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서 오십시오 노아님. 어디로 안내 할까요?
"……최상층. 카이바 세토의 사무실."
엘리베이터 시스템은 낭랑한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하는 안내음을 냈다. 곧 이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노아는 드디어 무릎에 힘이 풀려서 주저 앉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죽어도 보여 줄까보냐, 이런 꼴사나운 모습.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중앙 냉방이 고장났다는 소식은 살인적인 더위와 함께 사원들의 근무 의욕을 죄다 꺾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카이바 노아는 전신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카이바의 사장실로 직행 중인 엘리베이터 안의 유리에 이마를 댔다. 시원한게 퍽 기분 좋다.
카이바 가문 장남 카이바 노아의 하늘을 찌르는 프라이드는 차남인 카이바 세토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체력 관리에 실패한 꼴 따위 절대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철저하게 아웃도어파인 세토와는 달리 노아는 슈퍼 컴퓨터를 가지고 도미노 시티의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가지고 노는 걸 즐기는 인도어 히키코모리에 가깝다. 하지만 히키짓도 히키짓 나름이지. 냉방 시스템이 고장난 상황에서 서른대가 넘는 서버와 슈퍼 컴퓨터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좀처럼 자신의 왕국에서 나오려 들지 않는 노아마저도 자신의 홈그라운드를 탈출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재앙이 따로 없었다. 한 여름 36도까지 치솟은 더위는 말 그대로 노인들을 픽픽 쓰러지게 만들었다. 멀쩡하던 청년들에게도 외출은 자제해야 한다며 전국의 더위와 기상을 뉴스에선 쉴새없이 보도했다. 도미노 시티의 모든 학교들은 이미 방학을 맞이했으니 모쿠바처럼 아직 어린 아이들이 속속 쓰러졌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지만, 멀리 갈 것 없이 애들 보다 여기 있는 어른들이 재난에 직면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카이바 코퍼레이션 건물 전체에서 빵빵하게 틀어댄 냉방 시스템의 가동은 정지한게 언제였는지 담당자도 대답하질 못할 정도였다. 뭐든 과유불급인 법이라고, 지나치게 가동시킨 시스템은 결국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아침부터 정지 된 상태였다. 그리고 수리업자들은 지금도 발에 땀이 나도록 카이바 코퍼레이션 건물을 돌아 다니고 있겠지만, 제 아무리 노력 해도 오늘 하루 안에 전부 고쳐 낼 순 없겠지.
아마 지금 사내 의무실에 간다면 사원 대부분이 열사병과 나른함을 호소하며 침대에서 얼음 주머니에 기대서 끙끙거리고 있을 것이다. 노아의 그 판단은 정확했다. 다만 카이바 가문의 장남인 내가 감히 평사원들과 같은 침대를 쓰겠냐- 라는 이상한 프라이드가 발동된 노아가 당장 생각 해 낸 장소란, 결국 철천지원수같은 카이바가 사용하는 드넓은 사장실이었다. 세토의 얼굴을 마주 하면 열 뻗힐 때가 한 두번이 아니지만 이미 열 때문에 쓰러지기 직전이다. 이제 와서 세토의 얼굴 정도 봐도 아무것도 안 변할거라고.
목표는 세토가 잘 사용하지 않는 사무실의 소파다. 지금의 솔직한 기분은 누워서 차가운 칼피스와 시원한 물수건으로 이 더위를 식힐 수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노아는 비척거리며 복도를 걸어나갔다. 역시 여기도 냉방이 정지 된 건 마찬가지였다.
"나 들어가."
"이미 들어왔잖나."
"시끄러…."
정말 첫 마디부터 사람 열 받게 만드는 녀석. 아아아 안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더 열 오르게 하지 말란 말이야. 이런 날 까지도 꿋꿋하게 까만 티와 긴바지를 입고 일하는 세토가 조금 존경스러워지려 했더니 하여간 말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군 반바지 차림에도 더워 죽을 것 같은데!
노아는 세토에게 줄곧 들고 있었던 서류철 하나를 내던졌다. ㅡ그거. 전에 네가 말한 카이바 랜드용 개량형 솔리드 비전 시스템이니까 보던가 말던가. 노아는 그 말 만을 남기고 거의 무너지듯 카이바의 소파에 드러누웠다. 배려심 넘치는 이소노는 이 소파에 카이바가 누워도 문제 없는 사이즈로 가구를 맞춰둔 거겠지. 하지만 노아는 물론이고 누구도 카이바가 이 소파에서 누워있는 걸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카이바 또한, 노아가 이 정도로 힘없이 열에 끙끙거리는 건 처음 봤다.
카이바의 비상한 머리회전력은 이렇게 더운 날에도 정확하게 노아의 의중을 읽어냈다. 서류따윈 구실이다. 아마도 컴퓨터와 서버열에 몸이 녹아내리기 직전까지 쓸때 없는 고집을 부리며 쳐박혀 있다가 쓰러지기 직전에 탈출 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의무실을 가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노아가 카이바를 파악 하는 것 만큼 카이바 또한 노아를 파악했다. 카이바 가문의 남자들은 어쨌거나 프라이드 하나는 확실하니까. 자기관리를 포함해서 자신의 나약해진 모습을 남에게 쉽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카이바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평소보다 조금 더운 것 뿐인데 소란스럽군."
"웃기지 마, 너처럼 땀구멍이 없는 녀석은 절대 모를 거야…. 사람이 아닌게 분명해……."
울컥 하는 마음에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노아는 코웃음을 치고 이쪽을 바라보는 카이바 때문에 잠깐 발끈했지만, 다시 힘없이 고개를 쳐박았다. 아- 이 소파 면 커버 정말 좋은 거다. 엄청 시원하다. 더워 죽을 것 같다.
노아는 자신을 가만 들여다보는 세토의 시선을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대놓고 무시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지하보다는 나은 공기다. 나른함과 더위에 절여진 몸을 가만히 눕힌 채 노아는 눈을 감고 피곤함과 어깨동무를 하고 찾아오는 졸음을 받아들였다. -여긴 호텔이 아니다. 그렇게 더우면 저택으로 돌아가.
"안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세토."
눈이 감기기가 무섭게 노아는 잠이 들었다. 잠에 들었을 때 만큼은 천사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모쿠바와 비슷하다. 카이바는 코웃음을 치며 노아가 던진 파일철을 열어재꼈다. 물론 발끝으로 노아가 보지 못한 책상 아래의 선풍기를 강풍-회전-으로 조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사장실의 문은 노아의 갑작스러운 침입으로부터 정확히 이십분 후 다시 벌컥 열렸다.
"형님, 노아는…아 역시 여기네."
"…………모쿠바."
양 손에 이온음료캔을 들고 나타난 모쿠바의 모습은 제법 파격적이었다. 자켓은 이미 벗어던진지 오래였는지 한 술 더 떠서 천하장사마냥 어깨가 전부 보이도록 걷어 올린 소매가 퍽 인상 적이다.
뽀얗고 말랑말랑해보이는 팔뚝을 대놓고 보이고 다니는 모습이라니. 가끔 카이바 조차도 과보호가 지나치다고 평가하는 노아가 일어나 있었다면 발작적인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행색이 말이 아니다만."
"응 진짜 너무 더워……기술반은 오늘 못 견디고 단체로 반차 쓴거 알아? 아 형님도 역시 덥지?"
모쿠바는 이얍 하고 일부러 유난스러운 동작으로 카이바의 목 뒤에 포X리 한캔을 가져다 댔다. 꽤 오래 들고 다녔는지 조금은 미적지근한 표면이었지만 그래도 서늘한 온도가 기분을 한결 낫게 했다. 덕분에 카이바는 그날 처음으로 자체적인 휴식시간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모쿠바에게 받은 음료수 캔을 깐 카이바는 다시금 동생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발목 위로 정장 바지를 걷어 올리기까지 했다. 등 뒤에 붙여진 파스 같은 건 아마도 냉각 시트다. 용케 저런 것들을 구했다, 하고 감탄 할 새도 없이 모쿠바는 사무실 소파에서 뻗어버린 노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빈 파일철로 부채질을 해주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칭찬 해 줘야 할 배려심 넘치는 행동이지만, 어쩐지 심술궂은 어조가 먼저 튀어나온다. 카이바는 픽 웃으며 말했다.
"부사장이 그런 꼴로 돌아다니면 사원들이 우습게 볼 거다."
"그런가? 그래도 이런 날 더위 먹고 쓰러지는 쪽이 훨씬 더 볼품 없잖아?"
프라이드 때문에 비상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사장실로 들어와 더위에 뻗어버린 노아나, SP들도 보지 못하는 각도에 설치된 선풍기가 카이바 가문의 장남과 차남의 프라이드를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지만 막내 동생의 프라이드는 바로 이런 곳에 있다. 그리고 이런 명백한 차이를 노아는 눈에 보이도록, 카이바는 말 없이 자랑스럽게 여기곤 했다. 저도 모르게 터진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카이바가 중얼거렸다. 노아에게 그 말 그대로 전해 봐라. 녹음 해서 들려 주고 싶을 정도로군.
"다 들리거든…누가 사원들 모두가 코웃음으로 사내게시판에 악플을 달 정도로 한심하다는거야."
"엑? 노아 일어나 있었어?!"
"비약이 심하군. 깼으면 일어나라. 코고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일을 못 하겠군."
"누가 코를 골았다고ㅡ모쿠바?!! 그 꼴은 뭐야?!"
예상대로 비명을 내지르듯 경악하는 노아 때문에 카이바의 미간은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카이바 가문의 삼남이 그런 꼴을 하고 다니면 안된다느니, 자켓과 넥타이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말을 하는 반바지 차림새의 발칙한 장남 카이바 노아를 진정 시키는 건 언제나 모쿠바의 몫이다. 때문에 카이바는 완전히 노아를 무시하기로 했다.
한참 곤란해하며 웃어넘기던 모쿠바가 주머니 속에서 냉각시트를 꺼내서 노아의 이마에 찰싹 붙여줄 때 까지 무더운 더위만큼이나 따가운 노아의 잔소리가 뒤를 이었다. 다만 신기하게도 그건 냉방 시스템 고장이나 형제들의 연이은 방문으로 업무가 밀려버리게 된 카이바에게 그리 불쾌하기만 한 광경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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