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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の思うままに





연이은 야습과 한낮의 출진이 끝나고, 심신자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도검남사들 또한 며칠 만에 맞이하는 휴식 시간이었다. 목적 없이 바깥 정경을 바라보며 가만히 차를 입으로 옮기던 와중에 그와 시선이 맞았다. 

그는 고개를 아주 약간 숙이며 웃어보였다. 연일 선봉을 맡은 것은 물론이요 당번 일까지 결점 없이 해내는 이 치곤 꽤나 여유로운 혈색이다. 주군의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행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휴식 시간조차 정좌 자세로 곁에 붙어있는 그에게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일관된 자다. 그래서일까.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만 것이다. ㅡ하세베군. 


"처음 만났을 때 제게 말했죠? 원한다면 가신을 베고 사찰을 태우겠다고."

'예 주군."

"…정말로 그럴 수 있나요?"


충의를 의심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저 순수한 궁금함이다. 검비위사의 맹공 앞에서도 굴지의 의지를 다진 채 편성된 부대를 이끌었던 그가 이제와 대답을 바꾸진 않겠지. 다만 확인 하고 싶었다. 그의 명예와 충의는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궁금해진 것이다.

헤시키리 하세베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대답한다. 


"예."


ㅡ그리곤, 물음을 듣자 마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것 처럼 미려한 눈매를 살포시 굽히며 웃기까지 했다. 

저도 모르게 홀리듯 바라보게 만드는 미소로, 민들레 홀씨를 꺾어 날리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거짓 없는 순수한 마음을 담아 끔찍한 말을 입에 담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주군. 원하신다면 가신의 목을 베어 널어놓겠습니다. 사찰 또한 불태우도록 하지요. 승려들의 나막신과 염주 한 알도 남지 않도록 절간 곳곳을 잿더미로 태우겠습니다. 경전과 불상을 치우고 주군의 상석을 마련하겠나이다."

"……."

"모든 것은 주군께서 원하시는 대로."


종종 허언 섞이지 않는 말의 무서움을 깨달을 때면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고 만다. 그리곤 지금처럼 얼굴을 살필 때마다, 언제나 진심 어린 충성의 빛만이 자신을 향해 송두리째 쏟아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가 쏟아내는 그 충성이 어찌나 무겁고도 깊은지, 가끔은 그를 가장 깊고 안전한 곳에 가만 놓아두는 것이 상책일거란 다른 도검남사의 충고가 떠오를 정도였다. 


"출진의 준비를 할까요? 하명하십시오."

"…아니오."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목숨의 무게를 모르는 도구였기 때문일까. 피를 묻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헤시키리 하세베의 용맹함은 때론 무섭다. 마냥 곁에 붙잡아두고 싶을 정도로. 


"사찰이 불타는 건 바라지 않아요. 나막신과 염주는 제자리에, 경전과 불상은 설법과 기도를 통해 안식을 갈구하는 자들을 위해 남아있길 바래요. 가신의 목을 베는 건 더더욱."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할까요."

"……."


가차없는 진실 속, 결코 바뀌어서는 안될 역사를 지키기 위한 사명 속에서.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 당신의 명예와 충의가 있어주길 바라는 장소.


"저의 곁에 있어주길 바래요."

"……."

"마냥 붙잡지는 않을 거에요. 당신의 충의가 누군가를 불태우지 않고, 나의 다짐이 자칫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사명이 끝날 때 까지 함께 있어주기를 바래요. 그것 뿐 이에요."


금세 비워버린 찻잔을 내려놓고 얼마나 지났을까.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이를 슬쩍 흘겨보자, 놀랍게도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심해버린 속내를 들키고 만 것일까. 그는 조용히 다가와 빈 찻잔에 다기를 채우며 속삭였다. 당신은 참으로.


"ㅡ참으로 곤란하신 분입니다. 명령이 아닌 말에도 이 헤시키리 하세베가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드시니."

"……고마워요."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분에 넘치는 건 내 쪽인걸요, 그렇게 말하게 될 날이 과연 올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건네는 찻잔을 다시 받아들인 채 그녀는 안도 속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