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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소원을

전철 #00 변하지 않는 것과 새끼 손가락의 반지







- 사실 라이더부가 어디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거기 멱살잡고 있는 너 말야, 가면라이더부 이름 달고 있으면서 그렇게 쉽게 무력 쓰면 어떡하냐. 




죽고 싶어졌다.








* * 







"반지, 요즘은 안 끼고 다닌 줄 알았더니?"

"……."




지갑 하나와 생수병 하나. 가방조차 매지 않은 동생이 등교시간 치고는 퍽 늦은 정오에 운동화 끈을 동여매도 형은 화내지 않는다. 딱 봐도 학교에 갈 생각이 없어보이는 사복차림 또한 지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피했으면 하는 화제를 끄집어낸다. 형은 이래서 거북하고 짜증나는 인간이야.




"말 안하고 연락 안 오면 모를 것 같지?"

"…."

"똑바로 살자."

"뭐야 그거. 경험자의 충고야?"

"뭔 소리야. 형으로서의 바람이지."




현관 미닫이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지만, 밀려오는 짜증을 이런 방식으로 해소 할 수 없는 내게도 화가 나. 모든 일이 그저 답답하다. 변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내 분노는 끓는점을 금새 돌파한다. 현관에서 불어온 바람에 형의 전통복 끝자락이 펄럭였다.




"어머니께 안부 전해드려."

"…."





대답 없이, 집을 나섰다.









* * 








오늘을 발판 삼아 내딛어야 하는 게 내일이라면, 무저갱같은 오늘을 밟아서 내딛어야 할 내일이 얼마나 막막한지를 깨달을 때가 있다.


목적지가 적혀진 표를 사고, 대합실에서 기다렸던 전철에 오르면 이제는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레일에 따라 몸이 움직인다.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창 밖 풍경은 익숙 해 보이지만, 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

언제나처럼 오고 가던 장소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장소로.


멈추는 걸음을 대신해서 움직이는 전철 속. 오고 가는 사람들과 승차권을 번갈아 보고 있자면, 멍하니 목적지도 잊은 채 아무 생각 없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한 게 이번이 몇번째였는지.


손가락 관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작은 반지를 가만 들여다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면, 언제 그랬었냐는 듯 머리가 다시금 복잡해진다. 

꽤나 오랜만에 낀 새끼손가락의 반지는 착찹 할 만큼 이 손에 딱 맞았다. 그래. 손가락 사이즈처럼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점의 차이는 때론 잔인 할 정도로 명확해. 내 자신이 싫어질 정도로.


픽하고 웃는 모습이 창문에 비친다. 아마도 이 반지를 받을 적에도 지금 같은 얼굴이었을텐데.





- 타카히사. 이거 줄게.

- 왠 반지?

- 재혼 하는 데 전 남편이 준 반지 낄 순 없잖아. 




엄마는 웃는다. 기억 속에서 항상 웃고 있다. 항상 퉁명스러운 나와는 참 비교되지.




- 전당포에 팔던가.

- 얘는 로망이 없어. 여성용 반지지만 그래도 심플해서 남자가 끼어도 별로 남들이 신경 안 쓸거야. 아들이 가져.

- ...엄마 반지를 내가 받아도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래. 

-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네 아빤 내 손가락 사이즈도 몰라서 맞지도 않았어. 몇 번 낀 적 없으니 괜찮아.




엄마는 하하 웃어 넘겨버리더니, 내 손가락을 천천히 내려다본다. 애교 넘치는 얼굴은 이제 곧 두번째의 결혼을 앞둔 신부다운 모습이다. 

맹랑할 정도로 명랑한 성격. 편모 가정에도 구김살 없게 살아야 된다며 큰소리를 치는 기백. 나에게만 사랑을 나누어주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삶을 위해 재혼을 택한 엄마와의 대화는 아마 그게 마지막.


그녀는 며칠 전에도 신나게 타교생을 후드려 팼던 내 손을 가만 쥐었다. 그리곤 싸움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는 말을 대신해서 인생에서 하나 밖에 없는 첫번째 결혼반지를 아들의 새끼 손가락에 끼워준다. 장난스럽게 휘어진 입가의 곡선이 움직이며 하는 말이란, 참으로 엄마 답지 않다니까.




- 고등학교 가서도 열 대 맞으면 열 한대는 돌려줘야 돼. 알지 아들?




알지 그럼. 누구 아들인데. 








* * 








어이, 뭐 그렇다고 엄마가 죽기라도 한 건 아니다. 마지막이란 건 말 그대로 마지막으로 본 얼굴 일 뿐이니까 오해 하진 말라고. 어머니는 재혼하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 한 것 뿐이니까. 특급 아닌 일반 전철을 타면 편도 두 시간인 다른 지역에서 살게 됐다고 내게 주소지를 보내왔다. 하뉴 타카히사가 내 아들이라면, 언제든 내 집에는 올 수 있으며 와야 한다는 주장을 큰소리로 외치는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전보다도 밝았다. 그래서 난 안심했다.


일 년에 몇 번 얼굴 본 적 없던 아버지와 성질 긁어대는 성가신 형이 있는 집으로 굴러 들어갔지만 있어도 뭐. 괜찮아. 애초에 간단히 보러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새로운 가정을 가진 엄마를 방해 할 생각은 없어. 졸업장이나 들고 밥 한번 얻어 먹으러 가면 모를까. 재혼 한 엄마의 새로운 인생은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ㅡ

고등학생 쯤 됐으니 이젠 싸움질도 적당히 해야지. 재혼 하면서도 싸움질 하는 아들이 걱정됐을 엄마에게 어울리지도 않은 반지 같은 것도 받았으니 진짜 적당히 해야지. 반지 낀 손으로 사람 패면 손가락이 작살나니 적절하게 해야지, 

그런 다짐들을 하루마다 한 번 씩은 했던 것 같은데.


새삼스럽지만 비오는 날에 먼지나게 양아치들과의 추억을 쌓았던 1학년을 되돌이켜본다. 심란하기 짝이 없다 젠장할. 발전이 없어 난. 변하질 않는다고. 왜 변하질 못하는데.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하나 뽑았다. 뭐든 상관없었지만 탄산이나 마실까 싶어서 사이다를 뽑았는데 10엔은 더 싼 팥 음료가 나왔다. 장난하냐. 10엔 차이를 물로 보지 말라고.

열이 받아서 저도 모르게 자판기를 후려쳤는데, 젠장. 반지 낀 손이 유독 아프다. 있는대로 재수 없는 회장을 후려팬건 발이었지만, 화풀이 겸 무식하게 부쉈던 책상을 생각하면 손이 좀 아프다고 해도 이상할건 없는 노릇이다. 뭐 징징거릴 수준은 아니지만, 새삼 반지 낀 채 주먹 쓰니 아프긴 하네 이거. 




"그게 내 탓이냐."




뭐 몸소 폭력사태를 실현한건 나다만 시시비비를 따지자면 열받게 한 그 새끼가 나빠. 하여간 그런거라고. 내가 제공한 폭력이라도, 원인은 그쪽에게도 있었으니 정학이고 뭐고 맘대로 하라고. 학생회장이고 나발이고 권력의 개이건 총리대신이건 사람 앞에서 재수 없게 굴면서 성질 긁어댔는데 안 때리곤 배기겠냐. 참을 바엔 죽고말지.


복잡해진 머릿속을 탄산음료라도 마시면서 시원하게 씻어내고 싶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료는 단팥음료다. 진짜 열받는다 이 10엔 차이. 내 돈 돌려 줘.


찌푸린 얼굴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이미 몇 번은 와 보았던 전철역이지만, 그래도 생소한건 변함 없다. 가만히 전철역 의자에 앉아서 새로운 가정을 꾸몄을 어머니가 사는 마을을 내려보았다

그걸로 끝.


엄마였는지, 내 자신이었는지 모를 상대에게 했던 다짐이 흔들리게 되면 나는 청혼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거나 그녀가 살고 있는 마을로 발을 옮긴다. 그리고 몇 시간이고 음료수 하나로 전철역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플랫폼 반대편의 하행선을 타고 돌아가는 것이다.

어느 쪽이냐 하면, 오늘은 반지도 낀 데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쓰레기통으로 캔을 골인 시키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하행선 열차의 앞에 선다. 사람 발 하나는 간단히 빠질 것 같은 넓은 승강장과의 틈을 무시하고 열차에 몸을 다시 집어 넣는다. 단 한 번도 재혼한 그녀를 찾아 간 적은 없었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요즘은 잘 지내니. 그렇게 물어본다면 난 답할 수 없을거야 엄마. 여전히 아들 놈은 사람 패고 다닙니다. 예, 뭐 그래도.


성질 긁는 애들에 한해서만 조금씩 팬 것 정도니까 봐주지 않겠어요?







* * 






새로운 고등학교에 들어 간다면.

수갑 같은 청혼반지를 새끼 손가락에 끼우고 있다면.

봉사부에 들어간다면.


이젠 슬슬 그만 성질을 죽이자는 말과 함께 변해보자고 생각한다면, 변할 만도 할텐데.


변하지 않는 것 앞에서 나는 무력해진다.

'나' 라는 존재는 좀처럼 쉽게 변하질 않아.


가면라이더부에 들어갔으니까 변할 수 있을거라곤 생각 한 적 없지만,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만큼 가벼운 건 아닐텐데. 그래도 지겹고 숨막히는 학교에서 조금이나마 숨 쉬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고 개념이니까. 그래선지 사람을 때리던 주먹이 멈춘 순간 자괴감에 숨이 막혔다. 쉽게 변할 수 없어. 가면라이더부에 들어갔다고 해서, 조금은 해괴한 녀석들과 생각 없이 떠들 수 있는 장소가 학교에 생겼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될 순 없겠다. 알고 있었을텐데도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는데는 한참 걸렸다.



 

"뭐 확실히. 일단은 봉사부니까 폭력사태는 곤란 했겠지."




배짱 좋게 교실 안으로 들어와서 싸움을 말렸던 녀석은 아마 가면라이더부였겠지. 아무리 머리에 스팀이 올라 있어도 생각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 정돈 눈치 챘었다. 문제는 이름을 몰랐던 거라고 해야하나. 

정말 그대로 갔다면 오랜만에 성질 긁어댄 상대를 어떻게 후드려 팼을지 모르겠다. 상대방도 참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같이 폭발 했다면 개싸움이 되는 한이 있어도 물러나진 못했으리라. 적당한 부분에서 끊어 줬다면 끊어 준거지만 어쨌든 통성명쯤은 하고 교실을 나올 걸 그랬다며 뒤늦게 후회한다. 


아, 젠장 한 번 생각 나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네. 그래도 하나는 확실해. 적어도 난 이상한 녀석들이 잔뜩 있는 그 서클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어. 나 때문에 피해가 간다면 그만 둘 각오 정도는 하고 있다고.


…사과?

글쎄. 팼던 본인에게는 관 뚜껑 덮을 날 까진 할 생각도 없고 할 이유도 없지만.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던 그 녀석에게라면… 뭐 얼굴 보고 판단하자고.


전철이 달리는 동안 조금 열어둔 창문에서 풀냄새가 났다. 여름 향기를 맡으며, 반지낀 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감는다. 조금씩 더 더워지는 하루를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냈지만 내일도 짜증나게 덥겠지. 그러니까 내일은시원한 거라도 들고 뻔뻔하게 부실로 들어가자고. 어차피 변할 수 없다면 뻔뻔해지는 수 밖엔 없을 테니까.





   




* * 







"다녀왔냐?"

"항상 궁금한 건데 형이 백수야?"

"내가 어딜 봐서 백수야? 너 땜에 집에 붙어있는거다 임마!"

"어딜 봐도 대학생이 아닌데."




아니 진짜. 거짓말 하나 안 보태서 세상에 이렇게 자유롭게 출석하면서 사는 인간이 어딨냐.

하려던 말을 삼켰지만, 무심코 얼굴에 나타내고 말았는지 형이 '남말한다 이새끼가.' 라고 투덜거린다. 

짜증나게 왜 자꾸 새끼 새끼 타령이야?




"뭐 유급하긴 했다만 너한테 걱정 받을 건 아니니까 너나 잘해 임마."

"…이번 건 경험자로서의 충고야?"

"엉. 출석 일수는 맞춰서 다니라고."




형은 그렇게 말하며 태연하게 저녁 식사는 어쨌냐고 묻는데, 솔직히 이젠 비웃길 뿐이야.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던지고 다다미 위로 발을 뻗는데, 뒤돌아서 자기 방으로 돌아 가는 줄 알았던 형이 슬쩍 나를 떠본다




"어머니는 건강하시지?"

"…어."

"이거 또 구라치네."

"알면 적당히 넘어가라고. 귀찮게."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 진짜."

"죽던가 그럼."

"너부터 죽이고 이야기 하자."




해볼 생각이면 해보라고. 씩 웃으면서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는데, 형이 리모컨이라도 내던졌나보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에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근데 난 친히 형을 위해서 방문을  열어 줄 생각은 없어. 피곤하거든. 


양말과 지갑을 던져두고 이불 위로 몸을 던진다. 모처럼 학교에 안 갔다면 얌전히 집에서 잠이나 잘걸 그랬나.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시선을 사로잡은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얌전히 빼서 들여다본다.





아직은 변할 수 없으니, 이 반지는 돌려 줄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언젠가.

돌려 줄 수 있을 만큼 나 자신이 변한다면 그때는. 


그 '언젠가'의 순간을 위해서, 

이 반지는 당분간 내 새끼 손가락에 끼워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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