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열대지방에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 주였다. 장마철을 맞이한 날씨는 갈수록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습하고 더워졌다. 서있기만 해도 짜증이 절로 일어나는 걸 증명하듯, 호우주의보와 폭염주의보가 동시에 떨어졌다. 하늘에는 언제나 먹구름이 가득했고 잊을 만 하면 천둥과 번개를 동반했다. 하나만 하라고 버럭 화를 내도 이상 할 건 없었다.
덕분에 대영청은 일복이 터진 상태였다. 날씨는 생각보다 사람의 기분을 크게 좌우한다. 부정적인 사념은 에피타이저. 습도 높은 환경이 메인디쉬랍시고 짜증을 얹어 준 덕분에 장마철의 마물 출현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자청연은 그야말로 한탄을 했다. 제주도와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장마철이면 아예 밖에 나오지 않는 섬 사람들의 생활과 수도권 시민들의 생활은 차이가 컸다. 비가 와도 출근해야 하는 수도권 시민들의 숫자만 해도 약 2500만. 수능철이야 학생과 학부모들이 중심이었다고 해도, 이런 날씨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짜증을 나게 만든다. 덕분에 생성되는 마물의 숫자도 차원이 달랐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대부분 날씨 때문에 생긴 가벼운 짜증과 사념이었기 때문에, 생성된 마물들은 급이 높지 않았다. 하지만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만큼 쉴 시간이 없는 건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제 하루 처리한 마물의 숫자만 13체.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고 팀원들 앞에서 두루마기를 패대기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것 까진 좋았지만, 오늘의 태양은 또다시 떠오르는 법. 꼭 일곱번째 마물을 으스러트리고 짓밟은 다음 자청연은 진심으로 날씨를 저주했다. 차라리 폭풍이라도 한 번 훑고 가면 습기라도 어떻게 해결이 될텐데!
물론 한 놈을 해치우면 바로 이동해서 다른 놈을 해치워야 하는 알파팀보다, 민간인의 기억제거와 결계를 맡은 베타팀이 그 오만가지 재주로 지금쯤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치만 내 알바냐고 그게. 청연은 코웃음을 치며 두루마기를 들고 퇴근했다. 베타팀이 안쓰럽다고 현장에 머물어봤자 지원이나 해달라고 잡혀갈텐데 누구 좋으라고 그 짓을 하란 말인가. 자청연은 180도 걸음을 턴했다. 그리고 실컷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문을 열 때 까지만 해도 유환을 붙잡고 마물이 부숴먹은 우산에 대하여 불만을 있는 힘껏 투덜거리겠노라 다짐한 상태였다.
“유환~ 내 말 좀 들어보...”
게, 라는 말을 전부 끝내기도 전에 청연은 유환의 구두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숨을 푹 쉰 다음 문을 닫자 짧고 경쾌한 차임벨 소리가 오히려 쓸쓸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당연하게 유환이 있을거란 생각 자체가 오산이었다. 청연은 뒷목을 긁적이며 조용히 거실로 들어섰다.
같은 알파팀이지만 유환은 청연과 제법 달랐다. 지원이고 나발이고, 두 발 뻗고 잠이나 자려는 32세에 비해 능력 좋은 26세의 창창한 청년은 제 몸 굴리기를 밥먹듯이 했고 그걸 꽤 능숙하게 숨기기도 했다. 본인은 나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려나. 어차피 안아보면 다 드러나는데 뭐하러 숨기나 싶긴 하지만, ‘청연 걱정 시키기 싫어서ㅡ’ 라는 뻔한 이유를 채근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날에는 뒤도 안 돌아보고 퇴근 해도 될텐데.
축축한 두루마기와 옷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고 곧장 샤워를 했다. 같은 물줄기를 맞는 건데 비를 맞는 것과 기분이 천지차이다. 욕실에서 나왔을 땐, 비가 더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슬슬 현장과 유환이 걱정이라 청연은 괜히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제습 모드로 돌아가는 에어컨을 냉방으로 돌린 청연은 곧장 티비를 틀고 누워버렸다.
떠들썩한 케이블 채널 소리를 조금만 줄였을 뿐인데 창가를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살벌했다. 사람의 기분이 날씨에 의해 좌우되는 건 청연 또한 마찬가지. 결국에는 사람이라 이거지, 나도. 낮게 흘린 웃음 소리에는 유쾌함이 없었다.
어릴 적 부터 이런 날씨에는 마물 퇴치든 수련이든 개고생만 하고 돌아오기 딱 좋은 하루였다. 딱히 좋은 기억이 없다. 비오는 날 파전에 술이나 한 잔 하면 좋을텐데 이렇게 누운 시점에서 그건 힘들어 보인다. 하여간 어릴 적에 한 고생이 있으니 커서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라 주장하면 백영이라던가 팀원들은 웃기지 말라며 반박 할 텐데. 이런 소리나 해도 너는 내 편이 되어줄지 모르겠다. 청연은 히죽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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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함께 씻겨져 나가야 할 기억들. 핏자국도 마물의 흔적도, 산산조각난 윤리와 규범을 되씹다가 확인한 인격. 지나간 시간을 향한 안타까움도 가족이라 부른 자들을 향한 무심함도 빗속과 어둑한 새볔밤에 깨달았다. 찬란한 새벽별을 등진 밤에 사람의 길을 포기하기로 했고, 남은 것도 남길 것도 없어야 할텐데.
“너무 늦었잖나 유환.”
나는 미련이 많은 건가.
아니면 자네가 내 삶에 가질 마지막 미련이라 이러는 걸까. 아직 그걸 구별 하지 못해.
우산을 쓰고 달려간 너는 이상할 정도로 비를 많이 맞고 있었다. 감기 걸리겠다는 뻔한 말을 하기도 전에 일단 우산을 네게 씌웠다. 끔찍한 장마철이다. 물에 젖은 생쥐꼴이 따로 없지 않나. 척척하게 젖은 두루마기 소매가 무거워보였다.
우산 위로 튀는 빗방울 소리가 유독 커서, 네가 무어라 말하는 걸 잘 못 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라면, 아니 혹은 가족이라 할지라도.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은 사람은 이 빗소리에 네 목소리를 그대로 흘려 버릴 수도 있겠지.
“많이 젖었네. 비가 많이 내리긴 하지?”
짐짓 가볍게 한 말에 네 고개가 작게 움직였다. 극히 최근 드러기 시작한 눈동자도, 빗줄기 때문에 축 내려온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질 않았다. 유환은 마치 지금이라도 이 비와 함께 어디로 휩쓸려 갈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청연은 그게 싫었다. 그게 싫어서 유환이 입을 열어 제 이름을 부른 순간 우산을 뒤로 던져버리고 그를 가만 안았다.
“...다 젖겠다.”
“알고 있네.”
알다마다. 이런 빗줄기 아래에 너를 혼자 두어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도, 네가 비를 싫어한다는 것도 나는 안다.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며 하나둘 너에 대한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비오는 날 네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이다. 너도, 나도, 결국에는 사람이지. 비오는 날을 좋아 할 수 없다. 그래서 청연은 유환을 가득 안았다. 이게 해줄 수 있는 전부라는게 한심하지.
사람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극히 한정적이다. 하나 뿐인 연인이 왜 비오는 날을 싫어하는 지 청연으로는 알 방도가 없었다.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슨 말을 꺼내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걸 알고 싶다는 욕심이 가끔 고개를 들곤 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부리고 마는 욕심이라. 분명 얄궂은 일이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걸 버리는 와중에 너를 만났다.
나는 이 빗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인간적인 감정을 자각한다.
“고생했어. 유환.”
너를 사랑한다. 깊게 사랑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사랑한다. 그리고 이 감정에서 시작되는 욕심들이 하나둘 늘어만 간다. 비오는 날의 너를 혼자 두고 싶진 않다, 네 우울함의 근원을 내가 알고 싶다. 세상을 다 가진듯 웃어도, 세상에서 버림 받은 것 처럼 울어도 그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해. 내가 보지 못하는 곳, 닿지 못하는 곳에서 너를 남겨두고 싶진 않았다. 욕심은 뻗어나갈 뿐.밤새도록 너를 안은 채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라도 반복하며, 세상의 흔하디 흔한 연인들처럼 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는 아직 서로를 알듯 모르기 때문에, 짊어지고 온 것들을 다 내려놓지 못하기에 손을 잡고 뒷모습을 쫒는다.
비는 세차게 내렸다. 피부에 닿는 굵은 빗방울이 계속 맞으면 아플 정도였다. 맨몸으로 맞기엔, 장마철의 빗줄기는 매섭고 차가웠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한 명이 아닌 두 사람이란 증거로, 체온은 나눌 수 있었다. 청연은 조용히 유환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돈 해 주었다. 웃는 얼굴이 보고싶었다. 그리고 너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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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 여기서 잤어?”
“뭐? ...헷취!”
유환은 재빠르게 우왓, 하는 목소리를 내고 뒤로 몇 발자국 떨어졌다. 한편 깜짝 놀란 청연은 몇 번 눈을 꿈뻑였다. 뭐야, 나 언제 잠들었어?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유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한두시간 정도 선잠에 들었던 모양인데, 아니 그것보다.
“감기야?”
“...아니 잠깐 에어컨을 틀어서 그런가... 헌데 엄청 젖었잖나 자네.”
“응, 바깥에 비가 장난 아니라서... 청연은 괜찮았어?”
“씻었으니 괜찮아. 자네처럼 쫄딱 젖어 오진 않았어.”
거두절미하고 수건으로 머리부터 말리던 유환은 나도 씻어야겠네ㅡ 라며 중얼거렸다. 소매 끝, 까만 슬랙스바지가 젖은 채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한숨 쉬며 비오는 날씨에 대해 투덜거리는 네 옆모습은 꿈 속에서 보던 것 보다는 나았다.
뭐가 낫냐고 물어보면, 글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우울 해 보이진 않았다. 왜 그런 모습으로 네가 내 꿈에 나온 걸까?
“이리 와봐.”
“뭐? 왓, 청연 나 지금 옷 전부ㅡ”
“괜찮으니까.”
빗줄기는 여전히 거세다는 걸 증명하듯 창가를 몇번 두드렸다. 청연은 무작정 유환을 끌어 안아 소파에 기대도록 했다. 뜬금없는 행동에 너는 당황한 듯 했지만, 뭐 어떠랴. 네가 손에 닿을 거리에 있다. 이 세찬 장마비를 헤치고 곁으로 돌아온다.
언제나 같은 걸 바란다. 그 꿈 속에서든, 이 현실에서든 바라는 건 하나야. 너를 빗줄기 속에 혼자 남겨두고 싶진 않다.
“뭐야, 나 없어서 외로웠어?”
“그런 걸로 쳐도 좋아 핫핫핫.”
편하게 차려입은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끌어안자, 옷이 다 젖겠다며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다만 이럴 때를 위한 방수 기능이 아니겠냐는 너스레를 떨자 유환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청연은 이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짜증나는 장마철이지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각자 다르다.
“오늘도 고생했네. 이렇게 쫄딱 젖어가지고 오면 못 써.”
“푸흐...알았어. 조심 할게.”
나에겐 자네가 있으니 웃을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어쨌거나 앞으로 함께 하는 동안 이 집에는 우산이 가득하겠지.
청연은 꿈에서 했던 것 처럼 유환의 앞머리를 쓸었다. 깊은 곳 까지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얽히는 순간은 각별했다. 곧 이어질 키스를 눈치 채서 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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