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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장미의 저주 02


#02. 삼나무 문 저편





한 낮에도 저택 안은 어두웠다. 조명을 켜지 않는 이유를 묻자, 충분히 밝다는 대답이 돌아온 게 기가 찰 정도였다. 밝다니, 이게? 어이가 없지만 숙녀에게 대놓고 핀잔은 주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독고 아가씨는 그나마 계단을 천천히 올라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놓친다면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긴 아치형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는 동안, 청연은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기분 나쁠 정도로 깨끗한 저택 안에서 천장에 매달린 유리등이 창문 바깥의 햇빛을 받아서 잠깐이지만 반짝였다.


저택의 뒷 편.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서 식별하긴 어려웠지만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색ㅡ 하얀색, 혹은 크림색인가. 창문 너머로 저택 뒷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장미들이 피어있는 정원 쪽이 잘 보이도록 놓여진 그네. 혹은 그늘막이 있는 벤치 같기도 했다. 

정원 뒷편에도 장미는 가득 피어있었다. 단 한송이도 피우다가 썩어들거나 도중에 시들 지는 않았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정원사도 가위도 아무것도 없지만 이 집의 장미들은 하나같이 의아할 정도로 만발 해 있었다. 그래서, 청연의 안에서는 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어떠한 가설이 떠오른 채 가라 앉을 줄을 몰랐다.


궁금 한 것을 참는 성미는 아니었기에, 청연은 그녀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사기를 당하면 곤란하거든.”

“뭐?”

“이 저택의 구조 말이야. 아무도 없는 깨끗한 저택에 잎사귀 하나 떨어지지 않는 장미들까지. 얼핏 보면 아름답지만 자세히 생각 해 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어. 어떤 구조로 되어 있지?”


독고 아가씨는 난간을 붙잡은 채 청연을 돌아보았다. 곧 자신을 천천히 내려다본 그녀에게 압도 당할 청연이 아니었다. 원하는 걸 듣기 위해서는 더욱 밀어 붙여야 할 때도 있다. 


“설명 할 수 없나? 이 저택의 원리 말이야.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겠어. 내가 원하는 불멸이 여기에 있는지, 대답 정돈 해 줘야 수지가 맞지.”


저주 받은 저택. 독고 저邸 라고 불리는 장소를 청연이 알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실체도, 주소도 확실하지 않다. 누구나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뜬소문에 가까웠다. 제법 오랜 시간 사람을 벗어나는 법을 찾았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저주받은 저택이라니. 평소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문을 들고 온 사람이 백영이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청연 또한 그대로 무시했을 텐데. 이러한 문제에 있어 발현자이자 협력자에 가까운 백영은, 상당히 신뢰 할 수 있는 상대였다.


매 해 여름마다 공간의 틈을 비집고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신기한 저택. 누군가는 그 존재 조차 모르지만, 누군가는 가장 깊은 저택 안쪽으로 초대 받는다.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자세히 기억 하지 못한다. 


다만 저택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의 기억을 백영이 직접 읽으며 확인 한 게 두 가지. 


“재미있는 말을 하네, 수지라니. 그건 거래를 하는 사람들끼리 따지는 건데?”


첫번 째는, 그러한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해마다 한 두명씩은 있었다는 점. 

두번 째는, 그들이 만난 사람. 기억 속의 여성이 수십 년 동안 늙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눈 앞의 독고 아가씨가 정말로 수십 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동안 늙지 않았던 거라면? 

청연은 어떤 댓가든 지불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청연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곤 예상 외로 흔쾌히 대답했다.


“똑똑한 질문이니까 알려줄게. 간단한 원리야. 이 저택의 시간을 묶어 둔 거지.”

“시간을 묶어 둬?”

“그래. 나는 신이 아니니까. 사람의 수명을 늘리거나 할 순 없어. 다만 이 저택에 한해서 시간의 흐름을 비틀어놓은 거지.”


청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쪽이 더 신에 가깝지 않나. 


“시간이 흐르는 건 여름 뿐. 그 외에는 저택과 함께 잠들어 있는 거야. 수명을 소모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주 느리게 소모 하는 거지. 사계절 중 여름에만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 해 봐. 남들보다 네 배는 오래 사는 거잖아?”


청연의 동의를 얻기 위함인지, 그녀는 살짝 돌아보며 눈빛을 흘겼다. 

분명 간단한 원리긴 하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타인의 시간은 물론 시공간을 제어하는 능력이라니. 두 배이고 세 배이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독고 아가씨는 계속 해서 느리게 계단을 올랐다. 창문 너머로 핀 저택 뒷편의 장미를 보던 청연은, 마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뒷태조차 아름다운 여인이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 보아도 스물 여섯이거나 그 아래로 보인다.


“수명을 느리게 소모하는 만큼 나이도 느리게 먹는 거니 외견도 보다시피. 남들보다는 오래오래 젊게 사는 거지. 불멸로 보일 만큼 오래.”

“그럼 당신의 실제 나이는 외견과는 상당히 다르단 소리인데.”

“맞아.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나이라면 굳이 당신을 저택 안으로 들이지 않았을 거야.”

“날 저택 안으로 들인 이유는 뭔데?”


그렇게 말하면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청연은 짧게 덧붙이며 그녀에게 채근했다. 들어 온 순간부터 확신했다. 이 저택에는 지금 그녀와 자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는 하는 걸까? 먹을 것은? 마실 것은? 머무는 손님을 위한 침구, 식사를 함께 할 식탁은? 


사람을 위한 기물은 필요 없다는 듯 텅 비어있는 저택에서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이해관계가 일치 한 거지.”


피아노가 놓여 있는 홀의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차분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계단을 다 올라온 청연 쪽을 돌아보았다.


“네가 불멸을 원하듯, 나는 이 불멸을 끝내고 싶어졌으니까.”

“......”

“나는 이 불멸을 이어갈 새로운 장미의 주인을 찾고 있어. 충분히 대답이 됐지?”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묶어둔 저택, 그리고 불멸을 끝내고 싶어 하는 여자. 이른 여름에도 흐트러지게 핀 장미, 그리고 그 장미의 주인을 찾고 있다는 말 속에는 여러가지의 의미가 포함 되어 있었다. 아직도 몇 가지 모호한 건 존재하지만, 그녀 나름대로 내놓은 분명한 확답이다. 


“이제 당신 차례야.”


그녀의 고운 손가락이 다시금, 2층 복조의 땅콩크림색 문 하나를 가리켰다. 그녀는 더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심플한 제안. 불멸을 원한다면, 들어가도록 해. 다른 말은 더 필요 없다.


청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수상한 부분도, 거절 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녀를 지나쳐 문 앞에 섰다. 삼나무 문 저편으로 들어가기 위해 청연은 문고리를 돌렸고, 다시 하얀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다시금 아래층에서 맛보았던 하얀 빛망울이 기억들과 함께 터져나왔다. 느리게 움직이는 빛망울이 터지거나 녹아내리며, 공간이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춘다. 초록색 십자가 마크. 본 적 없는 복도와 쿠션이 낡아버린 의자.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조용하고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단편적인 정보들이 스치고 지났을 뿐인데 깨달아버렸다.


아.

이건 작년의.


눈쌀이 찌푸려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 기억은, 어느 늦은 가을. 겨울을 준비 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흐르던 계절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ㅡ




-

-




“괜찮단다.”


일평생 거짓말을 익숙하게 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또 이러시깁니까.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이렇다. 닿지 못할 원망이 쌓이기만 한다. 전부 당신의 거짓말 때문이다. 기억 속의 청연은 이를 악물었다.


“신경 안 써도 돼. 신경 쓰지 마렴.”

“네, 참 그럴 수가 있겠네요.”

“빈정거리지 말고.”

“...”


아니,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매 순간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 차라리 거짓말로 치부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누이는 언제나 청연에게 지울 수 없는 굴레와 짐을 안기던 사람이었다. 차라리 잔뜩 안겨줬다면 싫다며 도망치기라도 했을 텐데,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혼자 끌어안는 사람이다.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다고만 했었지. 그 말에 익숙해진 나는, 자청연은 그냥 무심하게 넘기기만 했고.


역정이 났다. 들불 번지듯 빠르고 강하게 화가 끓는다. 

이 여인은 왜 이렇게 사는 거지? 괜찮을 리 없다는 걸 알았다면, 나라도 누이의 말을 거짓말로 치부하지 말고 짐을 나눠 들었어야 했나? 지켜보기 답답했다면 그녀를 계몽하고 채근해야 했나? 

손해만 보고 살지 말라고 대신 화를 내 줬어야 했어? 내가 그랬어야 해?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청연아.”

“누님도 아영이처럼 저와 인연을 끊고 싶으셨다면 말이라도 하시지.”


형제들의 장례식 날 패악을 부리던 막내 여동생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 아이는 알고 있을까. 만약 자신이 몰랐는데 그 아이가 안다면, 이 것 만큼 못 견딜 일도 없겠다. 그래서 부러 묻지 않았다. ㅡ연락을 하지 않으셨으면 몰랐을 겁니다. 심지어 연락하지 말라고 막으셨다면서요. 그렇게 또박또박 말하며 씨근덕거리자 당신은 다시 말이 없었다.


“저를 누님이 죽든 살든, 수술을 하든 말든 내버려두는 천치로 만드실 작정입니까. 유방암이라는 소식을 매형에게 들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네게 말을 했다면 뭔가 달라졌니?”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삼나무 문 안쪽에서 흘러가는 기억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가슴 한 구석이 송곳으로 후벼 파이는 것 같다. 청연의 입을 꼬매 버릴 의도였다면 꽤 정확한 질문이었다.


“알리질 않아서 기분이 상했구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알릴 필요가 어딨어. 우리는 이제 별개의 인생을 살아가잖아.”


이 순간 귓가로 들려오는 말들을 비비꼬아 듣게 되는 건 분명 자신의 못된 성정 때문이겠지. ㅡ알릴 필요는 없잖아. 우리는 남매이지만 이제는 남이니까.


누이는 정곡을 찔렀다. 막내 여동생 따위야 어떻게 살든 처음부터 알 바 아니었다. 집안이야 진즉 학을 떼며 나와 버렸지. 유일한 마음의 걸림돌은 누이 뿐. 남편감을 찾아달라는 누이의 말에 청연이 자기 일처럼 달려든 건 그 때문이었다. 누이라는 걸림돌을 치워버리고 싶었으니까.

결혼은 물 흐르듯 진행됐고 그녀는 남편을 따라 떠났다. 솟을대문 높았던 두령님 댁은 이제 허물어졌으니 전부 괜찮을 줄 알았다. 마음에 걸리는 건 하나도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세간의 기준을 두고 이야기 하지 말자, 청연. 그런 건 네가 싫어하는 거잖아.”

“.........”

“비난 하려는 게 아니야. 너는 이런 일 크게 신경 안 쓴다는 걸 알아. 내가 네 누나인데 왜 모르겠어.”


어떻게 해도 안되는 게 존재한다.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없는 대상이 있다.

청연에게는 가족이다. 누이는 분명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위해’ 청연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거나 행동 한 적은 없었다. 누이를 위해서 취했던 행동은 대부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렇다. 그녀는 어리석지 않다. 현명한 사람이니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아무리 그녀를 위하는 척 해도 오래 전 청연의 천륜은 깨져나갔다. 가족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댓가는 눈처럼 조용히 쌓인 거지. 누이의 가슴에 칼자국이 몇 번이나 날 때 까지 새카맣게 모르는 결과로 돌아 온 거지. 누이는, 남동생을 걱정시키기 싫다는 배려심 넘치는 이유로 숨긴 것도 아니다. 청연과 마찬가지로 그녀 자신을 위해 알리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일련의 번거로운 상황이 싫어서.


“그리고 나도,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알리지 않았어.”


나는 괜찮아, 그런 말로 속였던 건 누구였지. 

분노와 증오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누이에게 둘러댔던 내가 먼저였던가. 이젠 구별 할 수 없다.


“신경 쓰지 마.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속이 터질 정도로 정확한 말. 사실, 자신은 이 병원을 나선 이후 그녀를 두 번 세 번 찾아올 사람은 아니니까. 안타깝고 걱정되지만 전화를 하거나 소식을 물으며 챙기진 않을 것이다.


화가 난 이유는ㅡ 그녀에게 무심하기 짝이 없는 제 자신을 들킨 것 같아서. 

후레자식마냥 누이에게 무심한 자신이 부끄러웠으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화를 냈을 뿐이다. 평판과 체면, 어느 쪽도 이제는 챙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족에게 무심한 걸 들켰다는데서 오는 부끄러움은 통렬했다.

청연은 끝까지 그녀가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길 원했다. 남동생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하는 사람이길 원했지만, 끝내 그녀는 사과 하지 않았다. 말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게 그녀의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병원을 뒤로 한 다음, 제대로 된 연락을 했느냐 물어본다면 글쎄. 결국 누이가 옳았던 셈이다. 청연이 화가 난 포인트는 애매했다. 남동생과 남의 사이. 인간과 비인간의 사이였다. 

왜 내게 말 하지 않았어, 라는 분노의 이면에는 말 한다고 해도 변할 건 없다는 진실이 있음을 안다. 그래봤자 남이라고 돌아서다가도,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어진다. 


어차피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의미 없어질 누이와의 인연, 그렇게 여기다가도.

나는, 자청연은 아직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만다.


가라앉는 기분과 함께, 기억이 담긴 빛망울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주변은 급속도로 풍경이 흐려지더니 곧 들어왔을 때처럼 새하얀 공간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변명은 쉬웠다. 원래 나는 이런 인간이니까. 유리파편처럼 날카로운 모순이 마음을 실컷 찌른다. 평판과 체면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뻔뻔함 뒤에, 누이의 말을 거짓말로 치부하는 수치와 자존심이 있다. 남겨진 누나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렇게 화 낼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지. 누구도 책망하지 않을 테니. 


기억속의 청연은 한참 누이와 다퉜다. 참담한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걸음을 돌렸고, 그게 벌써 작년이었다. 종종 소식이 들려오긴 했지만 자존심 때문이라도 청연이 먼저 연락을 하진 않았다. 어차피 알릴 필요가 없다고 여겼으면 이쪽이 소식을 물을 필요 또한 없지 않는가.


거북한 사실. 누이를 향한 잔정이라니. 남아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리하지 못한 미련과 잔 정情이 물방울처럼 어느새 소리 없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쩌랴. 인생이 흘러가버리듯 물방울도 떨어질 뿐. 물처럼 흐르는 운명처럼 거스를 수 없다.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결코 거역하지 못하고 물방울 같은 잔정이 떨어져서 산산이 부서진다.


삼나무 문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빛망울은 어지럽게 청연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화려한 광경으로 변했다. ㅡ찬란한 여름의 풍경이었다. 


청연이 겪은 기억은 아니었다. 

청연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토록 흐트러지게 핀 장미들 사이에서 사랑을 나눈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하는 건 아마 그녀의 기억이겠군. 예상은 빗나가기는커녕 무서울 정도로 들어맞았다.


쌀쌀맞았던 첫 만남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웃는 독고 아가씨의 미소. 부서지는 햇살도, 흘러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잎사귀 하나까지 그녀와 연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품 안에는 한가득 빨간 장미를 품었고,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 깊이 사랑 받았고, 깊이 사랑한 기억.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이 기억이 흘러나오는 이유를 청연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 청연은 다시 걸음을 옮겼고, 곧 삼나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다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빛망울은 삼나무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듯 그대로 흩어지거나 가라 앉아버렸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그녀가 말했다.


“계량이 끝났어. 당신의 왼쪽 팔, 생각보단 별 거 없었나봐.”


까만 드레스와 까만 장미로 장식한 여인. 과거의 화려하고 찬란한 시절과 화사한 웃음을 지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사실은 쌍둥이 자매였다던가? 제법 그럴듯한 가설을 세워 본 청연이었지만, 구태여 확인 하지 않았다. 딱히 몰라도 상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얼마 쯤 되나?”

“가족. 물방울 같은 인연. 당신에게 쌓여있던 미련. 좋든 싫든, 당신이 소유하고 있던 것.”


그녀, 독고 아가씨는 과연 청연의 기억을 들여다 본 것일까. 진절머리 나게 따라 붙었던 감정의 정체를 가늠해보았나보다. 청연의 발밑에는 어느새 연푸른 불꽃이 타오르며 느릿느릿 숫자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려진 숫자는 2. 아까 전의 52에 비하면 적었다.


“보통은 여기에서 끝인데. 확실히 보통은 아니구나, 당신. 점점 기대하게 돼.”

“이거, 대체 뭔데?”

“궁금해? 위로 올라 와 보면 알아. 이제 다 왔거든.”


52와 2. 무엇을 가리키나 싶어 의아해하는 청연을 앞에 두고 그녀는 웃어버리기만 할 뿐이었다. 독고 아가씨는 곧 검은색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더니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걸음소리보다 또렷한 웃음소리가 못내 즐거운 것처럼 들린다. 정말 특이한 여자구나 싶어 그녀를 뒤따라 청연 또한 삼나무 문을 뒤로 하려던 순간이었다.


- ... ...연


목소리가 들렸다.

착각이었나?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부르는 목소리였을까 그건. 착각이라고 해도 좋겠지. 하지만 묘하게 신경을 잡아끄는 껄끄러움이 있었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아마 미각 또한 멀쩡할텐데. 그렇다는 건 오감을 초월한 무언가가 껄끄럽게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이상한 감각이야 아까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 터지는 신기한 빛망울과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재생되는 경험은 상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평범한 저택은 아니다. 이 목소리 또한 그렇다. 만약 그녀 말고 누군가가 이 저택에 있다면? 예를 들면, 그녀와 함께 초상화에 걸려있던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거라면? 


“... ...”


말도 안되는 소리. 청연은 픽 하고 웃어버렸다. 사람이 있다면 인기척이 나야 정상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 목소리는 1층과 2층 뿐 아니라 저택 밖에서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와 어딘지 닮아 있었다. 그래. 이상한 감각들. 이 저택을 걷는 것도, 그녀와 말을 나누는 것도 조금 생소했다. 조금씩 늘어지는 오디오 테이프를 듣거나, 예전에 찍어 둔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시킨 것 같았다. 무엇하나 생생하게 겪고 있단 느낌이 들질 않는다. 재미없는 작품을 고르는 바람에, 영화관에서 차마 나가지 못하고 지루하게 감상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만, 직감은 중요하게 여기며 행동한다. 평소라면 재미없는 영화를 씹어대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영화관을, 이 장미의 저택을 박차고 나가라고?


청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어떤 기회인데. 문득 편백나무 문 저편에서 스페치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ㅡ당신이 간단히 소망을 포기 할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안다. 


스페치아는 물론이고 자신 또한 알고 있다. 여기서 끝낼 순 없다. 장미의 저택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 불멸이 있다면. 누이와의 인연을 완전히 끝장내도 마음의 가책 없이, 천륜과 인륜에서 모조리 자유로워 질 수 있다면.


이 지루하고 너절한, 인간의 생을 벗어날 길이 있다면, 나는 어디로든 가겠어.



“자청연. 안 올라올 거야?”



독고 아가씨의 채근이었다. 청연은 픽 웃고 걸음을 옮겼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기회가 된다면 직접 알아보는 것도 재밌겠지. 삼층으로 이어지는 저택의 계단을 밟고 난간을 매만진 그 순간이었다.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청연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발등에 대못이 박힌 기분이었다. 등줄기에 찌릿하게 달리는 소름이 번개와도 같았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고, 꼴깍 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생생했다. 


내가 그녀에게 이름을 밝힌 적이 있었던가?


“뭘 하고 있어?”


독고 아가씨는 올라가던 걸음을 멈추고, 계단에서 굳어버린 청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연의 입가에 맺힌 습관적인 웃음은 여전했으나, 그럼에도 소름은 가시질 않았다.


“올라 와. 이게 마지막이야.”


재촉하는 목소리는 아까 전과 다름없었다. 대답 대신 발을 옮기자,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금 번뜩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녀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아까 전 보다는 조금 더 빠른 보폭이었다. 기대감에 가득 차서, 견딜 수 없이 즐거운 마음이 묻어나오는 걸음걸이. 이제 마지막이라고 했지. 청연은 도무지 이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어디로 갔지? 눈부신 여름날의 장미는 언제부터 저토록 만발했을까? 이 곳에는 정말로 자신 뿐인가? 시간과 공간을 다룰 줄 아는 그녀는 어떤 존재지?


차라리 이 자리에 자신이 아닌 백영이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청연은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말한 위층에서, 어느새 생겨난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ㅡ하지만 이제와서 어떻게 하겠어 내가?


청연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 지루하고 너절한, 인간의 생을 벗어날 길이 있다면 그걸 끝내 갈구 할 자신을 오래 전부터 인정해왔다. 누이를 향한 물방울 같은 미련도, 남아있는 잔정도 모두 버릴 수 있으니까.


그는 위층으로 향했다. 짙은 장미향에 곧 머리가 어지럽기까지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모든 게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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