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나 내 문제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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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파편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탓에 영물들은 모두 인간체로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발바닥을 다칠수도 있었으니까. 상황은 대부분 정리 되어 있었다. 청연은 태도를 갈무리했지만, 직감적으로 이 태도를 다시 쓰기 위해선 과학반의 힘이 필요 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연이은 전투로 검날이 상한데다 겨울철 날씨 때문에 보관이 쉽지 않아 뵈었다.
최근 2주간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아수라장이었다. 대영청 설립 이후 처음으로 수능연기라는 사태에 직면하자, 모두가 한 마음으로 졸도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마물의 습격이 끊이질 않았다. 1년 중 가장 마물 발생률이 높아지는 시기에 지진이라니. 심지어 수능이 연기되자 수험생의 연이은 스트레스로 엿같은 연장근무가 무려 일주일이나 늘었다. 도무지 욕을 하는 수준으론 끝날 수가 없었다. 요원들 모두가 명줄 한 번 끈질긴 마물들 때문에 파김치였는데, 끊이질 않는 지진으로 서울보다 지방에서 많은 마물이 생성되었다. 맡은 지역이 있다는 핑계도 통하는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게이트를 넘나들며 전국을 누빈 이례 중의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이런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상층부에게 항의하는 목소리가 빗발 친 것에 비하면, 유환의 상태 메세지가 바뀐 정도는 귀엽게 보일 정도였다. 사실 받은 만큼 일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청연 조차도 이번 만큼은 받은 돈을 도로 던져줄테니 작작하라고 고함 치고 싶을 정도였다.
옷깃을 여민 채 청연은 건물 아래를 내려보았다. 8층 아래에서는 베타팀 요원들이 집결 해 있었다. 평소라면 베타팀 요원들과 교체되듯 자리를 떴을 테지만, 이번에는 혹시라도 마물이 재생성 될 위험이 높다는 지시 때문에 한 팀 정도는 현장을 떠나지 말고 주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청연의 능력은 이런 도심부에서는 상당히 요긴하면서도 난감했다. 이번 사태처럼 다량의 마물들이 나타날 경우 전방위 공격이 가능하다는 점이 좋았지만 '아군' 이라고 인식한 이들 외에는 모조리 부식시키거나 중독시키는 능력이니 주변 피해는 감안 할 수 밖에 없었다. 평생 지방에서만 근무를 해왔던 입장으로서는 도심에서의 전투란게 이토록 성가실 줄은 몰랐다. 나름 서울에서는 처음 겪어본 대규모, 고빈도 전투 때문에 청연의 인내심은 이미 기력만큼이나 소모 된 상태였다. 평소라면 아군식별 정도는 가볍게 했겠으나 지금은 그것도 귀찮았다. 모든 요원들의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 위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감기 걸리겠군."
"아무렴 이 정도로 걸릴까."
"곧 12월이다. 걸려도 이상 할 건 없지."
이 날씨에 두루마기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래후이는 끝내 청연에게 두루마기를 던졌다. 없는 것 보단 나았기 때문에 걸치긴 했지만 역시 소매 안쪽으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차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분 좀 풀어. 곧 연장 근무도 해제 될테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이게 몇 주 째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것 봐. 이거. 머리 떡진 거 안 보여? 삼일을 못 감았어."
"...보인다. 핫."
"자청연이 삼일 간 머리를 못 감다니. 곧 사망신고가 머지 않았어. 삼일이라고, 삼일!"
숨 터지는 소리가 나서 곁눈질 하자 래후이는 속 시원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장난하나 이 팀장은. 머리카락은 남자의 자존심이라고. 삼일이라니까 뭐가 좋다고 웃고 앉았어.
며칠 전에는 드디어 샤워라도 할까 싶었더니 숙희에게 질질 끌려서 철원으로 갔다고 짜증을 부리자 래후이는 더욱 심하게 웃었다. 탈북병이 나오자 군사 분계선 근처의 장병들의 스트레스가 급증 했기 때문인 건 둘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다. 오만가지 악재가 겹쳐도 이렇게 겹칠 수 있는 건가. 지진으로 인한 수능 연장과 탈북병이라니. 청연은 흙먼지에 뭉쳐서 후두둑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잡았다 놓길 반복했고, 곧 다시금 왁왁 거리며 화를 냈다.
"이럴거면 해외 요원들한테라도 손을 빌리라고. 언제까지 중앙 요원 돌려막기를 할 거야. 연말이면 안 그래도 우울한 인간이 속출하는데."
"아, 그래 연말이지."
"영물은 그런 개념 없어서 좋겠군."
"좋다마다. 하지만 이해했어. 그래서 네가 우울 해 보였군."
청연은 뜨악한 표정으로 래후이를 바라보았다. 회색 눈동자와 짧게 깎인 머리카락, 무뚝뚝한 인상 만큼이나 그는 말이 짧은 이였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으론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한 팀이 된지 다섯달, 역시 그정도로는 사람... 아니 타인을 파악하기에 짧은 시간이었던가.
"... ...내가 걱정되서 남은 거란 말은 하지 말게. 난 임자 있어."
"너나 착각하지 마. 난 유치원생 딸이 있는 몸이다."
"입양하신 인간 딸 말이지. 안그래도 입양한 딸이라 불안할텐데, 2주는 얼굴을 안봤으니 아빠의 애정을 더 의심하지 않겠어? 응?....ㅡ!!!! 으프프프프프!!"
"밉쌀맞은 주둥아리가 이건가보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래후이는 인정사정 없이 청연의 주둥아리를 꼬집어 집더니 뒤흔들었다. 제자리에서 펄쩍 뛴 청연이 손을 쳐내자 순순히 거뒀지만, 인간 입술은 퍽 부드럽다는 말과 함께 얼굴 한가득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띄운 채였다. 시원한 웃음이 어울리는 미남이라 평소라면 박수라도 쳐줬을텐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들어 저기압이야."
"네가 알아서 뭐하게."
"네 애인은 펄펄 날아다니며 활약 하고 있는 모양인데."
"당연하지 내 애인인데. 아프다고 이 맷돼지 영물아."
"남의 민감한 부분을 후벼판 보복이지."
민감한 부분이라. 이번에는 청연 쪽이 허, 하고 비웃었다. 대부분의 영물들이 각자의 생을 살아가는 것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과 엮이는 것도 모자라 딸을 입양한 래후이는 퍽 특이했다. 하지만 이번 일 처럼 오랜 시간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때 딸의 마음을 전혀 몰라준다는 점에서, 청연은 그를 부모 자격 없는 영물로 평가 하는 편이었다.
"딸을 2주나 내버려 둔 네가 어떻게 알아? 대영청이고 뭐고 다 관두고 애인이랑 놀고 싶은 내 마음을."
"가관이군. 내 딸도 너 같은 투정은 안 해."
"내버려 두셔."
어차피 누가 이해 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청연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다시금 건물 아래를 내려보았다.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던 대원들이 결계를 치려는 걸로 봐선,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묘한 충동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저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무엇을 믿고 대영청의 사람들은 대원들을 서로 신뢰할까. 아주 간단한 시도로 지금까지 쌓아 놓은걸 모조리 망칠 수 있다. 산성과 독성, 한바탕 장미꽃잎이 몰아치면 사람에게는 치명상이다. 대영청의 요원들을 공격한다면, 그대로 체포령이 내려지는 걸까. 추격대도 꾸려지고?
청연은 문득 스페치아의 고뇌를 알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마물과, 인간의 경계. 무엇을 기준으로 그들은 마물을 마물로 여기고 인간을 인간으로 여길까. 어쩌면 내가 인간거죽을 뒤집어 쓴 마물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거잖아? 스페치아 본인이 듣는다면 코웃음을 칠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고. 인간과 마물의 교차점에 있던 그 사내라면 이 환멸감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건 아닐까. 생과 사의 기로를 넘기면 여지 없이 따라붙는 지루함.
그렇다. 이건 철저하게 내 문제다.
근본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질 나쁜 문제.
살아 남았다는 인간다운 안도감도
힘든 임무를 해냈다는 성취감도
더욱 해내고 싶다는 향상심도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지루한 터널을 빠져 나온 해방감. 하지만 이 해방감 또한 그리 오래가진 못할테지. 청연은 무릎을 훑고 간 바람에 흐트러진 두루마기 끝을 내려보았다. 오늘 따라 삶이 긴 터널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유독 긴 임무였던 탓일까. 하지만 곧 임무가 끝난다는 걸 알면서도, 따라붙은 생각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깊은 밤, 별을 쫓아 걷지만 닿지 못하는 인생.
어쩌면 지상에 남겨 진 채 평생 늙어 죽을 거라면.
만약 그런 삶 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차라리.
"난간에선 내려오는 게 좋겠군. 결계 작업은 끝난 것 같으니."
"……."
"퇴근 해야지. 이번엔 제발."
"그래."
청연은 가볍게 대답한 난간에서 내려왔다. 균형 감각은 워낙 좋으니 비틀 거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래후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빤히 자신을 보고 있는게 웃겼다. 왜, 당장 뛰어 내릴 것 같아 보였나? 그렇게 농을 띄우자 우습게도 끄덕이는 게 아닌가. 누가 그렇게 쉽게 죽어줄까보냐. 헛웃음을 터트렸음에도 그는 진지해보였다. 하여간 진지충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영물이다.
"자청연."
"왜, 또."
"…피곤해보여."
"눈썰미가 좋네."
수능이 끝나고 나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경계근무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 답답했다. 기약없는 기다림은 질색이었다. 보리와, 바람이. 유환과 함께 키우게 된 고양이들은 마지막에 챙겨주고 나왔던 사료와 캔으로 충분했을까. 굶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가면 혼자 내버려 뒀다고 마구 할퀴러 드는 건 아닐까. 집고양이를 기르는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너는 뭘 하고 있을까. 아직도 현장에 남아 있을까. 아마 그렇겠지. 자신과 달리 성취감도 향상심도 가지고 있는 유환이다. 능력을 사용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보다는 '건실한' 요원이랄까. 지나가는 소식으로 네가 얼마나 활약했는지는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보다 더 그림자를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몸을 험하게 굴리곤 하니까ㅡ 안 보이는 곳에 쓸린 상처가 생겼을 수도 있겠다. 병원을 갔을 것 같지도 않고. 확인 해 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서로가 바쁜 시간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근무가 하기 싫어서 그래?"
"아냐. 그런게 아니라..."
밤은 깊어가고, 나는 크게 다친 곳 하나 없지만 유독 마음이 답답해. 질 나쁜 문제가 언제나 등 뒤에 따라 붙거든. 등 뒤로만 따라 붙어 다행이지, 너는 보지 못할테니까.
부디 너는, 아직까지는 내 앞면만을 봐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내 예쁘고 화사한 얼굴은 이 문드러진 등 뒤를 감추기 위한 꽃일 수도 있겠어. 나쁘지 않지? 나는 꽃처럼 아름다우니까. 그러니 넘어가줘. 아름다운 모습만 본 채로 넘겨. 답답하고 끈질겨서 나조차도 버리기 어려운 욕심을 가득 껴안은 자청연은 모른채로 지내줘. 이 터널 속에서 손을 잡을 상대를 만났음에도 갑갑함은 좀처럼 가시질 않지만 불멸의 생에 닿지 못할 대가로 하늘이 너를 내려줬다면, 감내할테니까.
"…그냥 유환이 보고 싶은 것 뿐 이야."
네가 보고 싶었다. 가늘게 치켜뜬 눈웃음이 보고싶어. 따뜻한 손을 빌려주고,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해.
근본이 변하지 않는 질 나쁜 문제를 끌어 안고 있는 남자여도, 부디 너는 계속 몰라주길.
평생 내 등뒤에 따라 붙을 환멸을 너만은 다 파악하지 못해주길.
그건 네게는 사랑받을 수 있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은 이기심이었다.
1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문은 아주 천천히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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