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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소원을

예고 #22 우리답지 않게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대화.

'우리답지 않게'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기회.

마지막 기회였다.






*






문을 열고 하뉴 타카히사가 제과실 안에 들어왔을 때, 시구레 치히로는 화들짝 놀랐다.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깨어났을땐 진심으로 하뉴 타카히사에게 그 모습을 들키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어…."

"…무슨 일인가요."



조금 시간이 지나고서야, 하뉴는 '있었냐' 라는 말과 함께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치히로는 처음으로 그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눈 앞의 인물에게만큼은 부시시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달갑잖은 방문이긴 했지만 여기서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 못해서, 치히로 또한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뭐 먹을거라도 있나 싶어서 왔지. 혹시 못 나간 학생인거면…뭐 어쨌든."

"…."



그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도' 라이더부니까. 분명 도와주려고- 라는 말을, 일부러 끝까지 남겨뒀던 거겠지. 학교에서 몇 번 스친 적은 있었지만 딱히 지금의 현상에 관심이 없거나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던걸로 기억한다.



"뭐야. 할말 있어?"

"거긴 냉동고에요."

"…."



하뉴는 얌전히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냉장고를 열어 젖혔다. 하지만 그가 간과 한 것이라면, 제과실에는 냉장고보다 냉동고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이다. 꽝꽝 얼어있는 반죽과 베이킹 파우더를 보고 할말을 잃은 하뉴를 보며 치히로는 한숨 쉬었다. 그리곤 바봅니까. 그렇게 작게 핀잔을 주곤 조리대 아래에 있던 접시를 꺼냈다.




"기다려요. 식은 것 밖엔 없지만 먹을만한 건 있으니까."

"…기분나쁠 정도로 친절하네 너."

"당신이 아니라 모르는 후배들이었어도 이 정도는 합니다."




물론 모르는 후배들에겐 더 친절했겠지. 가령 식은 빵을 전자렌지에 데워준다거나 하는 것도 잊진 않을테지만 상대는 하뉴니까 그 정도의 호의는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치히로는 조금 어색하게 머핀이 올려진 접시를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올려둔 후 하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구레 치히로가 라이더부에 들어와서 하뉴 타카히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얼굴을 마주 할 일은 대단히 적었다. 있다고 해도 별로 서로가 서로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 적 또한 없었고 말이다. 

ㅡ데면데면하게. 

쭉 그렇게 살고 지내다 졸업하게 될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이런 식으로 학교에 갖혀버린데다 딱 마주치게 되는 건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치히로는 테이블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라이더부에 가져다둔 마카롱을 만들고 난 후 뒷정리도 하기 전에 피곤해서 눈을 붙인 터였다. 그리고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뒷정리를 안 해두길 잘했다. 할 일이 없어서 어색하게 하뉴가 머핀 먹는 모습을 보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도구를 정리하며 들리는 작은 소음만이 제과실을 메웠다.




"라이더부실에 있지 여기선 뭐했는데. 춥잖아. 여기."

"마카롱을 좀 만들었을 뿐입니다. 일단 재료도 많이 있고, 슬슬 먹을 게 떨어지면 곤란하니까요."

"의외네. 나랑 마주치기 싫어서 인줄 알았더니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작 말을 던진 하뉴 타카히사는 아무 생각도 없어보였지만 가만히 듣고 넘길 수 없는 말이다. 하긴 저 남자가 언제는 줏대를 가지고 이야기 하던 사람이었던가. 쓴웃음이 터졌지만 얼굴도 웃고 있을까. 아마 아니겠지. 

시구레 치히로는 하뉴 타카히사의 앞에서 분노를 감추며 태연하게 웃을 자신은 없다. 아마도 평생.




"ㅡ자의식 과잉이에요. 모든 게 당신 위주로 돌아가진 않습니다. 멋대로 착각 하지 말아요."

"……."




머핀을 입안으로 우겨넣던 하뉴의 손이 잠시 멈췄지만, 치히로는 신경쓰지 않았다.

하뉴 타카히사 때문에 '라이더부'에 들어가거나 부실에 들어가는데 한번도 망설임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노력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추억이 쌓인 저택, 소중하게 물려받은 이름.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러니이 이상은 하뉴 타카히사에게 무언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라이더부라는 기회마저 빼앗길 가능성을 인정하기 싫었다.


ㅡ계속 입 다물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하뉴 타카히사의 입이 열렸다. 




"당신 말이야. 의외로 나한테는 꽤 야멸찬 말, 참 잘한단 말이야."

"……."

"나는 상처받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나보지?"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치히로는 들고있던 스탠볼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눈빛이 얽혔다. 태연한 목소리 만큼이나 차분한 목소리. ㅡ도발이 아닌, 그저 순수하게 진심을 토로하는 말.




"…제 말이 듣기 싫었단 겁니까."

"아니. 딱히 상처받았다고 하는 소리는 아냐. 뭐 당신만 그러는 건 아니니까. "




치히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후련해하잖아. 나도 그렇고. 그런 말을 하는 하뉴에게서는 비웃거나 이죽거리는 기색은 없었다. 




"ㅡ다만 당신은 모를걸. 누군가한테 미움 받을 때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지. 그런 거랑은 앞으로도 관계 없는 인생을 살테니까 죽을 때 까지 이런 감각은 모르겠지."




중얼거리며 하뉴 타카히사는 부스러기를 손으로 털어냈다. 그리고 아주 잠시 눈을 감더니 피할 수도 없게 시구레 치히로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던졌다.




"내가 마음에 안 들지? 어디가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지? 눈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 이상으로 괴로웠으면 좋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알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숨을 내쉬며 짧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 든다.




"그런데 말야, 당신은 생각 해 본적 없어? ㅡ그런 생각을 그냥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는 내 심정을 상상 해 본적은 있어?"




처음으로 시구레 치히로의 말문이 틀어막혔다. 자수정과 닮은 눈동자가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하고, 딱 한번. 

역지사지를 묻는 그 말에 혀가 뽑힌 것 마냥 입이 굳어버렸다.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도 들더라. 내가 조디아츠라도 되었으면 당신은 편하게 날 미워했겠네 하고. 그것도 그래, 나쁘진 않았으려나. 마음 놓고 적 취급이라도 할 수 있었겠어. 안 그래?"

"……."

"그것 봐. 부정하지 않지."




피식, 하고. 그저 평소처럼 터트린 웃음이다. 그러나 하뉴 타카히사가 터트린 그 작은 헛웃음은 송곳이 되어 시구레 치히로를 찔렀다. 

관 끝에 박아넣는 말뚝처럼, 돌이 킬 수 없는 마지막 못질이다. 




"그래서?"




마지막 말뚝을 때려 박은 건 누구일까. 적어도 망치는 우리 둘 모두가 쥐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거기까지 널 배려해서 말해달라는 거야?"

"……."

"웃기지마.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해? 무슨 얼굴로, 어떤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는건데."




장갑을 껴도 손가락끝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하는 냉기와도 닮은 분노였다. 다만 근원지는 머리부터였다.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고 빠르게 분노는 감정을 잠식했다. 눈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ㅡ그러는 너는 한 번이라도 생각 해 본 적 있었어? 내 기분을, 내 말을 상상하면서 말 해본적은 있었어?!"




어떻게 감히.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해. 가장 잔인하게 내 소중한 모든것을 짓밟는 말을 무심하게 했으면서.



ㅡ그럼 빨리 죽어버리면 되겠네. 저 영감이 뒈지면, 형이 더 편해진다 그거잖아

형의 말은 무시하고 그냥 여기서 살지 그래?



시구레 치히로는 몇번이나 생각했었다. 첫번째 단추가 잘못 끼워졌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것과 없을 것에 관하여.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지 고민했지만 매번 같은 답에 도달했었기에 원망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용서 할 수 없는 일. 빼앗긴 저택. 이름. 없던 일로 치부할 수 없다면, 원망도 미움도 멈출 수 없다. 그저 언젠가 다른 감정들로 덮어버릴 수 있게 되는 날 까지는 쭉 이대로일거라 생각하며 혼자 견뎌낸 날들.



"너한테 야멸찬 말을 잘 한다고? 네 기분을 생각 해 본적은 없냐고? 몰라 그런거. 관심도 없어 난. 내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건데! ㅡ네가 했던거랑 똑같잖아. 나한테 했던 말들, 내 기분따위 무시했던 행동들. 전부 똑같이 돌려준 것 뿐이야. 왜 그걸 생각 못하는데?!"



다만, 비밀은 있다. 하뉴 타카히사를 미워하는 것도 때로는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ㅡ말하지 않았다. 계속 이대로 미워할수 있도록.

누군가를 미워하며 마음을 소모하는 것은 자기 심장을 조금씩 갉아먹는 사마귀를 기르는 것과 똑같다. 언젠가는 잊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남을 계속 미워하는 기분은 결코 좋다곤 할 수 없어. 차라리 언젠간 용서를 해버리면 편하지 않을까요. 아니, 하지만 그래도 역시 용서하고 싶지는 않아요. 

털실로 짠 공마냥 굴러다니는 시구레 치히로의 마음이 실밥이 틑어지다 못해 흩어질것만 같았다는 건- 결코 하뉴 타카히사에게 밝힌 적 없는 비밀이었다.

 



"그래. 자업자득이란거겠지."

"……."

"어차피 기대 한 적은 없어. 이상하게 당신이랑은 마주칠 때마다 이런 느낌이네. 대화다운 대화가 되질 않았잖아."

"그래요. 언제나 이래요. 항상 이랬었잖아요."



언젠가 우리답지 않아질 날들이 올까. 십년 후, 이십년 후. 라이더부 동창회 모임이라도 열릴 때. 그 때도 시구레 치히로가 하뉴 타카히사를 미워하고 있을런지. 아니 오히려 그때쯤은 자수성가해서 할아버지의 대를 잇지 않은 것에 내심 감사라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니 당신과 나의 관계도 조금쯤은 우리답지 않아질런지 생각했지만 역시 알 수 없다.


모르겠습니다.




"지치네 정말."




모르겠어, 정말. 단 한톨도 모르겠어. 아무것도. 




"머핀값만큼만 알려줄게 그러면."

"……."

"어차피 당신이 먼저 졸업해서 이 학교를 떠나겠지만, 언제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도 장담해줄게."





시선을 떨군 시구레 치히로는 보지 못했다. 하뉴 타카히사가,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음을. 

이렇게 앞으로도 평생 알 수 없겠지. 두 사람 다운 마지막 대화의 기회는 이렇게 언제나처럼, 그들 답게 끝나고 말았으니까.

만약 '언제나처럼'의 방식이 아니었다면 알 수도 있는 것 또한 있었다. 예를 들면ㅡ하뉴 타카히사는 시구레 치히로를 거북해할지언정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혹은 여전히 어떤 점에서 시구레 치히로를 화나게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퉁명스런 말투 때문에 오해를 산 것 뿐 악의는 없었다는ㅡ 그런, 어떤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하는 것 만으로도 제법 중요해질 사실들은 또다시 묻히고 만다. 




"그렇게 간절하게 바란다면 누군가는 응해줘야할테니까. 본적 없었던 사람처럼 아주 깨끗하게. 언제든, 어떤 방식이든."




묻혀진 사실 뒤에 남겨진 것은 한가지.




"사라져줄게. 당신 앞에서."




조용하고 비참한 영화의 종막을 예고하는 듯한 한 마디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