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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장미의 저주 03


#03. 흑단나무 문 저편



“자. 저 문이야.”


이젠 더 이상 올라 갈 곳이 없는 장소였다. 저택의 삼층에는 오로지 하나의 문만이 있었다. 까만 문. 흑단나무 문은 기분 나쁠 정도로 새까맸다. 

더 이상은 말 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녀는 그런 눈으로 청연을 응시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편백나무 문 저편에서는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을 보았다. 삼나무 문 저편에서는 지금껏 가졌던 것을 보았지. 그러면 저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 ... ... ...


또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멀어지다가도 가까워지고, 근처에 있는 것 같다가도 영원히 닿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그래서인가. 나는 대답 할 수가 없어. 왜 부르는 이의 목소리가 전부 들리지 않는 거지. 누구의 목소리인 지 알 수가 없는데? 여기로 와서 제대로 불러 보라고. 여기는 그러니까ㅡ


아. 그래. 이곳은 장미의 저택. 왜 잊고 있었을까. 내가 오래토록 바래왔던 불멸의 장소. 끝없이 쫓아올 환멸에서 도망칠 수 있는 삶의 감옥. 말하자면 이 곳은 무균실에 가깝다. 평범하게 사람은 살아 갈 수 없는, 병든 자가 도달하는 장소인 셈이다. 그래서 목소리의 주인은 다가올 수 없는건가?

기대감에 찬 독고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짐짓 차분했지만, 아까 전 보다는 옥타브가 조금 높았다.


“참고로 말하면 지금까지 그 문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째서?”

“대부분 자기가 가질 것, 가진 걸 깨닫고 나면 불멸의 삶을 포기하거든.”

“인간은 욕심쟁이니까. 난 아니지만.”


청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분명 이 저택에 처음 발걸음을 했을때 말했다. 불멸은 네가 포기 할 수 있는 것에 달려있다고 했지. 어떤 사람들이 이 저택에 걸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흑단나무 문 앞까지 도달한 사람이 없다는 건 결국 사람의 길을 포기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된다.


내가 되겠지. 모든 걸 포기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럼 당신은?”


문득 치켜든 궁금증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청연의 질문에 곧 그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불멸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불했을까. 무엇을 위해서 이 불멸의 삶을 택했을까. 


“나는 너와 달라. 포기 할 수 없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이 불멸을 포기해선 안됐지.”

“당신의 이름을 부른 그 남자인가?”

“... ...너의 불멸은 네 선택이지만, 내 불멸은 너와 달라. 선택이 아냐.”


그녀는 한 번 눈을 감았다. 오래 전의 추억을 되살리고 훑는 것일까. 곧 반짝이는 까만 눈을 덮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을 뜬 그녀의 표정조차 보이지 않고 흑단나무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연은 그 이상 묻길 그만 두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문고리는 차가웠다. 청연의 심장은 이 저택에 온 이후로 가장 빠르게 뛰었다. 따라붙는 그녀의 시선과 청연의 시선이 얽혔고, 곧 두 사람은 동시에 웃어보였다. 둥글게 말아 쥔 손잡이를 민다. 문은 퍽 무거웠지만, 결국 열렸다.








그곳은 장미의 저택에서도 가장 깊은 곳.

너무도 깊이 사랑했던 상대를 잃고, 홀로 잠든 흑장미의 슬픔만이 남겨진 장소.

청연은 그 곳으로 떨어졌다.






-

-







방 안으로 들어섰음에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얀 공간은 고요하다 못해 텅 비어있었다. 애초에 이상하긴 했지만, 이건 정말로 이상했다. 지금까지 문 저편에서 청연을 기다리고 있었던건 하나같이 불멸을 댓가로 지불할 ‘무언가’의 기억이었다. 앞으로도 가질 수 있을 친우와의 기억이나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누님과의 인연. 하지만 이 방에는 아무것도 없다. 


막연히 기다리던 청연은 곧 초조해졌다. 댓가로 지불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불멸은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기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갈까. 잠깐 고민했지만 청연은 마음은 고쳐먹고 침착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 단순한 행동과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마치 겹쳐진 책장 페이지를 넘긴 것 처럼 찜찜했다. 연결되지 않은 문장들을 보며 위화감을 느끼며 도로 페이지를 확인 해 보는 느낌. 178. 179. 와야 하는 180이 아닌 182 페이지를 읽게 된 기분. 끝까지 따라붙는 기시감이 있다.


하지만 결국 기분 일 뿐이니까. 청연은 몇 번 고개를 도리질치고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 가 보아도 방 안에는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오로지 하얀 공간일 뿐. 이건 아래층과 똑같아. 하지만 빛망울은 없었다. 청연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리지도, 독고 아가씨의 오래된 추억과 편린을 그려내지도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공간에서 청연은 흑단나무 문의 위치를 확인 한 다음 반대편으로 쭉 걸어나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흑단나무 문이 까만 점이 될 정도로 걸었던 것 같다. 슬슬 왼다리와 왼팔이 지독하게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청연은 동화책을 한 권 발견했다. 

장미의 저주라고 적힌 낡은 갈색 표지.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있는 동화책을 청연은 생각 없이 주워서 손에 쥐었다. 조금 먼지가 쌓인 책을 툭툭 턴 청연은 요리조리 살펴보다 동화책을 펼쳤다.


동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ㅡ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붉은 장미가 아름답게 피는 저택에서 연인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매 해 여름마다 장미를 가꾸며 살았던 행복한 기억도 잠시. 

그녀의 연인은 곧 목숨을 다하고, 여인은 슬픔에 잠긴 채 저택에 홀로 남았습니다. 


연인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녀는 곧 삶의 의지를 잃었지만... 남겨진 이가 걱정이었을까요. 

연인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당신과 함께 본 여름 장미를 잊고 싶지 않소. 부디 여름마다 피는 장미를 돌봐주시오. 

연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남겨진 그녀는 슬픔에 잠긴 채였지만 차마 연인을 따라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활짝 핀 장미 한 송이를 꺾은 후 저택에 마법을 걸었습니다. 


처음 피는 여름 장미와 함께 잠에서 깨어나, 마지막에 지는 여름 장미와 함께 잠드는 마법. 


그녀가 꺾은 붉은 장미가 수많은 여름을 보내며 시들어버릴 때 까지 계속될 마법... 혹은 저주. 

장미는 그녀와 연인이 사랑했다는 증거. 매 해 여름에만 열리는 저택문으로 찾아올 자를 기다리는 저주는 지금도 새로운 장미를 여름마다 피우며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장미를 돌봐줄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동화책을 끝까지 읽은 청연은 묘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독고 아가씨의 단편적이었던 기억을 엿봤던 것과는 또 다른데. 짧은 동화였지만, 우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의 연인은 이제 이 세상이 없다. 아마 오래 전 죽은 거겠지. 

사랑하는 연인을 과거에 두고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여자인가. 까만 면사포라도 써 줬다면 알기 쉬웠을 텐데. 일단은 그녀가 장례를 치르는 사람처럼 차려입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으나 이 기억을 봤으니 대략적이나마 전후사정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연인은 죽었고, 아마도 장미를 지켜달라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 저택에 남은 거겠지. 


하지만 이 동화는 그녀의 무엇이 형상화 된 걸까. 


직접 묻는 게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청연은 뒤를 돌아 문을 향해 걸었다. 걷는 동안에도 딱히 청연의 기억이 흘러나오거나 빛망울이 생겨나진 않았다. 흑단나무 문을 향해 뚜벅 뚜벅, 뚜벅 뚜벅 걷는 걸음 소리는 똑똑하게 울려퍼졌다. 그래. 분명히 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것이 아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 아, 조금 늦은 건가?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청연은 뒤를 돌았다가 깨달았다. 

잠깐만, 내 그림자가 이렇게 길었던가? 태양빛이 날 어디에서 빛추고 있는거지? 한도 끝도 없이 늘어져있는 그림자를 시선이 쫓는다. 멀고 먼, 저편으로 이어진 그림자의 끝.


조금 떨어진 거리. 그 곳에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공이 서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웃고 있었다. 수국이기도 하고 라일락이기도 한 머리카락으로, 푸른 하늘이기도 하고 호수이기도 한 새파란 눈동자로. 오롯이 그 자리에 서서 청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청연의 발치에서 시작된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와 맞닿아져 있었다. 그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청연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멀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였다.

그냥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청연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방에서 어떤 기억도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기가 무섭게 청연은 곧장 뒤를 돌아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ㅡ이런 젠장!!”


중얼거린 것도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정신없이 달음박질쳤지만 출구는 너무 멀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분명 몇 발자국 걸어서 들어온게 전부였는데, 어느새 출구가 이토록 멀어지고 말았다. 하얀 방은 끝이 없었고 출구는 눈 앞인데도 평지에서 머나먼 곳을 바라보듯, 뛰어도 뛰어도 가까워지질 않는다. 


태어나서 그렇게 정신 없이 뛰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숨이 턱 끝 까지 찼고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목소리를 너무 많이 무시했다. 미안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왜냐면. 왜냐면.


- ... ... 연... ...


이젠 조금씩 기억 난다. 정확하게는, 조각 나서 기워졌던 기억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한번 자각하기 시작하자 무섭게 ‘현실’과의 거리는 좁혀진다. 조금씩이지만 흑단나무 문은 청연과 가까워졌다. 머리가 핑 돈다. 왼 팔 끝이 타들어가듯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이 멈추기를 바라는 것 과는 반대로, 정신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생생했다. 뜀박질과 함께 뒤따라 오는 그림자가 얼핏 시야에 스치자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편백나무 문 저편, 삼나무 문 저편은 그토록 하얀 공간이었는데, 단 한점의 그림자도 청연에게 따라붙질 않았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네 그림자보다 가까이에 있고 싶었던 것 처럼, 나는 너도 그래줬으면 해서. 그래서 어느 날 부터 난 그림자를 볼 때 마다 널 떠올렸지. 


이 곳은 그런 장소였던 것이다. 장미를 돌봐줄 사람을 위해, 그림자조차 지워버리는 곳.

청연은 흑단나무 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몸을 부딪치다 시피 하며 그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쾅 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자, 그녀를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녀. 장미의 마녀, 독고 윤은 난간을 으스러트릴 듯 세게 쥔 채로 청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길을 담은 검은 눈빛이 먹잇감을 물어 뜯기 직전의 맹수처럼 빛나는 기세였다. 차분한 미망인 같았던 자태는 온데간데 없었다.


“계량이 끝났어. 드디어 찾았네.”

“...하아...하... ...”

“얼마 쯤 되는지 물어보지 않아? 말 해줄게. 아니, 넌 들어야 해.”


청연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더 빨랐다.


“이거야. 여태껏 계량 했던 것 보다 몇 배는 오랜 시간. 네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약속.”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숨을 잔뜩 몰아쉬는 청연의 발 밑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불꽃 두개가 곧 둥근 선을 그리며 바닥에 까만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건 숫자가 아니었다. 리본 같은 기호였다. 뫼비우스의 띠같기도 쌍 고리의 흔적이 의미하는 것. 숫자를 넘어선 기호. 


무한대. Infinity.


“네가 본거야. 네가 선택 한 거라고! 흑단나무 문 저편에서, 봤잖아? ㅡ네가 결코 잃을 수 없는 것.”


청연은 얼굴에서 웃음이 모조리 사라지는 걸 느꼈다. 반대로, 그녀의 표정은 더 없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던 사람마냥 기뻐하는 모습에는 한 점의 연기나 거짓이 섞여있지 않았다. 벅차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 표정. 


“찾았어. 찾았어, 찾았어, 드디어. 난 자유야. 이제 해방이야. 이제 이걸로 저 장미들과 안녕이야. 그를 만나러 갈 수 있어.”


기뻐하는 목소리와 들뜬 어조. 붉은 홍조를 띄운 모습. 환희에 가득 찬 모습이었지만 청연에게는 이제 그녀가 다르게 비춰졌다. 


미친 여자다. 

말라비틀어진 흑장미를 끌어안고 조용히 죽어갈.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몸부림 치던 것을 멈추고 청연에게 다가왔다. 흥분한 기세가 역력하다 못해 광기마저 느껴지는 언행에 청연은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진 기분이 이런 건가. 도망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공포.


“ㅡ자, 나와 바꾸자. 다음 장미 저택의 주인은 너야. 여름마다 필 장미들을 나 대신 영원히 돌봐 줘. 그러기 위한 불멸이야.”

“아니, 딱 잘라 거절하겠어.”


제가 듣기에도 퍽 냉정한 목소리였다. 아마 이 저택에 들어와 그녀에게 건넨 말 중 가장 차갑게 자른 목소리였으리라.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녀의 기백에 밀린다면 그 때야말로 두 번 다시 돌이킬수 없을테니까. 

숨을 고른 청연은 냉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진심을 읽었던 걸까. 여태까지 어쩔 줄 모르던 그녀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청연의 손목을 낚아 챘다.


“놓칠 줄 알고?”


우악스럽게 청연의 팔목을 잡은 그녀의 독기가 무시무시했다. 표독스러운 기세로 팔목을 쥔 손톱 끝이 당장이라도 피부를 찢어버릴 만큼 아팠다. 그러나 청연은 내색하지 않았다. 가능했다면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의 발목을 잘라버렸겠지. 아주 기쁘게, 웃으면서. 


“절대 놓치지 않아. 못 가. 내 불멸을 해방시켜줘. 그의 곁으로 가고 싶어. 넌 그렇게 해줄 수 있잖아.”


확실히. 청연은 그렇게 중얼거린 후 하며 독고 아가씨의 시선을 전부 받아냈다. 

그녀에게 불멸이란 선택이 아니라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이 불멸을 포기 해선 안됐다고. 그 말을 반대로 이용해본다면, 청연은 이 기회를, 불멸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단 한사람을 위해서.


“작별 인사를 남길 시간이 필요해? 그렇다면 이 여름동안 다녀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돌아와.”

“아니. 기다릴 필요도, 찾아 올 필요도 없어. 난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테니까.”

“네가 평생 쫓아왔던 건데도?”

“...그래.”


밝혀서는 안된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저주를 이어받고 싶다. 여름마다 피는 장미를 한가득 끌어안아 피투성이가 되는 삶이라도 괜찮다. 귀찮은 과거를 던져버리고 푹 잠들고 싶다. 그 열망을 감히 부정 할 수 없다. 부정했다면 여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품어왔던 열망 만큼이나 부정 할 수 없는 게 있다. 

그녀의 슬픔 만큼이나 깊은 장소에서 발견한 것. 청연에게도 포기 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나는 그 저주를 해방 시켜 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거든.”


기억은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기억 속, 가장 마지막 출동은 대단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던 너의 표정. 같은 팀이니까 괜찮지 않겠냐며 두루마기를 걸치더니 함께 기숙사를 나섰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몰랐다. 지금 내가, 이 저택에 발을 들여놓게 될 줄이야.


청연은 이제 분명하게 느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회는 진짜였다. 그러니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만의 하나 네가 나를 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이 기회를 놓친 걸 후회 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 때는 모든 게 다 늦어버렸을 거다.


-... ...! ...연...


그래도.

그래도 포기한다. 포기 해야만 한다.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저를 돌아보게 만드는 목소리. 자그만치 15년의 열망을 실현 시켜 줄 여인이 눈 앞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빠져 나가지 않는다면 불멸의 삶을 사는 내내 의문에 쫓겨 살겠지.


누군가 나를 이 장미의 저택에서 꺼내 줄 수 있나?

누군가 내가 세상으로 나가도 괜찮겠다는 확신을 줄 수 있나?


잘 모르겠다고. 아무것도 모 르겠다고. 그런데 왜 이 목소리는 끝없이 날 쫓아오지? 나는 왜, 대체 어째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하고 이곳에 왔던 걸까. 

아마 영겁의 시간동안 그런 의문에 시달린 채 잠들다 일어나길 반복 했겠지. 


청연은 이제야, 이것이 장미의 '계약'이 아닌 '저주'인 이유를 알았다. 


장미의 저주. 가진 것을 모조리 토해놓고 그저 죽은 사람처럼 잠에 드는 삶.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원한다면 죽을 수야 있겠지만 죽을 이유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지독하게 느린 시간을 이 저택에 갇힌 채 잠을 자며 보내는 게 저주의 실체다. 모든 건 장미를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긴 연인과, 그를 너무 깊이 사랑했던 흑장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독고 아가씨. 해방은 없어. 미안하지만 난 가야겠어.”

“.........안 돼.”

“당신의 욕심은 당신 스스로가 채우도록 해. 사람은 보통 그렇게 하거든. 마녀인 당신은 모르겠지만.”

"안 돼, 이제와서 보내 줄 순 없어!!"

"사정은 안됐지만, 뭐 내가 이런 남자라서. 욕심으로 치면 만만치가 않은 사람이거든 나도."


청연은 참을 수 없는 조소를 흘렸다. 더 이상은 말 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그녀에게 등을 돌려 쏜살같이 뛰었다. 계단을 점프하듯 세네개씩 내려간다. 이 단순한 행동 조차도 시간이 아깝다. 

어서 가야했다. 편백나무 문 저편에서 52년의 수명과 맞바꾼 왼쪽 다리는 이미 지독히도 아팠다. 왼팔? 삼나무 문 저편에서 아까울 것 없다며 2년이란 수명에 내다 버리듯 맞바꾸지 않았던가.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자업자득이지. 그리고 이제, 영겁의 시간과 맞바꾸려 한 왼쪽 눈의 시야가 가물가물 하다. 이건 분명한 위험신호다. 시간을 얼마나 소모 한 거지? 빌어먹을. ‘현실’의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 있길래. 확실히 굉장한 저주잖아. ‘시간’과 ‘공간’을 모조리 초월해서, 현실의 내가 불멸이 가장 절박한 순간 찾아오다니.

악에 받힌 목소리가 청연의 뒤에서 퍼부어졌다.


“찾아 갈 거야. 찾아 갈 거야! 그 표식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 계속, 이 여름 내내 계속!!”

“그러시던가.”

“놔 주지 않을 거야!!!!”

“그럼 끝까지 뿌리쳐주지.”


현실의 내게, 그리고 너에게 무슨 일이 있길래 이 여인은 내 정신을 침식하고 있지?


- ... ...연... ... ...ㅡ! ..., ...


답답한 확성기에 가려진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처음보다는 이제 확실하고 분명하게 들린다. 청연은 목소리를 정신 없이 쫓아서 뛰었다.

목소리 곁, 저택의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환멸의 삶. 나이를 먹으며 사람의 삶을 겪어야 하는 진리. 내내 피하고 싶어 도망치고 비웃었던 것들 뿐.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흑단나무 문 저편에서 보고 말았으니까. 내가 결코 잃을 수 없는 걸.


그러니까 기다려.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유환.


청연은 장미의 저택의 아래층으로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문을 걷어찼다. 연, 청연, 청연. 청연. 부르는 목소리가 몇번이고 들린다. 독고 아가씨의 목소리? 아니다. 이건 네 목소리야. 시계 초침소리가 들리고 시야가 난폭하게 일그러졌다. 불 속으로 뛰어든 불나방 같았다. 비웃기가 무섭게 절벽에서 수십바퀴를 구르며 떨어지는 감각. 반고리관을 터트리기라도 한 것 마냥 귀가 아프고 빙글빙글 돌다가 멈춘 시야가 정신 사납다. 머리가, 눈이 아팠다. 코가 꽉 막혔음에도 피냄새가 났다. 며칠 동안 물 한모금 안 마신 사람처럼 목이 타서 쇳소리가 새어나온다. 청연. 부르는 목소리는 끝이 없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부른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른다는 걸 아주 잘 알겠어. 하지만 대답하질 못했다. 대답 할 수가 없는 이유는,


“........................청연!!!!!!!!!!”


ㅡ건물이, 눈 앞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갈려나간 아스팔트 조각이 까끌하게 등짝을 쓸었다. 한바탕 지나간 먼지바람이 폭풍 같았다. 피 냄새 속에 섞인, 희미하지만 매케한 연기 냄새. 거대한 건물의 그림자가 이미 절반 이상 청연을 덮고 있었다. 코끼리 앞의 개미처럼 압도적인 질량. 너덜너덜한 몸으론 감히 피할 수 없었다. 순리대로라면 이대로 사지가 짓이겨져서 압사했을텐데.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에게는 기적의 힘으로 불리는 발현능력, 아마도 염동력 발현자의 힘이다. 비명 소리가 오른쪽 귀를 강타했다. 발밑이 무너지는 현장 안에 있는 민간인의 울부짖음이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들린다. 염동력만으로 지탱하고 있는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 아래에서 청연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


쿵 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 마냥 몸이 들썩였다. 정신이 들기가 무섭게, 끝없는 어둠 속에서 추락했던 몸이 만갈래로 찢긴 것 같은 고통이 뒤따랐다. 왼팔과 왼다리가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뭣보다 왼쪽 눈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기침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 피를 한바탕 토해냈다. 붉고 흐린 시야. 누군가가 뇌 안쪽을 뾰족한 칼로 파내는 것 같다. 정신을, 얼마나 잃고 있었던거지? 혼란스러운 현장 속에서 청연은 오른손을 허우적거렸다. 유환이 그 손을 잡았다.


“청연, ㅡ!... ...멎었어, 전원 들어 와!!!”

“... ...”


청연은 곧 멎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사방에서 휘몰아쳤던 꽃폭풍이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고 한바탕 주변을 녹여대고 있었다. 산성과 독성. 살을 태우고 피조차 녹여버리는 이 능력 때문에 꽃폭풍이 몰아칠 때는 형제들은 물론 가족조차 근처에 오지 않았는데. 

시야가 어지럽긴 했지만 유환은 분명 제 옆에 있었다. 하지만 청연이 정신을 놓은 동안에도 발동 되었던 꽃폭풍의 여파로, 유환의 몸 이곳저곳이 짓물린채 살갗이 타올라있었다. 왜 피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대답은 이미 뻔했다. 네가 정신을 잃은 나를 두고 현장에서 물러났을 리가 없다. 오히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에서 끝까지 지킬 생각이었겠지.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다른 요원들은 감히 들어오질 못했던 거다. 그리고 그 동안 계속 불렀던 거였어. 내 이름을.

 

꽃폭풍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오른쪽 귀에 꽂아둔 인이어에서 곧 부산스러운 지시가 뒤따랐다. 알파와 베타, 감마팀, 의료팀까지. 전원의 출동이 얼마만이었던가. 청연은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곧 고통에 생각을 멈췄다. 시야 안으로 들어온 유환의 얼굴이 심상찮게 일그러져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자네가. 내가 이 현실로 돌아왔는데.


“유환...”

“청연... ...이대로 있어. 다시 정신 잃으면 안돼... 제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표정이 이름을 부르자 더욱 일그러진다. 울고 있는 건가ㅡ 아니구나. 아마도 울기 직전에 가깝다. 그게 무슨 얼굴이냐며 말을 걸 힘조차 없었다. 이대로 끝일까봐. 그렇게 중얼거린 유환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너와 만난지 삼 년.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평소처럼 볼을 쓰다듬으며 위로해주기엔 팔과 다리가 지독하게 아팠고, 정신을 잃고 있었던 동안 폭주했던 능력 탓에 기력이 바닥이었다. 능력의 과한 사용으로 눈을 파내는 고통이 뒤따랐다. 꽃폭풍은 멈췄지만 마물은 여전히 기세가 무서웠다. 아니, 꽃폭풍 때문에 더욱 흉폭해 진 것 같았다.


“지금...”

“가만히 있어 제발, 제발... 의료팀이 금방 올 거니까... 여기, 이대로. 알았지. 제발...”


청연은 간신히 고개를 움직인 순간이었다. 까만 물체가 휙 하고 청연과 유환의 머리 위로 스쳤다. 마물의 꼬리 부분이었다. 아까부터 무식할 정도로 땅을 울린 것도, 청연의 몸과 두개골을 정통으로 후려쳤던 것도 저것이었다. 꼬리에 맞아서 수미터를 날아간 청연은 건물 잔해에 머리를 부딪쳤고, 그 충격에 능력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아마 오늘 이 현장에서 유환이 없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멈추지 못한 꽃폭풍, 부서진 팔다리에. 뇌진탕. 죽지 않았다고 해도 받아들였겠지. 그 불멸의 유혹을. 이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침식해 온 장미의 저주를 택했을 것이다. 이 꽃폭풍 속에서 끝까지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을테니까. 

울음 소리가 들렸다. 어느 감마팀 요원이 본체로 돌아 간 것일까. 마물은 청연을 후려치고 정신을 잃게 만든 동안 몸집을 십수 배는 더 크게 불린 상태였다. 고통 때문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거나, 하다못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둘 다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움직일 힘이 하나도 없는 자신을 지키듯 앞으로 유환이 섰다. 두루마기가 펄럭이기가 무섭게 유환의 손에서 까만 그림자가 형태를 갖췄다. 평소 구현하던 검이나 투창도, 속박하는 형태도 아니었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예리한 곡선. 그림자 칼날. 


곧 유환이 구현한 그림자 칼날이 대각선으로 마물을 베어냈다. 커다란 몸집 만큼이나 베어 낼 면적은 충분했다. 다만 지독하게 빠른 재생이었다. 십오미터는 되어 보이는 도마뱀 형상을 한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금 지면을 박찼다. 그러나 유환의 칼날은 이미 모든 구현이 끝나있었다. 십수개의 칼날들이 마물을 조각냈고, 그 때마다 마물은 재생 되기를 반복됐다. 인이어 속에서 베타팀은 화재의 진압 소식을 알렸고, 곧 베타팀으로 추정되는 발현자가 유환의 뒤를 따라 마물에게 화염을 휘둘렀다. 


청연이 볼 수 있는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정신이 또렷해 질 수록 고통으로 사고가 멈춘다. 죽음에게 버선발로 달려 갈 정도의 고통이었다. 실낱 같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긴 했지만 점점 숨이 느려진다.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만약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눈을 뜨지 못한다면. 


잇사이로 숨이 흘러나온다. 왼쪽 손목이 불꽃을 심어 둔 것 처럼 뜨거웠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환에게는 얼버무렸지만, 일주일 전 기억이 혼란스러웠을 때부터 손목에 새겨져 있었던 장미모양의 문신. 스페치아는 저주라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저주인지까지는 식별 해 내지 못했다. 이제는 설명 해 줄 수 있을텐데. 전부 말 할수 있는데. 


네게 말 해 줄 수 있을까. 그 때까지 버틸 수 있나. 멍해지는 머리는 사고를 거부한다. 너에 대한 것도, 나에 대한 것도 점점 잊게 될 만큼 아팠다. 너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다. 오직 그 일념만으로 버텼지만, 그저 아픔을 견디기만 하는 시간이 지독했고 느렸다. 이제 안 되겠구나. 어렴풋이 마지막 인사를 했어야 했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불쑥 하고 시야 안으로 붉은 색채가 끼어들었다. 사람이라는 걸 깨달기가 무섭게 그녀는 힘없이 늘어트리고 있던 청연의 팔위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Yesterday once more>”

“.........”

“괜찮아요. 살 수 있어. 여기는 베타팀 시월입니다. 심령 수술(psycho operation)이 가능한 능력자와 힐러들 섭외 해 주세요. 서포터즈, 여기로!!”


곧 달려온 사람 몇 명이 청연의 주위에 앉았다.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느낀 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피투성이였던 손이 새 살이 돋아나듯 형태를 되찾고 있었다. 마취제. 심령 수술. 메스와 핀셋. 가까운 병원의 이름이 몇 개나 오가는 동안 청연은 자신에게 능력을 사용한 여성에게 눈을 굴렸다. 장미? 아니.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 붉은 색. 화염과 태양의 빛깔. 짧은 숏커트 머리카락. 청연이 사랑하는 연인과 조금 비슷하지만 그보다도 깊고 바다색 눈동자였다. 

청연의 팔을 뒤덮던 황금빛 오라가 잠잠해질 때 즈음에는 팔은 물론 다리의 고통 또한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녀는 곧 청연의 주변을 확인한 다음 단숨에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더 버텨요. ‘형태’는 갖췄어요. 나머진 의료팀이 잘 해줄 거 에요.”

“대리님! 한계입니다. 더 이상은 못 버틴다고 합니다! 빨리!”

“환자들 깔려 죽는 꼴 보고 싶대?! 염동력자 아닌 요원도 싹 투입하라고 해! 한 명도 죽게 하지 마!”


시월의 뒤를 따라 가는 서포터즈 두 명이 잠시 청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청연 또한 마찬가지로 당황했다. 그대로 가는 거냐고 물어보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시월은 달려오던 유환에게 외치며 교대하듯 자리를 떴다.


“ㅡ거기 당신이 데리고 나가세요! 다른 환자들은? 안내해!”

“화재 현장 밖에서 대기중 입니다!”

“청연!!”

“...크...”


마물의 처리가 끝난 걸까. 그렇게 거대한 마물을 청연은 근래에 본 적이 없었다. 제 쪽으로 정신없이 달려온 유환은 청연을 한 번 살폈다. 잠깐이지만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아까 전 보다 안도 한 것 같았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유환은 잔뜩 일그러진 미간으로 청연을 팔을 들쳐 맸다. 유환의 능력이라면 이 부산스러운 현장에서 자신보다 도움이 될 일이 훨씬 많을 텐데. 하지만 유환은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모두 무시했다.


“당장 나가자. 설 수 있어? 이쪽으로 기대.”

“...유환.”

“괜찮아 이제...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해. 제발. 얼핏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청연은 멍하니 그 말을 듣다 웃음을 흘릴 뻔 했다. 한결 나아진 왼쪽 눈이 욱신거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시야는 확보 할 수 있었다. 유환의 걸음은 다급했지만 조심스러웠다. 청연은 왼 발을 질질 끌며 간신히 유환의 느린 보폭에 맞춰 걸었다. 소란스러운 현장 한가운데에서 어느 요원은 현장 밖으로, 어느 요원은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유환이 붙들지 않은 왼팔의 손목 안쪽, 점점 흐려져 가는 장미 모양 문신을 보며 청연은 확신했다. 꿈이 아니다. 이건 현실이었다. 이 장미 저택 바깥의 세계, 내가 살아야 하고 선택하고 만 장소. 


더 이상 아무것도 부정 할 수 없었다. 

화무십일홍, 열흘을 살다 화려하게 지고 마는, 긍지를 안고 흩어질 꽃 같은 인간의 삶.

이 처절한 세계에서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여름마다 피는 장미보다 선명한 삶이 녹아든 무대 위로 올라 와 주었지.


이 무대야말로, 너와 내가 함께 선 장소.

흑장미가 잠든 장미의 저택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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