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은 반복된다. 나를 위하여.
*
제법 졸린 아침이었다. 실컷 늦잠을 잔 감각이라 질겁하며 일어났는데 왠걸. 시계는 새벽 여섯시 반. 밀린 세탁물을 한바탕 돌리고, 영양가 좋은 아침을 챙겨먹을 시간은 충분히 넘쳤다. 베이컨과 스크럼블 에그는 반찬. 된장국과 쌀밥을 함께 먹는 아침밥. 서양 사람이 보면 놀랄까?
문득 유일하게 알고있는 '서양 사람'이 생각났다. 아하, 그러고보면 앤서니는 어떤 아침밥을 먹고 지낼까. 낫토같이 냄새가 강한 건 역시 힘들까. 키득거리곤 티비를 켠다. 예쁘게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 오늘의 날씨를 설명한다. 더없이 좋은 날씨입니다. 한 낮에는 따뜻한 하루가 될테니 멀리 나가보시는 것도 좋을거에요. 빨래는 잘 마르겠습니다. 비소식은 없습니다. 태풍소식도 없습니다. 지진도 쓰나미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행복한 하루일겁니다. 그리고ㅡ
ㅡ그리고. 하뉴 타카히사의 목숨이 아홉 번 남았답니다. 그는 오늘 아침 불행한 오토바이의 사고를 당하여 가족들들은 물론 당신도 모르게 죽을겁니다. 당신의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을 거에요.
티비를 껐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지만 오늘은 빨리 학교에 가고싶었다. 좋은 일들이 시작 될 것 같은 아침이다.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은 부유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구두주걱으로 신발을 깔끔하게 신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도 계속됐다. 그리고 그게 싫진 않았다.
*
삼학년 교실 복도. 삐걱삐걱 하는 소리가 몇번이나 울렸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아, 마침 잘됐다 시라카와!"
"카스가양. 좋은 아침이에요."
시선의 끝에는 그녀가 서있다. 언제나처럼 댄스부의 이른 아침 연습을 끝내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리라.
"좋은 아침 시라카와. 이렇게 일찍 왠일이야?"
"이상하게 학교에 일찍 오고 싶은 기분이라서요."
그게 무슨 기분이야. 너털 웃음을 터트리던 카스가양의 손에 들린 건 작은 쇼핑백이었다.
"자 이거. 아까 호리에랑 교문에서 만났는데 대신 전해달래. 또 돌려줄 타이밍 놓쳤다던게 무슨 말이야?"
"아 이 머플러요? 하하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됐는데. 어쩌다보니 추워서 빌려준게 돌고 돌았어요."
"이게 그렇게 따뜻해?"
"그럼요. 제가 산 머플러 중엔 제일 비쌀거에요."
그래봤자 머플러라는 말을 듣겠지만 사실이다. 캐시미어는 아니어도 제법 비싸고 따뜻한걸 심사숙고 해서 골랐다. 넉넉한 지갑사정이 아니니 이왕 한 번 살 때 좋은 물건을ㅡ
"시라카와?"
"네?"
"뭘 멍하니 있어. 들어가자."
"아 네. 그럼요."
카스가양이 먼저 뒷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 뒤를 따랐다. 제법 추운 아침 교실이다. 우선 차디찬 실내 공기가 제일 문제라고 해야겠지. 가방을 자리에 던저놓고 히터를 최대 온도로 틀자 곧장 따뜻한 바람이 교실 안을 휘젓는다. 알기 쉬운 공기필터 냄새다.
"막상 일찍 와도 할 일은 별로 없지?"
"그러게요. 아 미쿠오가 주번이라 지금쯤은 와야 맞을텐데."
"깜빡 늦잠이라던가?"
그럴만도 하네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흑판 지우개를 든다. 남의 일까지 대신 해 줄 생각은 별로 없지만 하루 정도야 기분이 좋으니 가능하다. 분필가루 가득한 지우개를 털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바깥에서 스치는 인사. 좋은 아침이에요 슌. 좋은 아침이죠 하루미. 마주하고, 있어야 할 장소로 향하는 친구들에게 아침인사를 건네고 자리로 돌아오면, 그런 나를 기다려주는 이들은 또다른 친구들.
"좋은 아침 치히로~"
"미쿠오. 좋은 아침."
수학숙제 좀 비교해보자며 거절을 거절하는 울상인 친구를 거절할 수야 없으니까. 점심시간 캔커피는 명목으로 공책을 내줬고, 그런 사소한 계기로 또다시 시작하는 아침을 실컷 떠들며 보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되면 교실 앞문이 열린다- 그만 떠들고! 아침조회 시작한다. 재깍 앉아라!
"있다 봐. 수업 잘 들어 치히로."
"료지 너도."
작은 눈인사를 주고 받는다. 자리에 착석. 교실은 더이상 춥지 않다. 사람의 온기와 따뜻한 히터 바람에 오히려 조금 졸릴것 같아서 괴씸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조금 잠이 들 것 같아. 오늘 아침에 빨리 일어난 탓일까. 그래도 가끔은 괜찮겠지. 아무 일도 없는 걸.
"다들 자리 앉았지? 아침 조회 시작한다. 하뉴 타카히사의 목숨이 일곱번 남았단다. 갑작스럽게 쓰러졌던 모양이야. 이유는 모르겠고 몰라도 될테니, 신경쓰지 말고 다들 공부에 집중하자. 어차피 남의 일이고 어디서 죽든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잖아."
평소보다 조금 졸린 아침이다.
"딴짓 하지 말고 제대로 좀 들어라! 지각자 누구야? 반장?"
"반장 아까 교무실로 숙제 내러 갔어요. 칠판 안쪽에 써있어요~"
중간에 무슨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런데 나랑은 어차피 상관 없는 일이니까.
연이어 생각이 떠올랐지만 눈꺼풀과 함께 가라앉았다. 졸려서 견딜수가 없었다. 선생님에게 바로 들킬 위치니까 조심해야하는데. 반쯤 졸며 듣는 아침 조회는 따분했다. 그냥 그런 날이다. 대수로울 것 없는 날 말이다.
*
하뉴 타카히사의 목숨이 다섯번 남았답니다. 분명 뭔가 운이 나빴던 거겠죠. 누군가가 실수로 떨어트린 화분에 맞아 정신을 잃었지만 구급차 같이 시끄러운 게 학교로 오진 않을거에요. 그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병원으로 옮겨지고, 병원에서 죽을 테지만 아무도 모르는 상태로도 괜찮아요. 특히 당신은 알아야 할 필요 없어요ㅡ땡,
하고.
오교시의 시작 알림이 이렇게 슬프게 들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거의 반쯤 실신하며 들었던 오전 수업.
1교시 영어, 2교시 고전 문학, 3교시 생물이라는 버틸수가 없는 삼단계를 어떻게 이겨냈지만 결국 4교시의 수학은 필기는 고사하고 듣는 것 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사람의 정신이란 얼마나 이기적인지. 긴 시간의 해방을 의미하는 점심시간의 종이 들렸을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어느새 좋았던 시간도 다 끝이 났네.
도둑잡기에서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던 미쿠오에게 4전 전패를 달성하고 나자, 시라카와 치히로도 사람인지라 일단은 카드를 던지고 와버렸다. 흩날려라 카드패! 얼마 전 다같이 읽었던 모 사신만화의 대사를 읊는 내 입장은 즐거웠지만 정리해야하는 미쿠오쪽은 사색이 되버렸다.
짝 안맞게 되면 어쩌려고-!? 새된 소리를 내지르는 미쿠오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이런. 다음 교시가.
"치히로-... 체육복 안가져왔다고 나한테 빌려달랬지?"
"……음. 미안. 잘못했어 미쿠오. 진짜 미안."
"흩날려라 카드패!!!"
너네 뭐하냐? 어이 없다는 카스가양의 목소리를 베이스로 하얀 카드가 또다시 팔락팔락. 아까 전에 좀 멋있더라. 쿠X키 바쿠야 같았어. 그런 말 하던 미쿠오를 아연질색하며 바라보길 몇 초. 얌전히 이번에는 내가 카드를 줍고 짝을 맞는다. 음. 아무래도 이거 우리 둘 다 강당까지 제시간에 맞춰서 가긴 힘들 거 같지?
"바보 짓 했네."
"이제와서 후회해도 별수 없지. 치히로 GO! 전력질주!"
어차피 내 달리기로는 달려봤자 같은 결과라는걸 아는데도 뛰고 또 뛸 수 밖에 없었다. 옆구리 진짜 아프다. 장난 아니고, 과장 하나도 안 섞고. 달리기는 쥐약이다.
*
마지막 수업은 역사였다. 체육으로 실컷 소화를 시켰다보니 갑자기 지루해진 교과목이 지루해질만도 했지만 졸지는 않았다. 커다란 액정화면에서 나오는 역사 비디오에 집중하게 된건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오늘 공부한 부분은 세계사-아편전쟁 부분까지.
현재까지도 중국이 마약사범에게 극형을 내리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아편으로 인한 문제들이 여럿 발생했기 때문이에요. 이 부분은 시험에 나올테니 체크해두세요. 그리고-커튼콜이 세번 남았어요.
"하뉴 타카히사의 목숨이 세번 남았답니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하뉴 타카히사를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바라던 일이니까. 알았죠?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영상이 꺼졌다. 수업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앗 하는 순간 지나가버린 청소시간동안 쥐고 있던 빗자루를 청소 도구함에 돌려놓고 다시 자리에 앉은 채 인사. 오후 다섯시. 학교 수업이 끝나고 어둠이 내려앉기 전 가장 환하게 석양이 과열되는 순간.
"그럼 부활동 하는 학생들은 너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지 말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상 종례 끝."
또다. 붕뜬 부유감이 밀려온다. 순간 내가 어디에 앉아있는지 완벽하게 방향을 잃은 감각이다. 축을 잃은 세계는 땅과 하늘의 위치가 뒤바뀌며 경천동지, 발을 내딛어서 서있다고 느낀 곳에선 어느새 끝없는 추락 뿐. 이런 기분이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오늘은 완벽한 하루였다. 즐거운 하루였다. 즐거운...
"치히로? 왜 그렇게 멍하게 있어?"
"아…."
"아까부터 전화 와 있어."
미쿠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마 카스가양의 언질이 아니었다면 전화가 온 것 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겠지.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구요. 어딘가 감정없는 변명을 하는 와중에도 전화는 울린다. 어제 약속 한 대로 게임센터에 들렸다가 집까지 같이 가자는 말을 조용히 거절하자 둘은 실망하는 얼굴이었지만 료지는 전화를 받으란 말과 함께 둘을 데리고 나가주었다. 내일. 내일 꼭 가요. 순식간에 혼자 남은 교실에서 어쩐지 안도하고 말았다. 그리고 전화를 보았는데 아.
하뉴.
토할 것 같이 울컥, 하고 감정이 목끝까지 차올랐는데 다시 가라앉았다. 이 이름을 알고 있다. 하뉴. 하뉴 코우세이다. 할아버지의 조직에서 지금 제일 눈에 띈다는. 행동거지도 나무랄 데 없는 녀석이라고, 아직 젊으니 다음 조합장은 무리겠지만 그 다음이라면 노려볼 만 할거라면서. 내게 어떻게 해 보겠냐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확 되살아난다.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에게 대답했었다. 할아버지. 저는….
"…내 것이라고?"
시라카와 치히로.
원하는 만큼 반복 되는 커튼콜.
이 세상의 모든 게 완벽하고,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걸 허락받았다.
이 세계는 너를 위한 것이고 너만을 위하여 끝나지 않는 연극이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는데. 조용하고 비참한 영화의 종막을 예고하던 그 순간을. '그'가 내게 했던 약속같지도 않은 약속을.
- 사라져줄게. 당신 앞에서.
어쩌면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종막은 다가오고 있었다. '집'이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가면 좋은거야. 빼앗겨버렸던 그 저택으로 돌아간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건강해지신 할아버지가 계시는 걸까? 아니. 아니죠.
그래요. 그럴리가 없네요. 왜 당연한걸 잊어버리고 있었는지. 온 세상 천지에서 울려퍼진 목소리를 무시했던건지. '당신'의 힘이라면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도 능히 해냈겠지요. 어쩌면 이 세계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던 저의 부모님도 계시겠네요. 그렇다면 어쩌면 제게는 동생이 생겼을지도 모르죠. 치아키처럼 귀여운 여동생이나, 센처럼 착한 남동생이. 하늘 아래 내 한 몸만을 책임지면 그만이었는데, 이젠 변했겠네요. 누군가를 위해 강해지거나, 더 힘을 낼수도 있겠요. 그렇게…그런식으로 살다보면, 미워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기억속에서 지워버리길 바라 마지않던 상대를 잊어버릴 수도 있었네요.
"하뉴 타카히사의 목숨이 한 번 남았습니다. 시라카와 치히로는 복도로 나와주세요."
딩동뎅, 하고 울리는 종소리에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학교에도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나를 위한 커튼콜 무대니까요.
이 세상에서, 내 눈앞에서 제발 신경도 쓰지 않고 어딘가에서 죽어줬으면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기적이지만, 어쩌면 당신은 치기어린 시절 가볍게 했던 말에 지독한 증오를 샀다고 후회할지언정 상관 없었습니다. 당신의 감정따위 알 바 아니니까. 하지만 당신은 상처입어야 해요. 내 말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내가 하는 말이니까. 나는 당신 때문에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잃은 사람이니까.
적어도 당연히 받아줘야 할 증오라며 감정을 밀어붙인 상대의 이름이 이제는 기억납니다.
그래요. 하뉴 타카히사. 당신은 끝나지 않는 연극속에서, 내가 바라던 대로 인식조차 되지 못한 채 이 세계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죽어갔겠군요.
학교는 무덤처럼 고요했습니다. 그리고 복도에는 드디어 내가 기억해 낸 당신이 서 있습니다. 이 세계에선 내가 결코 몰랐어야 하는 하뉴 타카히사가 서있습니다. 머리가 깨지고 입술은 터진 채, 목과 손에는 붕대와 밴드 천지. 눈은 제대로 뜨고 있는건지. 몇 번을 죽었다가 살아난건지, 혹은 죽기 일보 직전인건지 상처투성이의 몸입니다. 안대가 없는 오른쪽 눈은 나를 가볍게 흘겨본 다음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가리킵니다.
"자 이제 마지막 커튼콜이야. 당신이 바랬던 대로야. 막은 당신이 내리고 싶은거잖아?"
그래요. 편하게 미워하고 싶었습니다.
조디아츠라도 되어준다면 절대 구하지 않았을거에요. 내 알바 아니었을겁니다. 죽든 살든.
부탁이니 죽는다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언젠가 당신과 더이상 만날 일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어도 그저 평온하고 아무렇지 않도록. 그걸 얼마나 바랬는지.
"아, 그렇지만 당신은 나한테 죽어버리라는 말은 하지 않지. 혹시라도 내가 정말 죽으면 곤란하잖아. 착한 시라카와 치히로는 피해자로만 남고 싶은거니까."
하뉴 타카히사는 끄덕입니다. 맞아. 내가 간단히 죽을 리 없단건 모르는 치히로가 아니니까. 짐짓 가벼운 말투와 어조입니다. 죽으라고 했다가 정말 죽으면 이상한 감정이 남아서 싫어하겠지. 그래요. 잘 알고 있네요. 마치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낱낱이 읽힌 것 같아요. 부끄러울 정도로 원하는대로 흘러가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끔찍하게 듣기 싫었던 목소리가 이제는 날카롭게 벼려진 것 마냥 내 가슴을 후벼파더니 이내 날카롭게 나를 긁어대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편하게 말해봐. 어차피 결말은 똑같은 거야. 시끄러워요, 아니면 내 알바 아니에요. 해봤던 말들이니 쉽잖아. 말만 하면 돼. 그럼 네 앞에서 사라질게. 어딘가에서 죽어서 완벽한 연극이 끝나는거야."
"나는……."
"내일 아침에는 또 새로운 커튼콜이 시작되고, 너는 모든 걸 잊어도 그 누구도 책망하지 않아. 너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커튼콜일테니까."
불편한 사람을 세계에서 지워버리고, 원치 않는 기억 또한 시간에 흘려보내고.
완벽하고 예쁘게 세공된 세계에서, 나를 위해 몇번이나 연극의 배우가 다시 돌아와 커튼콜을 펼치는 세계에서,
ㅡ그저 말하면 그만입니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럼 당신은 환하게 웃으며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짓눌린 목소리가 잇사이로 흐느껴나오다가, 간신히 문장이 되었습니다. 단 한번도 당신의 시선을 피해본 적 없었는데, 이번만은 당신을 똑바로 볼 수가 없네요.
당신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몇번이나 나를 위한 커튼콜을 반복했었을테니까. 몇 번을 죽었나요? 내가 당신을 무시하는 동안.
"당신은 왜 그렇게…이곳에서도 내게 잔인한거에요."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을거에요. 그것만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잖아요."
얼마나 바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 할 것 없는 세계. 통장의 잔액과 할아버지의 병원비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가족들이 나를 지탱해줄 수 있고, 그런 가족들이 좋아하는 저택에서 저녁밥과 함께 저를 기다려주는 걸 얼마나 바랬는지. 세상의 가혹함을 원망 한 적은 없지만 가끔은 지쳐서 주저앉은 적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 중 몇가지는 당신 탓이니까, 마음껏 원망 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 잔인했던 만큼 나도 잔인해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일어날게요. 이건 현실이 아니니까.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꿈일테니까.
"이런 걸 바라지 않아요."
일어날게요. 더 이상의 커튼콜은 없어요.
"뭐야."
어느새 당신은 사라졌습니다.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습니다. 눈물을 훔칠 새도 없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언제나처럼 하뉴 타카히사가 서 있었습니다.
"재미없는 놈."
자켓을 걸친 채 장갑을 매만지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멀쩡한 모습으로 내가 원한 모든걸 다 쥔채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껏 원망해도, 그저 묵묵히 나를 외면하던 모습 그대로.
그렇게 꿈 속의 커튼콜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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