼른 먹고 일어나라. 아침상 기다리는 사람들 많다."



말을 뚝 잘라버리더니, 이번에는 반찬이 반은 남았는데 먼저 자리를 뜨신다. 속이라도 안 좋으신건가 싶어 평소라면 신경 썼겠지만 오늘은 왠지 알 것 같다. 아마 아버지는 평생 해본 적 없는 칭찬을 한 탓에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자리를 먼저 뜨신 거겠지. 그런 행동이 아닌거면…몰라 나한테 물어보지 마. 나도 저런 아버지를 본 건 처음이라고.



"간만에 니가 형 체면 살리네. 동창들한테 연락왔다 너랑 쏙 닮은 애 하나 가면라이더부 인터뷰 할때 봤다고 하던데…. 언제 그런 것도 찍었냐?"

"누군 찍고 싶어서 찍은 거겠어?"

"그래그래. 성질 죽이느라 용썼네. 오는 길에 용돈하고."



용돈이라고 하기엔 조금 큰 액수가 아닌가 이거. 지폐가 한다발이잖아. 

받아도 되냐는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긴 했는데, 나도 사람이신지라 형이 손사래를 몇번 치자, 솔직하게 지갑 안으로 쑥 쑤셔 넣었다. 한번 먹은 건 이제 내거니까.




"나중에 달라고 해도 소용 없다? 국물도 없어."

"깨는 소리 하지 말고. 다녀와라 임마."

"응. 그럼 다녀온다."

"ㅡ가기 전에 말인데,"




현관 바깥에 놓아둔 헬멧을 들었다. 넌지시 부르는 목소리. 조금은 다정하고. 그래서 낯간지러운 느낌이야.




"타카히사, 형이 너 자랑스럽게 생각 하는 거 알 지?"

"…알아. 새삼스럽긴."




이상하리만치 싫지는 않아. 마치 참 예전부터 기대했던 것 처럼 말야.

집을 나섰다. 시간은 오전 일곱시 사십분. 지금부터라면 딱 여덟시 정각에 학교에 도착 할 것이다.







*







하루종일 실컷 자고 일어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교문을 통과하려 했더니 음, 꽤 빡센걸. 일단 교문 통과부터가 쉽지 않아보인다. 배기음이 들리자마자 눈을 치켜뜨고 단걸음에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날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으니까.




"기다리세요 타카히사군! 복장 불량!"

"시라베냐. 아침부터 따지지 말게. 교문 시끄럽게."

"시끄러운게 싫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하지 말아주세요."

"제대로 허가 받았으니 됐잖아.



가지가지 하네요, 라는 말과 함께 같은 반의 학생회장이 허가서를 얼굴에 던졌던게 언제더라. 열받는 기억이 떠오르자 할말이 없어져서 클러치에 발을 댄 채 가만 있었지만 가만 두고보실 선도부원님이 아니시다. 아침부터 어느 양아치의 가방을 뒤지셨는지 불손하기 짝이 없는 플레이보이를 들고 계시네. 본인이 보려고 들고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게 또 재밌단 말이야.




"내가 걸릴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복장 고친적 없고. 머리는 더더욱 걸릴 리가 없고. 아, 뭐 말 걸고 싶은데 구실이라도 챙겨볼 심산이었던 거야? 그런거면 진작ㅡ"

"피어스 금지."

"아. 그래."




음. 예기치도 못한 철벽인데. 농담이 전혀 통하질 않는 상대다. 시라베는 등교중인 다른 학생들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오토바이에 타고 있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킨다. 그러고보면 복장이나 두발 같은 건 자유로운 교풍을 존중하지만, 악세사리는 안됐던가. 

아마노가와의 분위기는 교사조차 적당히 주의하고 넘어가는 교풍이지만 그녀에게 걸리면 어림도 없다. 귀에 한 피어스든 혀에 한 피어스든 배꼽에 한 피어스든 일단 빼야 다음 이야기가 가능하거든.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해. 선도부 중에서도 나한테 말하는거 너 정도일 걸."

"…저라고 전혀 안 떨린 건 아니었는데요."

"백퍼센트 거짓말이지 그거."




거북이 등딱지도 절반으로 딱 잘라 쪼개겠다 싶을 정도의 단호함과 당돌함의 소유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믿기지가 않아. 너스레를 떨다가 벌점이 추가 될 뻔 하는 걸 황급히 피어스를 빼서 보여주고 나서야 용서 받았다. 자로 잰 것 같은 스커트 길이와 성실 규범이라고 이마에 붙여 둔 것 같은 시라베는 아침부터 입을 모아 삐죽였다. 농담이라니까, 라는 말을 몇번 했는지 모르겠네. 겨우 봐줄 생각이 들었나보다.




"아. 그래요 타카히사군 운동부였죠?"

"복싱부. 유도나 검도 쪽에도 친한 애들은 많은데 왜?"

"요즘 하교길에 여자애들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요. 라이더부에게 부탁하긴 좀 그렇고, 운동부 학생들 중 아는 사람이 많다면 되도록 여학생들이랑 다 같이 돌아가달라고 말 좀 전해줄래요?"

"그거야 상관없는데 언제부터? 어떤 놈인데? 라이더부에서 잡아 죽여…잡아 와?"

"아뇨. 그럴 것 까진 없어요. 근데 방금 죽이려고 한거에요…?"




엇차 말실수. 그런게 아니라고 고개를 몇번 흔들었지만, 내 거짓말을 덮으려는 노력따위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시라베 앞에선 무색해진다. 결국 내가 선택 한 방법은 말 돌리기다. 에이 귀찮아.




"어쨌든 다른 애들한테 말해둘테니까.무슨 일 또 생기면 말하고. 아 본인 잡으면 두들겨 패도 돼?"

"안되요. 절대 안되요. 사람 잡을 일 있어요? 그냥 다른 학생들이 안심할 수준으로 해주세요. 학교에 보고 해주시구요."




시라베가 정색하는 모습은 꽤 웃긴다. 직설적인 발언 덕분에 오히려 대화하면 심심하진 않아. 어쨌거나 알았다고 말을 하며 얌전히 주차나 하고 들어가겠다는 내게 끝내 오토바이에서 내려서 끌고 가라는 말을 하지만 그것만은 못 듣지. 학생들이랑 부딪치면 사고 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정당성 높은 말이지만 초보 운전자가 아니라고. 

불만 대신 엔진을 가열시키자 시라베는 깜짝 놀랐는지 한발 떨어진다.





"이렇게까지 부려먹히는건 싫은데 완두콩 공주 말이라면 따라야지 뭐. 알았어. 애들한텐 전해둘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완두콩 공주라는게 저에요?"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이마도 톡 두드리면 까질거같으니까 어울리잖아."

"……운동부 남학생들이면 믿을만 하네요. 타 카 히 사 군 덕 분 에 살 았 어 요."

"왜 내 말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는거야."




타카히사군은 이제 슬슬 별명 붙이는 센스가 최악이란걸 알아야 한다고 보는데요. 결정타를 날린 그녀를 보고 할말이 없어졌다. 허, 하고 어이 없다는 웃음과 함께 노려보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뿐 전언을 철회하진 않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고집이 셀지도 모르겠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책임지고 다 말해둘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대신 다음엔 벌점 지워줘."

"…이번만이에요."

"오케이 오케이."



진짜 이번만이에요! 그리고 다른 학생들한텐 비밀! 이라고 소리치는데 그거 교문에서 말하는 시점에서 전혀 비밀이 아니잖아?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마저 교문 안으로 들어간다. 어째 생각치도 못한 퀘스트 하나가 생긴 느낌인데. 어차피 수업 전에만 들어가면 되니 용건이 생긴 김에 운동부실들이나 한바퀴 돌고 가야지. 오토바이를 키를 던졌다가 받길 몇번이나 반복하고 있자니 지각 오분 전의 종소리가 들린다.



시간 하나는 칼 같지 흠.

지각을 면한 기념으로, 교실에 가방을 던져놓고 가자. 


그나저나 나도 참 변했네. 학교에 제대로 필통 챙긴 가방을 들고 다니게 되다니.

이상한 감각이다.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하지만 보폭만은 커다랗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나아갔다. 마치 더 이상 길을 잃을 이유가 없다는 듯.






*








목적지는 정하지 않고 돈을 든 채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 서있는 느낌이다. 갈 곳이 너무 많잖아. 진로 지도 게시판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서있던게 몇 분이었나. 다른 학생들은 감히 나 때문에 다가올 엄두도 못 내고 슬쩍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딱 한명. 아는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타카히사, 여기서 뭐해?"

"아. 하루 선배. 오셨습니까. 잠깐 고민좀 하느라."




이 학교 녀석들중 제대로 말을 걸어오는 건 라이더부일게 뻔하다. 사실 나조차 라이더부가 아닌 녀석들 중엔 그 어디더라, 유즈루가 들어가 있던 곳. 스타더스트부인가 스타라이트부인가. 거기 녀석들 밖에 없거든.

포카리를 뽑아들고 있던 야츠야나기 하루미 선배는 곧 내가 보고 있던 게시판을 한번 훑어보더니 뭔갈 알았다는듯 끄덕인다.




"아- 그러고보니 곧 2학년도 진로상담이었지? 타카히사는 정했어?"

"아뇨 아직입니다. 경찰,소방관,파일럿 이쪽이 제일 만만하나 싶은데. 우주비행사까진 좀 오버인가 싶고. 어쨌든 하고싶은 거야. 어지간히 많습니다. F1에도 나가보고 싶고."

"와- 스케일 크네."

"영어 공부라도 해서 미군이라던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어라, 이것도 꽤 괜찮다. 

미군이라. 진짜 괜찮잖아? 일단은 일본에서만 평생 살다가 죽으면 그것만큼 가오 죽는 것도 없진 않을까. 외국물을 먹는다는 말이 그닥 좋지만은 않단건 알지만 어차피 나중에 돈들여서 나가는 것 보단 형이 지원 해 줄때 다녀오는게 좋지 않을까. 흠.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어쩐지 얼이 빠진 목소리로 하루 선배가 중얼거린다.




"미군 말이지…."

"이왕이면 미군에서, 파이브스타?"

"아 최종목표는 미합중국 대통령이었어?"

"…별 다섯개가 대통령입니까?"

"일단 군인은 안되겠다 타카히사. 계급장은 볼 줄 알아야지."




유구무언이다. 혼자서 이런 생각은 안하는 편인데, 어째 무식이 마빡에 튄다는 말이 생각나네. 아무리 혈기 넘치고 패기가 발에 치인다고 해도 미국 대통령은 너무 멀리 나갔나 싶어서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기껏해야 몸으로 꼴아박고 뒹구는게 성미에 맞지 않나 싶어서 골라본 리스트들이었는데.

선배의 쓴웃음 섞인 농담조에 반박할 말이 생각나질 않아서 말을 돌렸다.




"절충하면 특수부대라도 들어갈까 싶네요. 코우토처럼 머리 좋은 직업은 무리니까 몸으로라도 때워봐야죠. 그런 쪽은 적성에 맞으니까. 졸업 전까지 조용히 제의나 들어오면 좋은데."




세상 일이 그렇게 만사 잘 풀릴거라곤 생각 안 하지만, 조디아츠가 사라지고 나자 라이더부는 그야말로 날던 새도 떨어트릴 기세로 전국구의 유명세를 얻었다. 그렇게 잘 풀릴리는 없어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 정도의 마음은 가져도 되지 않나. 그러면 정말로 한 일주일 쯤에는, 올지도 모르잖아. 제의하는 거. 

선택지를 여럿 고민하고 있으니 선배는 조용히 웃더니ㅡ




"아직 시간은 더 있잖아. 사람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는걸. 타카히사가 원한다면 뭐 든 지 가 능 할 테 니 까."




'전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한다. 전매 트레이드마크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전처럼'이 언제였었지?




"하 고 싶 은 일 이 많 다 는 건 좋 은 거 야."





실컷 고민해도 돼. 그 말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처럼 들린다. 평소대로 선배는 도량 넓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고 있고 어딜 봐도 후배의 고민을 들어주는 선배의 모습 그대로인데 무슨 말을 연이어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결정하면 보고하겠습니다.


짧은 말을 나누고 선배는 수업 종이 치기 전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이따가 라이더부실에서 보자는 말이 마지막이었다.


다시 게시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엇 하나 변할 리가 없는 내용이다. 학력무관. 국가고시 시험. 나쁠 것 하나 없는 조건들. 그저 택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마음 한쪽이 수런거리는지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을거야. 아마 그럴거야. 

제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허한 울림을 곰씹다가, 수업 종이 울린 순간 정신이 돌아왔던 것 같다. 게시판을 뒤로하고, 못 박힌듯 땅에 붙어있던 발을 움직였다.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은 아주 많을 것이다. 왜냐면 이곳은, 화성이니까.







*








라이더부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겨우 나왔다. 할일없이 호에에 거리며 카펫 위를 뒹구는 에리를 거꾸로 들어서 기 크기 운동이라는 명목으로 가지고 놀았던건 좋은데, 이번엔 반대로 쥰이치가 날 가지고 놀았다. 유치하게 정전기 일으키기 놀이가 뭐야? 도서관 책으로 내 머리를 한참 비비더니 이것 보라며 정전기 일으킨 모습을 에리에게 보여주며 사람을 놀리기에 허리를 꺾어버릴뻔했다. 머리 세팅하는데 얼마나 걸리는줄 아냐고. 간신히 정돈은 하고 왔는데, 아직도 신경쓰여 망할. 고등학교 2학년이나 되서 그렇게 놀고 싶냐?! 너희가 그러고도 동급생이냐고 버럭 화를 냈는데도 아랑곳하질 않더라니깐.


헬멧을 벗자마자 한 행동이란 머리카락을 열심히 뒤로 넘기는 일이었다. 툴툴거리곤 시동을 끄고 목표는 777이라며 빠칭코 슬롯머신이 놓여진 게임센터로 들어가려는데, 이번에도 왠 목소리가 뒤통수를 덥석 잡는다.




"타카히사 선배~!"

"와, 선배 왠 일이에요?"

"안녕하세요."



…. 

왠 일이냐, 라는 단어는 내가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형인지 과자인지, 하여간 무언가가 담긴 하얀 봉투를 든 채 손을 흔드는 이치고와 센, 조용히 둘보다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슈지다. 어쩐지 부실에서 1학년들이 안보인다 싶었더니 이런 곳에서 놀고 있었나보네.




"내 대사 뺏지 말고. 왠일이야 너희?"

"있다가 미팅 약속 있어서 시간 때우는 중."




뭔 약속? 미팅?

어이가 없어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센이 인형을 뽑다가 실수를 했는지 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셋이 동시에 크레인 뽑기로 얼굴을 들이민다.




"슈지는 그렇다고 쳐도 임자 있는 두놈이서 왠 미팅이야. 너네 뭘 말아먹고 싶은거야? 인생?"

"아니거든?"

"에이 그런거 아니에요. 이거 다 미요 주려고 뽑은건데."

"그럼 뭔데? 센 너는 임마, 나이가 몇갠데 죄다 동물인형. 이치고 넌 부탁이니까 하루선배는 화나게 하지 마라. 그렇게 도량 넓은 신선 타입의 선배야말로 화나면 진짜 무서울 것 같다고. 라이더부에서 두번째일걸."

"첫번째는 누군데요?"

"에어매트 터트렸을때의 케이 선배."




질문했던 슈지가 곧 아, 하고 납득했다는 얼굴로 탄식을 터트렸다. 얼마전 에어매트를 터트렸을때 케이 선배의 반응을 기억해낸 모양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슬픔과 분노, 체념의 삼단계를 걸쳐 내 멱살을 잡을 기세였길래 잠자고 고쳐놨는데 어차피 에어매트 따윈 오래 못 쓰는거 아니냐며 변명하려던 말도 달아났다. 기가 세긴 세다니까 그 선배. 

곱지 않은 추억을 돌이키며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타카히사 선배야말로 뭘 모른다는 반응이 이치고에게서 돌아왔다.

들어보니 좋아하는 여자애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잡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에 만들어낸, 반쯤은 짜고친 미팅이라나 뭐라나. 나로선 전혀 이해가 안간다. 그냥 앞에서 바로 고백하면 되잖아. 왜 빙빙 돌아서 주변 사람을 휘말리게 하는데. 이해가 안간다고 고개를 내젓고 있으니 어랍쇼, 후배 셋이야 말로 날 보고 고개를 젓네. 내가 모르긴 뭘 모르냐?





"선배. 선배야말로 여친 없는 입장에서 그런 말 해봤자 하나도 안먹히거든."

"에라이…됐다. 여튼 난 가본다. 잘들 놀아라."

"어 벌써가?"

"오늘은 형님이 좀 바쁘셔서."

"그런게 어딨어! 놀 아 줘!!"

"맞아요, 언제는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으면서."

"내가 언제?! 우왓 임마 머리 잡아당기지 마!"

"타카히사 선배 포기하는게 빠를걸요."





너희 약속 있다며-! 새된 목소리로 꽥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다. 누구야 머리 꽁지 잡은거?! 이치고 너냐?! 나 아니거든?!게임센터 안의 사람들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볼만큼 빽빽 소리를 질렀는데 기여코 붙잡은 채 안 놓을거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먼저 백기를 낼 수 밖에. 이치고나 슈지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하필이면 센 녀석까지 합세해서 막아대니 뿌리치는것도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잖아.




"뭘 하고 싶은건데 너넨."

"스티커 사진?"

"난 간다!! 꺼져!"

"선배 농담이야 이번건 진짜로!"






가뜩이나 얼마 없는 후배들 셋다 맹랑하기 짝이 없다니까. 대빵 큰 쿠션 인형을 뽑아 주니 박수는 커녕 더 큰걸 뽑아보라고 난리면서, 한번 실수하면 가차없이 입에 계피사탕을 물려주는 후배들과 게임 센터에서 얼마나 시간을 때웠는지 모르겠다. 결국 빠칭코 슬롯머신은 한번도 못 돌렸어.








*










마침내 편지가 도착했다. 지구별에서 도착한 편지 한 통. 나는 그 편지에 답장을 써야 하지만, 아주 잠깐만 기다려줘. 마지막으로 꿈에게 작별할 시간은 필요할테니.




"타카히사. 오래 기다렸어?"

"…아니. 하나도 안 기다렸어. 어서와."




치히로 형은 웃었다. 이제야 알겠다. 문자 몇 번으로 나를 미워할 리 없다고 믿었던 상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ㅡ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진로가 천갈래라 고민이라니까'. 그렇게 넉살을 떨고 싶었는데 


너무나도 현실과의 커다란 괴리감을 가지고 꿈에서 깨고 말았다. 빛무리에 눈이 멀어버릴 만큼 눈부신 시간 속에서 단 하나의 변할 수 없는 진실. 당신처럼 다정한 사람은 나와는 정 반대라 참 좋았다. 내 형처럼 말이야. 멍청하고 요령 없고 고집만 세서, 뭐 하나 좋은 장점이라곤 없는 하뉴 타카히사를 지구에서 살아도 된다고 용서해준 우리 형처럼.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작은 형이 되어주었으면 했다. 한없이 한없이, 내게는 다정한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아니다.




"오래 안 기다렸으면 다행이네. 이거 마셔. 내가 좋아해서 자주 뽑아 마시는건데 저쪽에 자판기 새로 생겼더라."

"…땡큐."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일 수가 없다 나의, 하뉴 타카히사의 현실은 이것과는 정 반대였다. 그래 약속하지 않았던가. ㅡ사라져줄게. 당신 앞에서. 그렇게 마지막을 약속했다. 적어도 남들에게 하는 만큼만 내게 다정하고 좋은 후배로 대해준다면 나도 당신과는 꽤 잘 지낼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남보다도 못한 관계. 이젠 나도 포기하고 서로의 갈길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래. 꿈이 아니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나 때문에 있는 것을 모두 내려놓고 떠나며, 나를 원망하게 된 사람을 앞에 두니 이제 잘 알겠다. 시구레 치히로가 작은형처럼 내게 잘해주는 세계라니.



어항을 한 번 깬 적이 있었다. 언제더라. 이제는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 전, 이 세상 모든 일이 내가 나빠서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었을 그런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지는 것도, 학교의 어항을 깨서 금붕어 한마리가 손 쓸 수도 없이 펄떡거리며 숨이 끊겨져 가는 것도 전부 내 탓인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아름다운 지구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과학시간의 수업은 전부 다 거짓말. 


모든 건 예쁘게 말 붙일 줄도 모르고 고집 세게 제 할말만 하는 내 탓이라서. 못난 내 탓이라서.


이곳에, 지구별에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었다. 그때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렇담 언젠가 화성으로 돌아가주겠다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날, '화성은 생물이 살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숨겨진 곳이랍니다.' 그 말을 곰씹으며 생각했었다.


나는 화성인이었을지도 모르지. 예쁘지도 푸르지도 않은 지구별에 홀로 떨어진 화성인이라, 여기서 지내는게 견딜수가 없는 걸거야. 나는 아무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모두가 나를 나쁘다고 해. 내가 나빴던 건가? 실은 나 혼자 화성인이라, 모두와 달라서 그런걸까. 사실은 내가 다르고 내가 나쁜거라면 어떻게 해야 해?


그때 내게 해줬던 말이 있었다. 형은 가끔 내게 잊었는지 잊지 않았는지 찔러보듯 물어보지만,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아. 그래도 구원이었다.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말이었다. 




네가 남들과 틀리고 달라도, 혼자 화성으로 떠나지 않게 계속 여기서 널 붙잡고 서있을게. 그거면 될까?




충분하다 못해 넘쳤던 말. 내가 홀로 남지 않도록 도와줬던 형이 있었다. 푸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곳이지만 떠나지는 마. 형이 있어줄게. 그 말과 함께 내 손을 잡아주었다. 아마 용기라는 걸 낼수 있었다면 그건 형 덕분이었겠지. 그래서 나는….


나는 선택했다. 지구별에서 살아야 하는 화성인의 운명이란 것을 말이야.

내게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을 땅에서, '내'가 잘못 되어있다고 손가락질 받는다고 해도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렇게 살기로 결정했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고 있어?"

"…꿈에서, 깨기 싫다는 생각."




'치히로 형'은 웃는다. 아마 못알아들었지만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웃음으로 넘기는 거겠지. 형이 건내준 따뜻한 종이컵 커피를 쥔 채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너무 좋은 꿈을 꿨거든. 내가 원하는게 전부 이루어지는."

"…."

"당신이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면서, 그렇게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깨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꿈이었어."




현실의 지구별에서 살고 있는 나는 잘못된 사람은 나란 걸 알면서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굴복하고, 이렇게 자라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인상이 험한것도, 좋은 말 하나 돌려 줄 수 없는 것도, 솔직하게 고맙다느니 미안하다느니. 구구절절 입밖으로 내면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게 가끔 나를 비참하게 했더라도 버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변할수는 없을테니까. 이대로 한심한 하뉴 타카히사일테니.


그래도 바란다면 조금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그래. 


선배에게는 듬직한 후배. 같은 동급생에게는 재밌고, 넉살좋은 녀석. 후배에게는 믿을 수 있는 선배. 후배들과 질리게 놀아주고 선배에게는 지금보다는 더 후배다운 후배가 되는 것, 같은 동급생들에게는 적어도 뒤지지 않고 같이 걸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참 좋겠지.

지금의 내게는 부족한 게 모두 채워진 최고의 나. 하고 싶은 일이 뿅 하고 튀어나오고, 장래희망이니 꿈이니 뭐니. 너무 많아서 다 고를 수도 없을 정도로 많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거북한 아버지와의 관계도 조금은 자랑스러운 아들이될 수 있다면 베스트 오브 베스트. 누구에게나 신뢰받고, 수많은 사람과 잘 지내며 단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하뉴 타카히사.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결코 깨지 않아도 되었을 모든 게 만족스런 화성에서 사는 꿈.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계속 꿈을 꾸는 건 안되는 거야?"

"…."

"한없이 잠드는 걸 용서 받는 다면 꿈은 계속 꿀 수 있어. 타카히사."

"그럴지도 몰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를 타카히사라고 부르고, 나 또한 그것을 가만히 넘길 수 있는 꿈은 마치 어릴 적 바라던 화성세계와도 같았다. 치히로는 작게 눈웃음을 짓는다. 내게는 한번도 보인 적 없고 앞으로도 보일 일 없는 그런 모습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특히 당신은 이런걸 용납 하지 못할 세계니까."




화성에서 편지를 보낸다. 

안녕. 나의 꿈들. 나도 이곳에서 살고 싶었어. 가능하다면 쭉. 계속해서.




"진짜 나는 여전히 알맹이가 텅 빈 사람이지만, 그래도…계속 살아가볼게. 알맹이가 생길 날까지."




이상하지. 자꾸만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서 떨어질것 것 같다. 이 행복한 꿈을 인정하고, 비참한 현실로 돌아가야 할테니까 아주 잠시 못본 척 해주기를. 화성에서 보내는 편지를 부치며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할게. 


지구별로 돌아가는 나는 아마 누군가에게 살갑게 대할줄도 모르고, 형에게는 여전히 골칫거리일테고, 시구레 치히로에게는 미움받을테고 하고 싶은 것도 할줄 아는것도 아무것도 없는 나로 돌아가야겠지. 그래도 괜찮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아. 대신 아주 잠시만 기다려줘. 괜찮을거야. 어떤 바닷가에서 다짐 했었으니까.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 꺾이지는 않을거야.




"안녕."

"가 지 마 타 카 히 사. 무 슨 일 인 데 ?"

"…위화감,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




노이즈와 끊기는 목소리. 거짓말이 숨어있는 꿈을 끝냈다.


모든 게 내게 다정한 꿈속에서, 잔인함이 흩어진 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한때 나의 꿈들이었던 것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안녕. 

그래도 잠깐이나마. 행복했었어.

내가 되고 싶었던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