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하나 없이 꼼꼼하게 테이핑된 붕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깨끗한 시트에 몸을 맡겼다. 수술이 끝난 무릎은 아무 느낌이 없었지만 조금씩 뒤척일 때 마다 약간의 통증을 호소했다. 푹신한 베개 위에 누워 바라본 하늘은 속절없이 파랗기만 했다. 찬바람은 잠깐 불다가 금새 그쳤다. 얇은 환자복 사이로 스치고 간 작은 바람이 체온을 앗아 간다. 잠시 동안은 창문을 닫을 생각이었지만, 일부러 일어나는 일도 쉽지가 않아서 쓰게 웃어버리는 것에 그쳤다.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며 낙엽 위에 굴려넣은 따뜻한 군고구마라던가, 얼굴 위로 덮어둔 책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리. 드리블을 멈추고 코스모스 꽃에 다가가는 농구화 소리. 다시 한 번! 그렇게 외치며 가을에 구워먹었던 밤고구마를 찾는 목소리. 쌓인 눈을 치우며 체육관 강당 앞의 눈 치우던 소리. 지금은 들을 수 없는 그 소리들.
그 해 겨울엔 처음으로 병실에서 계절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하하, 그 정도면 적당히 특이하고 좋은 1학년이네."
"마냥 웃을 일이 아니라니깐. 텟페이처럼 다루기 힘든 괴짜 같은 녀석들만 들어왔다고 휴가가 입이 댓 발은 나왔어."
리코는 그렇게 말하며 '자, 이번 신입 부원들이 경기야.' 하고 CD를 넘겼다. 영상이 담긴 CD를 소중하게 받아들며 듣게 된 1학년 신입 부원의 소식이란 하나같이 평범하진 않았다. 특히 운동장에 커다랗게 써놓은 전국 최강을 향한 다짐은 천하의 키요시 텟페이도 '과연' 하고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옥상의 외침은 소리가 닿는 한계가 있으니 못 듣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운동장에 써놓은 글자라면 못 보는 쪽이 이상하다. 이 이상의 확실한 선언은 없는 셈이다.
"쿠로코라고 했나? 나머지 한 명은?"
"카가미 타이가. 1학년 중에선 단연 발군이아. 텟페이 너 만큼이나 좋은 선수가 될 거야."
슬쩍 바라본 옆 리코의 얼굴은 아이 키우는 재미를 알아버린 엄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감독은 물론이고 매니저 일까지 혼자 도맡아서 하고 있으니 힘들다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할 텐데. 힘든 소리는커녕 깔끔하게 찔러서 정리한 머리핀만큼이나 흔들림이 없다. 비록 체육관의 상황을 볼 순 없어도, 기다렸다는 듯이 척척 지시하며 부원들을 휘어잡을 리코의 모습은 키요시도 어렵잖게 상상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너 만큼' 이라니. 좀이 쑤시는 병원 생활이 한층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눈을 빛내는 리코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한 줄도 모르겠지만 분명하게 키요시의 가슴에 기름을 들이붓는 말이었다.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았던 작은 다짐이 한층 단단하게 굳어간다. 아마 새로 들어온 1학년의 영상을 본다면 그 결심은 더욱 굳어지겠지. 재활을 끝내면, 그 때는 반드시…
"얼른 하고 싶다, 농구."
"제대로 나아서 돌아 오라구. 제대로 낫지도 않은 무릎으로 돌아오면 화 낼 거야."
씨익 웃으며 못을 박는 감독에게는 아무렴 키요시 뿐만 아니라, 제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고작이니까. 적어도 '알았어' 하고 대답한 이 순간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게 된다.
리코는 몇 번이나 무릎의 근황을 물었다. 부원들의 트레이닝도 조절 해 주는 코치답게 키요시에게도 무리한 재활은 오히려 독이라는 조언까지 퍼부은 그녀는 기어코 면회시간이 끝날 때 까지 의자를 지켰다. 돌아가는 길에는 묘한 대여품까지 전달 받았다.
“심심할테니까 딱 퇴원 할 때 까지만 빌려주겠대.”
물론 그 대여품이 3점 슛에 실패 할 때 마다 하나씩 피규어를 부러트리는 입장에 처한 휴가가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전국무장 피규어임을 키요시는 알 리가 없었다.
외눈의 명장 다테 마사무네? 휴가는 이런 걸 좋아하나. 키요시의 취향을 고려 한 선물과는 썩 거리가 있지만 모처럼 휴가가 빌려준 간 물건을 다시 서랍 안으로 넣을 수는 없었다. 키요시는 머리를 몇 번 긁적이다 그냥 침대에 누워 버렸다.
텅 빈 병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순간이라도, 리코가 있을 때의 공기는 그토록 따뜻했는데.
아. 이건 틀렸나, 리코 뿐만이 아니다. 세이린에서 있을 때, 농구부에서 모두와 함께 있을 때의 공기는 따뜻하다 못해 순식간에 뜨겁게 타오른다. 다시 되새기고, 기억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채우는 그런 존재. 그런 즐거움을 너희 곁에서 다시 느꼈다. 그래서 지겨운 재활도 참을 수 있게 된 거야. 억척스러운 고집을 관철하고 다짐할 수 있다. 돌아갈 날, 돌아가고 싶은 장소. 다시 쥐고 싶은 농구공. 소리 없이 입가에 호를 띄웠다.
이제 곧 여름이 돌아온다. 녹음으로 가득찬 신록의 계절.
꼭 대회를 나섰던 여름 날처럼 햇살이 따가워지면 다시 너희 곁으로 돌아가야지.
그리고 다시 한 번 즐겁게 농구를 하는 거야.
기다려준 너희들과, 언제까지나.
키요시는 작게 웃었다.
그리곤 밤바람을 스치고 떨어진 한 줄기의 유성을 향해 인사하며, 다가올 즐거움에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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