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Intro
초여름이라기엔 일찍부터 더운 날씨였다. 아직 매미만 울지 않았지, 기온으로만 따지면 벌써 여름이다. 택시로는 들어 올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오는 동안 점점 여름 장미의 아찔한 향기는 짙어졌다. 이내 남자의 걸음이 근원지 앞에서 멈췄다.
그는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한 번 닦았다. 한 숨 돌리고 나서야 붉은 장미가 피어있는 저택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서서 저택을 살폈다. 코앞에 걸린 명패에는 그토록 찾아 헤맨 글자가 적혀있었다.
시간의 흔적이 제법 남은 낡은 명패 위에는 '독고' 라는 성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오직 글자만이 음각으로 파여 있는 심플함. 구식 명패다.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은, 이제는 너무 옛것이 된 낡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 저택.
낮은 담장을 타고 자란 덩굴장미가 흐트러지게 피어있는 장소.
여름은 이제 막 시작 일 텐데 벌써 이렇게 피었나.
매 해 돌아오는 여름을 기다렸다는 듯 일찍부터 활짝 핀 장미는 길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 돌아 볼 만큼 진한 향기를 풍겼다.
이상한 저택이다.
주택가와는 제법 거리가 먼 장소에 있다는 소리야 들었지만 주소지 하나로 찾기엔 쉽지 않은 골목길이 문제였다. 나중에 가서는 거의 주소를 던지고 장미 냄새를 쫓아 후각과 감만으로 저택을 찾아 나설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방문객을 위해 응당 있어야 할 초인종조차도 없는건 수상했다.
남자는 머지않아 저택의 까만 철문이 열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빗장이 걸리지 않은 철문. 까만 철문은 그리 크지 않았다. 철문 너머로 현관 입구가 보였다. 다른 이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조용한 저택이지만 남자의 눈에는 문을 두드릴 용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들어오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걸음이 멈춰 있던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는 곧 철문을 손끝으로 밀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기묘한 감각이다.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가슴의 수런거림은 불안함과 맞닿아 있었다.
일생을 걸고 쫓아온 소원이 어쩌면 이루어 질 수도 있다.
그 생각만으로 기분은 들떴고, 기대감은 으레 그렇듯 예고 없이 추락하고 처박힐 게 두려워 아찔해진다.
적어도 방문자를 거절하지 않는 건 확실하다. 영문 모를 확신이 생기자 남자는 발을 옮겼다. 저택의 철문을 넘어선 것 뿐인데, 남자는 어쩐지 모든 감각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이, 목울대 너머로 울컥하고 치미는 떨림이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떠오르기 위해 지면에서 멀어지자 느끼는 아득한 위화감인가.
그게 아니면 무저갱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인가.
남자는 구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곧 붉은 장미가 가득한 저택은, 스스로 철문을 닫더니 존재 한 적 없었다는 듯 그 장소에서 사라졌다.
그곳은 장미의 저택.
너무도 깊이 사랑했던 상대를 잃고, 홀로 잠든 흑장미가 남겨진 곳.
남자는 그 곳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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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오랜만일세.”
“그래.”
간만에 보는 건데도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버릇은 고치질 못했나보다. 잘 지냈냐는 말을 더 덧붙일 틈도 주지 않고 그가 착석했다. 그는 쓸때없는 정보를 아는 걸 싫어했다. 어떻게 지냈냐는 말로 되묻긴 커녕 잘 지냈냐는 질문조차 끊어버리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도, 친구의 근황도 그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일까.
그는 두 사람의 살림 흔적이 역력한 방을 한 번 둘러본 게 다였다. 한 번이면 됐다는 듯 도로 스마트폰 화면으로 돌아간 시선이 냉정했다. 청연이 차를 타오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소리 없이 화면을 터치했다. 여전히 바쁘다는 건 딱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쭉 냉정하던 표정이 조금 풀어진 건, 청연이 그의 앞에 내려놓은 모과차 향을 맡을 때 뿐이었다.
백영은 장갑조차 벗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용건만 말하지.”
“그렇게 해.”
“네가 함께 가줘야 할 곳이 있다.”
빈 말이 아니군. 정말 용건만 말 하고 있잖아.
청연이 웃음을 터트린 것에 비해, 그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어디를?”
“숙원이 담긴 곳.”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청연이 승낙하기에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