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소개팅
자청연은 삼십이년의 삶을 돌이켜 볼 때마다, 자신을 예스맨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윗사람의 명령에 잠자코 따르는 편인 걸 포함해, 주변의 의견이나 권유에는 가능한 예스라는 대답을 돌려준다는 어처구니없는 자체평가의 결과였다. 실제로 그가 예스맨인지는 차지하더라도 예스의 대답을 돌려주는 이유란 참 단순했다. 주관이 없어서는 당연히 아니고, 호감을 쉽게 높이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며칠 전 그는 베타팀의 어떤 아리따운 금발을 지닌 아가씨의 말을 넘길 수가 없었다.
- 좀처럼 접점이 없다면서 나한테 말을 건네 왔는데, 청연이라면 관심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 어떤 일 이길래?
이틀 전 르네 하워드, 약칭 '르네 아가씨' 께서는 햇빛을 담뿍 머금은 황금 모래사장 같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약간 곤란한 얼굴을 했다. 도저히 입맛에 맞지 않는 식당 밥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참고 있던 청연으로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르네에게서 나온 화제는 분명 그녀의 정확한 안목을 증명하듯 청연의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었다.
- 다들 어느 정도 한국어도 익숙해졌겠다, 이래저래 생각은 있는데 마땅한 상대가 없나봐. 그래서 말인데...
신흥종교의 권유 혹은 연대보증의 가능성이 보였더라면 제아무리 청연이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충분한 호감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성의 있는 반응과 함께 거절 했겠지. 그러나 르네가 꺼낸 이야기는 전혀 다른 주제였다.
- 청연, 혹시 5:5 소개팅 생각 있어?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훗날 지옥의 소개팅으로 불릴 일화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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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힘내! 너의 존재 화이팅!]
기숙사 라운지로 가는 길에 돌아온 카톡은 다음과 같았다. 이 해맑은 반응은 기대했던 반응과는 너무도 달랐다. 청연은 홀로 분을 삭이느라 답장 보내길 포기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말한 건 대체 누구였던가. 일말의 아쉬움도 비치지 않는 답장은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붙잡아 본 지푸라기였지만, 적어도 유환은 이럴 때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가 아님을 다시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청연은 이제 자신의 주변에 더는 잡을만한 지푸라기가 없음을 알았다.
첫 지푸라기는 베타팀의 점잖지만 배려심 넘치는 스무살의 청년이었다. 중앙 지영에서 여태껏 몇 번이나 청연에게 구원에 가까운 손길을 내밀었던 호감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정말이지, 소개팅에 돈을 쥐여 주고서라도 좋은 인연을 찾아보라고 등을 떠밀고 싶은 상대였다.
그러나 예상대로 호는 청연의 제안에 당혹스러워 하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왜ㅡ?!' 라고 터져 나온 청연의 물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따박따박 반박이 돌아왔다. 소개팅 상대들을 향한 넘치는 배려는 물론, 본인에게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운동화 끈을 매지도 않았으니 달릴 수 없다는 침착한 비유는 더욱 청연의 호감을 사서, 호를 시인 같다며 칭찬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 거절은 자청연이라는 남자가 드물게도 성인 남자에게 명백한 호의를 보내는 와중에 통했다.
청연은 '호를 곤란하게 만들 순 없지.' 라는 대단히 상식적인 이유로 고집 피우기를 관두었다. 아마도 소개팅을 거절한 호 본인은 그런 상식적인 이유로 이 남자가 고집 피우기를 관두는 일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오래토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 지푸라기는 유환이었다. 트레이닝 룸에서 운동을 끝내고 돌아가던 참이라는 이 친구를 보자마자, 청연은 너 마침 잘 만났다며 눈을 번뜩이며 그에게 소개팅 권유를 한 참이었다. 그러나 그 권유 또한 곧바로 실패했다. 유환은 도대체 매번 어떻게 앞을 보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앞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청연의 권유를 재차 확인했다.
- 소개팅? ...너랑?
- 자네와 나를 포함한 세 명.
- 응, 싫어.
단칼에 거절이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권유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넌 또 왜ㅡ?! 라고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유환은 상쾌한 거절에 그치지 않고 '소개팅 자체는 둘째 쳐도 어쨌든 네 옆에선 안할 거야.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아.' 라는 묘하게 울컥하게 만드는 말로 확고한 의사를 표명했다. 어쩐지 열 받는데다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대답이라 그 직후 신나게 샌드백을 두들긴 청연이 끈질기게 너 진짜로 안 할 거냐는 카톡을 보냈음에도 돌아온 대답이 저러했다. ㅇㅇ 힘내! 너의 존재 화이팅!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청연은 생각보다 소개팅 멤버를 모으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쩌면 남자 측 인원을 구하는 것보다 소개팅 장소를 물색하는 게 쉬운 일일지도.
그만큼 상대가 다섯이나 되니 이쪽도 인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3:3이나 2:2 라면 모를까, 소개팅에 열성적으로 참여할만한 남자 인원이 청연 외에 네 명이나 있는가에 대해선 글쎄. 신중함이 결여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 할까보냐. 자청연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인원을 맞추고 의욕도 불어 넣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심 때문이다. 좋아. 사심에 충실한 나는 멋있지. 한껏 고취된 발걸음은 그렇게 기숙사 라운지의 문턱을 밟았다. 예상대로 기숙사 라운지에는 몇 명의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이 청연과 구면이라는 점은 퍽 다행스러웠다. 청연은 화알짝 웃으며 입 속의 모터를 돌렸다.
"ㅡ조조를 생각 할 때 마다 나는 분향매리의 꿈을 현대사회에서 실현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뭐?"
"what?"
"위나라의 조조 말일세. 삼국지 모르나?"
도대체 이 인간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딱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연은 그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다짜고짜 소개팅을 내밀어봤자 확고한 거절이 돌아올게 뻔했다. 그렇다면 혀라도 매끄럽게 돌아 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놔야 이야기를 꺼낼 것 아닌가. 예상대로 기숙사 라운지에서 탄산음료를 마시던 외국인 이인조는 청연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삼국지는 아는데... 메리? 무슨 메리?"
"분.향.매.리. 조조는 처첩을 열 넘게 거느렸다고 하네. 능력 한번 좋기도 하지. 물론 실제로 그만한 능력이 있던 인물이었으니 그 많은 여자를 거느렸던 거겠지만ㅡ하여간. 조조는 유언으로는 자신이 죽으면 남은 향을 여러 부인에게 나눠주고 첩들에게는 할 일이 없으니 신발을 만들어 파는 법을 배우라 했네. 그만큼 죽기 전에 남은 처첩들을 심려하고 아꼈다는 말이야. 개인적으론 사내였고 영웅이었던 사람의 유언답다고 생각해. 로망이 있거든, 사나이의 로망. "
"mate, 쟤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몰라. 나한테 묻지 마."
"나는 자네들에게도 그 기회를 주고 싶은 거야. 어때?"
자청연에게 '자네들'로 지칭된 외국인 두 사람, 테오도르 휴어와 제이든 하워드의 표정은 볼만했다. 두 사람은 청연의 길고 긴 말을 다 듣자 김빠진 맥주를 연달아 깔때기로 퍼마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골 터지는 한국어를 해석 중인 두 사람에겐 안쓰럽게도, 청연은 해석을 달아줄 생각이 없었다. 기숙사 라운지에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청연에게는 행운이었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일타양득의 기회가 아닌가.
테오도르와 제이든은 청연의 마지막 말만은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무슨 기회인데? 라고 되물었고, 청연은 더욱 더 입술이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입술에 침을 발랐다.
"외국식과는 거리가 있지. 따라서 한국의 문화적 체험임은 틀림없어. 게다가 인간적인 경험이기도 하지. 꾀꼬리도 암수 한 쌍이 정답게 하늘을 노니는데 다가오는 봄을 앞두고 옆구리가 허전하기 짝이 없잖나. 따라서 사랑의 작대기가 오가는 와중 기적적으로 다섯 쌍의 인연이 함께 탄생하는 빅픽쳐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남의 장을 꾸며봤네. 세상사, 오작교에서 누굴 만날지 모르는 일이잖아? 나는 자네들이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청연 오빠. 저 두 사람 표정 안보이세요? 그렇게 말하면 저 오빠들은 못 알아들어요."
"비, 맞아. 바로 그 점이 노리고 있는 포인트라서."
이 오빠 봐라, 라는 얼굴로 은비는 패션 잡지를 넘기길 멈추고 이쪽을 보았다. 청연은 은비를 향해 활짝 웃으며 '퍽 좋은 밤이지?' 라는 인사를 건넨 후 다시 목표물을 응시했다. 테오도르와 제이든은 두 사람 다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이 상황이 어지간히 짜증스러웠는지, 테오도르의 역정 섞인 말이 청연이 아닌 은비 쪽으로 향했다.
"비, 지금 얘 뭐라고 말 하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영국이랑 캐나다 둘다 의미가 통하는지 모르겠는데, 그걸 하잔 말이야. 여러 명이서, blind date."
"wait, 뭐?"
"맞죠? 다른 말론 뭐가 있지, Speed date?"
"청연! 싫어!"
이제야 비로소 의미가 통했다는 점은 축하 할 만 했지만 예상대로 격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테오도르와 제이든이 버럭 외쳤다. 시위용 피켓만 없다시피 했지, 결사반대와 항거의 의사가 벌써부터 만연 했다. 그러나 청연은 여기서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기에 태산처럼 부동의 차렷 자세를 취한 후 설득을 시작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일 대 일이 아냐! 오 대 오, 순수하게 만남에 의미를 가지는 모임은 결코 흔하지 않다고! 흥미를 가질 계기는ㅡ"
"흥미로운 대화 주제로군."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심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소름이 한꺼번에 돋았다. 어느새 제 몸을 기체화 시켜서 라운지에 들어온 사내는 주변의 온도를 순식간에 낮춘 것도 모자라 검은 연기를 남기며 서서히 제 몸을 재구축한다는 등장 방식을 선택했다. 비일상의 끝을 달리는 대영청에서도 남자의 존재가 각별하게 부각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청연에게 감마팀의 스페치아가 각별해진 이유란 비일상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족히 일백 개는 넘어 보이는 촉수가 켜켜이 쌓여 손가락 연골로 변형되고 새로 구축되고 있는 마물성이 이제와 새삼 눈에 들어 온 건 더더욱 아니고.
"스피! 얘 좀 어떻게 해 봐!"
"당신 말에 따르면 그 만남의 장이란 문화적인 체험인데다 인간적인 경험인 건 물론, 사나이의 로망이라는 말이군."
"그렇네."
"어째서? 남성 다섯과 여성 다섯이 만나는 경험일 뿐이다. 그런 기회가 그리 드물지 않을 텐데."
사심에 눈이 달려있다면 이 순간 청연의 눈이 가장 번뜩였을 것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대어를 낚을 기회임을 알았다. 따라서 눈앞의 마물을 자극할 단어를 선정하는데 최대한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32년간 예스맨으로서 살았으면서도 손해 안 보는 선택을 하느라 매끄럽게 갈고 닦은 혓바닥을 움직였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뒤에서는 C급 마물을 작살낼 수 있다는 외국인 능력자 둘이 본격적으로 테이블을 치며 항의하고 있었으니까. 야 너 내 말 안 들려?!
"자네 말은 반만 맞았어. 분명 불특정 인원이 다섯씩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냐. 하지만 이 기회에는 '의도'가 있거든."
"의도."
"그렇네. 의도. 총 열 명의 남녀가 상대들을 진지하게 탐구한다는 걸 목적으로 하네. 존재의 탐구지. 분명한 취지가 있는 만남의 기회야. 흔할 리 없지 않겠나?"
"존재의 탐구."
하나하나 청연이 언급한 단어를 곰씹고 있는 스페치아의 모습은 서있기만 해도 근사했다. 원채 비율이 좋은 몸매인데다 손 끝 까지 검은 장갑으로 둘러 싼 시크함이 있다 보니 잘 입혀둔 마네킹이 걸어 다니는 느낌을 받곤 하던 사내다. 제 입으로 말한 게 괘씸하긴 하지만 분명 비인간적이기에 용서되는 잘생김이 있다. 이 쯤 되어야 나랑 잘생김 트리오를 꾸리지, 하는 납득이랄까. 물론 스페치아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패스하자. 지금의 스페치아는 아마도 마물용 국어사전에서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 주석을 달고 있을 것이다.
르네가 들고 왔던 이야기는 해외에서 대영청으로 이동해온 여사원 다섯 명과의 소개팅이다. 스페치아 또한 분명 신분상 외국인이었으며, 누가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는 비쥬얼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청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직감적으로 던진 낚싯바늘 끝을 바라보는 어부의 기분이 이러할까. 입질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은 영원처럼 길었다.
"그 말대로라면 흥미가 있다."
입질이 왔다. 두 말 없이 낚싯바늘을 끌어 올릴 차례였다. 청연은 입 안에 달아둔 낚싯대 릴을 힘차게 감았다.
"자넨 존재 자체만으로 '일부의 조건'을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어. 하지만 현재로선 결여된 조건이 있어서 '미달'인데... 약간의 '보완'이 필요하네. 하지만 걱정 마. 그건 '입력' 할 사람 만 있으면 되거든. 그리고 그 사람은 널 기꺼이 도와 줄 거야. 때론 자네가 충분히 납득할만한 '명령'을 고안해 낼 사내거든."
입력과 명령은 분명 이 남자를 관통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아마도 모레 있을 소개팅에 대해, 청연이 상상하는 그림과 스페치아가 상상하는 그림은 천지창조와 아귀도만큼이나 다른 그림일테지만 지금은 그딴 걸 고려 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스페치아의 눈동자는 차분해지더니 지극히 형식적으로 해당되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청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한 자리의 주인공. 눈앞의 맹수이자 야수이자 마물을 목도함에 그치지 않고 상당히 근거리에서 접촉하며 교류하는 한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ㅡ씨세로를 불러와."
곧 스페치아의 부름에 나타날 그 남자의 반응이 어찌 되었건 청연은 당당했다. 자신의 노트북이 반파되었음에도 통렬한 원망을 터트리지 않는 남자임을 직접 보고 듣지 않았나. 민 우와 접촉함에 있어서 신중하게 대처했어야 한다는 교훈을 청연에게 억지로 남겼던 남자다. 그 정도로 교훈을 나눌 줄 아는 자에게 경험은 큰 재산일 테고. 물론 재산이 안 되더라도 끌고 갈 작정이었다. 이제와 멤버를 교체 하거나 새로 물색 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내일 까지는 르네 아가씨에게 멤버를 알려준다고 했거든.
한편 일련의 광경을 전부 목격한 은비는 드디어 잡지를 덮어버렸다. 그리곤 스페치아가 사라진 자리에서 여전히 원성이 자자한 외국인 이인조에게 말도 안 되는 한국어를 쓰는 청연의 귀에도 들리게 중얼거렸다.
"...죽 쑤기도 힘든 멤버인데 개에게 주기까지 해야 한다니."
죽 쑤어 개 좋은 일 한다. 열심히 애써 노력한 결과를 빼앗기거나 남에게 좋은 일만 시킨다는 속담에 빗대서 한 말을 테오도르나 제이든이 알아들을 리는 없다. 즉 청연에게 넌지시 암시한 말 일 테지만, 청연은 말없이 특유의 구김살 없는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본인은 철저하게 받아먹을 개의 입장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내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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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틀 후 강남역의 어느 레스토랑에서는 대단히 희한한 소개팅이 열리고야 말았다. 르네의 소개로 시작된 이 소개팅 상대는 모두가 대영청의 근무자였다. 베타팀과 델타팀 중에서도 행정부에 과학반과 영교반으로 구성 된 여성 멤버들은 마주친 적이 없는 인물들임은 확실했다. 대부분이 외국인으로 구성 된 탓일까. 단체 손님을 안내하던 테이블 담당자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남성들 중에서는 여전히 별로 탐탁지 않은 태도로 안내된 테이블까지 삐딱하게 걷는 걸 고수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누구냐 하면, 일단 이 사람.
"모처럼 인데 표정 좀 펴게 제이든."
"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줘 그럼."
"새 옷까지 사서 까리하게 차려 입었으면 입가에 스마일 정도는 해야지, 응? 맥도날드에서 팔았다는 거 몰라?"
"몰라. 그런 걸 왜 파는 건데?"
대영청에 소속된 외국인들이야 어딜 가든 눈에 띄기 마련이지만, 제이든 하워드는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당장이라도 영화 속에서 튀어 나온 것 같은 은발과 붉은 눈동자는 물론이거니와 눈 밑에 자리 잡은 문신은 열중에 아홉은 뒤를 돌게 만드는 비쥬얼이었다.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다. 청연 또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내로서는 말도 안 되는 머리색이라며 지적받곤 했지만 제이든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연예인이 할법한 화려한 머리카락은 종종 구경 할 수 있다. 하지만 저게 그 유명한 '알.비.노'냐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걸 가만 들어 넘겨야 하는 머리카락은 차원이 달랐다. 장담하지만 십오 분 전 제이든이 강남역 9번 출구 코너를 끼고 택시에서 내렸을 때, 집중된 시선을 총알로 환산 해 본다면, 모르긴 몰라도 방탄조끼 한두벌로는 커버 할 수 없었으리라. 어딜 가든 주목을 받는 다는 건 분명 유쾌한 상황은 아닐테다. 덕분에 패밀리 레스토랑까지 향하는 상당히 짧은 시간 동안 이미 제이든의 스트레스는 허용치를 가뿐히 넘어선 것 같았다.
그 스트레스가 제이든에게만 쌓였느냐 물어본다면, 아니요. 당연히 그럴 리가. 제이든과 함께 얼떨결에 단체 소개팅 카톡방에 초대된 테오도르도 이미 불만은 충분히 누적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씨씨를 불러온 다음 제멋대로 이야기를 끝내버린 청연을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제멋대로 잡은 약속을 무르지 못 하게 만들겠답시고 청연이 다짜고짜 네 명의 사내를 콜택시에 구겨 넣고 신세계 백화점으로 끌고 갔을 때부터 참은 불만이 야식으로 시켜먹은 치킨집 쿠폰처럼 쌓여있었다. ㅡ물론 치킨집 쿠폰이란 열장 쯤 쌓이면 알아서 없어지는 법이다. 청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테오도르의 분노를 태연히 받아냈고, 끝내 그를 소개팅 장소 테이블에 앉혀두었다.
한편, 화를 낸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존재 했으니. 그건 이 사태를 누구보다 학수고대했던 청연과, 예상 외로 스페치아였다.
청연은 진심으로, 이 시점에서 옆옆옆자리에 앉은 스페치아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그림이 궁금했다. 스페치아는 '존재의 탐구를 위한 문화적 체험'을 대체 어떤 식으로 상상하고 있는 걸까. 이 지극히 평범하고 철저한 마물식 사고체계의 소유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초면의 인간 여성과 직접적이고 내밀한 방식으로 탐구를 시도 할지는 상상이 안 갔다. 직접 참여하는 소개팅이 아니더라도 한 번 쯤은 구경 해 보고 싶다고 할 만큼 궁금했다.
"왔나보다."
씨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연과는 가장 먼 자리에 자리 잡아 앉은 씨씨는 차분히 청연의 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안쪽의 단체석 테이블로 걸어오는 힐과 펌프스 소리. 돌아보지 않아도 여성이 걸어오는 걸음 걸이었다. 청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렇게 소개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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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다섯과 남자 다섯이 모인 자리는 제법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일부러 백색소음이 있을만한 레스토랑을 고른 게 다행일 정도였다. 소개팅은 너무 오랜만이었지만, 새삼 방식이 변하거나 한 건 아닐테다. 남녀와의 만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분위기로 시작하는 법이다. 비록 멤버들이 지나치게 유니크하다는 점이 짚어야 할 점이지만 어쨌든. 청연은 자신의 앞자리에 앉은 여성 쪽 주최자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날렸다. 롤업 청바지에 하얀 구두를 신고 온 늘씬한 미인은 어깨까지 온 까만 웨이브를 손으로 매만지며 끄덕였다. 무언의 동의가 오고 간 다음, 청연이 가장 먼저 와인잔을 소리 나게 톡톡 건드렸고 이어서 간단한 자기소개의 시간이 있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자리배치를 이렇게 한 만큼 가장 앞에 앉은 청연부터 제 소개부터 하고 나서는 데는 거부감이 없었다.
"알파의 자청연입니다. 서른 둘. 좋아하는 걸로 소개할 건 너무 많은데, 여기선 음식으로 할까. 술과 연어회를 좋아합니다. 일본주를 즐기는 분이 계시다면 가볍게 말을 걸어주세요. 이상형은 심지가 곧은 노력가. 잘 부탁해요."
짧은 박수가 터졌다. 분명 곧은 심지건 노력가건 한두 번 만나서는 알기 힘들 텐데. 그럼에도 굳이 이상형을 짚고 넘어간다는 점에서 취향을 확고하게 밝힌다는 점이 미학을 강조하는 그 다웠다. 박수가 그칠 때 쯤 다음 타자인 제이든은 내가 이걸 정말 해야 하는가, 하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의자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준 것 만으로도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솔직히 지나치게 차분한 제이든의 목소리는 소개팅 자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의욕의 문제인 것 같다.
"제이든 하워드. 스물 둘. 좋아하는 음식은 단거. 디저트 뷔페도 가고... 아 알파팀이야. 또? 어, 이상형은... 친절하고 착하고 재치 있는 사람. 굳이 따지자면 사랑스러운 인상...?"
친절하고, 착하고, 재치 있고, 사랑스러운 여성이 분명 굴러다니는 건 아니다. 이상형이라고 말 할 만도 하지지. 다만 한국어가 아직 서툴러서인지, 혹은 정말로 저 모든 요소를 이상형으로 여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만약 후자라면, 네 가지가 모조리 교집합을 이루는 여성을 찾는 건 무지무지무지하게 어려울 것임을 청연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제이든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은 너라는 시선으로 옆자리에 앉은 테오도르에게 화살을 돌릴 뿐이었다.
테오도르는 드디어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받아들인 듯 했다. 심플한 회색 스프라이트 와이셔츠 차림인 테오도르는 평소처럼 답답한 게 불편해서 단추를 하나 풀어 두었을 뿐인데 유독 와일드하게 보였다. 그의 선홍빛 눈동자와 애쉬그레이 머리카락이 주황색 조명을 받아 금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테오도르 휴어. 나이는 스물 넷. 좋아하는 음식은 따로 없고 뭐든 잘 먹어. 어... 이상형?... 좋아하면 이상형이 되는 거지."
그런 게 어딨어. 순간 최소한의 형식은 맞추라는 의미로 청연의 눈이 불타듯 빛났다. 맹렬한 안광을 재빨리 캐치했는지, 테오도르는 불만어린 표정을 했지만 차마 정면에 앉은 여성 다섯 명 앞에서 화를 낼 순 없었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예쁜 사람."
엄청난 타협이 아닐 수 없다. 테오도르는 더는 탈탈 털어도 대답 할 게 없다는 눈으로 청연을 쏘아보더니 자리에 풀썩 앉았다. 청연은 크게 걱정하진 않았던 만큼, 구색정도는 맞춘 대답이 나왔다 싶어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원래부터 예의를 모르는 사내는 아니니 제일 중요한 상황에서 깽판을 놓을 리는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제부터 시종일관 뚱 한 것도 모자라 약간의 짜증을 섞어서 대답하던 테오도르였다. 역시 지금의 상황이 만족스럽진 않나보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모처럼의 쉴 수 있는 시간을 침해했다는 죄책감이 아주 조금 생겨나긴 하는데... 그래도 아주 조금만 더 적극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본인의 외모나 평가에 비해 연애에는 통 관심이 없는 태도를 고수 하는 게 청연으로선 한없이 아깝기만 했다.
곧바로 테오도르의 순서가 끝나자 천천히 뒷목을 쓸던 스페치아의 의자 끄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전혀 걱정 되지 않았다. 청연은 입가에 슬며시 떠오르는 미소를 한 손으로 가렸다.
"감마팀의 스페치아다. 나이는 스물일곱이라고 해 둘까. 좋아하는 음식은, 아무래도 생략해야겠군. 음료로 대신하면 블러드 타입 RH+ O라고 해두지. 이상형은 똑똑하고 유순하고 사랑의 스케일이 남다른 인물상을 선호한다. 포용력이 넓어야겠지 아무래도. 좋아하는 음료와 이상형이 들어맞는 인물이 있다면 말을 걸어주기 바란다."
방금 뭐라고? 블러드 타입 RH 뭐? 지금 이 사람이 말한 음료라는 게 그러니까...일순간 테이블 사이로 침묵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차마 입 밖으로는 내놓을 수 없는 태클들이 침묵 속에서 고요하게 오가는 와중에 가장 먼저 박수를 친 건 영혼이 반쯤 탈곡 되어있는 제이든이었다. 짝...짝짝짝...짝짝 짝짝짝짝 하는 이상한 리듬의 가벼운 박수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스페치아는 임무를 마친 사냥개처럼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에 착석했다. 당장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치고 싶은 와중에도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마른세수를 하는 청연을 제외하고, 모두가 하나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자기소개를 곰씹었다.
청연과는 반대로, 이미 얼굴 표정만으로도 '도대체...?' 라는 의문을 띄우고 있던 씨씨는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서야 깨달은 듯 했다. 아홉 쌍의 눈이 조용히 제 자리에 와서 꽂히는 이 상황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는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느라 테이블이 잠시 흔들리고 말았다. 청연은 자리에서 일어선 씨씨의 안색을 보고서야 그가 생각보다 많이 긴장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깨달음이 무색하지 않게, 떨고 있는 씨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델타팀의 씨세로입니다. 편하게 씨씨로 불러요. 좋아하는 음식은, 어, 음, 아보카도? 아차, 나이는 스물 아홉...이고 이상형은 피부가 새하얗고 외로움을 타는 어쩐지 사연이 숨겨져 있을 법한 분위기 있는 미인입니다 ...잘 부탁해요."
ㅡ너 소개팅 왜 나온 건데?
아마도 일면식 없는 이들을 통틀어 모두가 한 마음이 된 게 아닐까. 씨씨의 소개를 듣자마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 이다. 그의 옆옆자리에 앉아있는 테오도르차도 '그거 좀 아닌 거 같아.' 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다, 장소를 생각하면 적합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넌지시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반 쯤 질려버린 인상을 한 씨씨의 귓가에는 테오도르의 말이 와닿지 않는 듯 했다.
이러다 웃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청연이 아프게 주먹을 쥐는 동안, 태연하게 나도 아보카도를 좋아하는데 이것 참 우연이라며 눈을 빛내는 스페치아 한 명으로선 씨씨의 부적절한 자기소개를 전부 지적하기 힘들어 보였다. 씨씨의 안색은 곧 파랗다가 하얗게 변했다. 책상 앞에서 복잡한 난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익숙한 그로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응 메뉴얼이 누구보다도 절실 한 듯 했다.
그렇게 말 많고 탈 많은 남성진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시계방향의 순서로 이제는 여성 쪽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씨씨의 정면에서 그를 한참 응시하던 슬렌더한 검은 숏컷의 미인은 시트러스 계열의 향을 은은하게 풍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대영청 소속 직원 답달까. 일말의 동요도 없는 태도였기에 청연은 퍽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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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차가 존재하는 견해겠지만, 청연은 대영청 소속 직원들끼리의 소개팅을 퍽 긍정적으로 평가 하는 편이다. 일반인이지만 '이쪽' 세계를 알고 있는 씨씨를 포함하여, 발현자들이나 퇴마사끼리의 결혼은 상식적으로 납득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평생을 일반인인 배우자나 연인에게 능력을 숨기는 것 보다는 터놓을 수 있는 환경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다만 이런 말을 한다면, 자청연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인물에게서 '여자만 만날 수 있으면 어디든 좋은 게 아니냐' 라는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 올 테지. 딱히 부정 할 생각은 없다. 대신 질문과 관심의 화살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릴 것이다.
가령 스물 둘 이라는 나이가 귀엽다며 제이든의 맞은 편에서 눈을 빛내는 귀염상의 아가씨에겐 돌릴 이유가 충분했다. 카키색 머리카락과 함께 약간 쳐진 눈의 고양이상을 한 여성은 제이든을 향해 상당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 뚱한 자기소개의 어딘가에서 매력을 느낀 건지 청연으로선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제이든은 그녀의 대쉬를 노골적으로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복에 겨운 일이라고 내심 투덜거린 청연은 컵을 매만질 뿐이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 만큼 인연의 끈이야 언제 묶일지 모르는 법이다. 대영청은 분명 다양한 국적과 인종이 모인 포용력 넓은 집단이다. 그런 곳에 소속된 직원이기에 비로소 알.비.노가 아니냐는 말로 제이든의 분노를 은은하게 사는 게 아니라, 유혹적이지만 집요한 눈길로 은근한 관심을 표현하는 게 아닐까.
질식 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든에게는 미안하지만 청연은 이러한 상황을 기대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접시를 비우기가 무섭게 제이든의 한가해진 손을 확인하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여성과, 제발 어떻게 좀 해보라며 발로 청연을 툭툭 차는 제이든을 와인잔을 흔들며 무시했다.
다만 제이든의 인내심이 간당간당하게 끊어지기 전 그를 구원 한 건 오른쪽의 청연이 아니었다, 왼쪽에 앉아있던 스페치아였다.
"대영청의 전통이라는 선례도 있으니까."
"? 자네들, 무슨 대화였나 방금."
"적당량의 알콜 섭취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영청의 전통과 적당량의 알콜 섭취에 상관관계가 뭔데. 청연도 제이든도 동시에 스페치아를 바라보았지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건 청연 뿐 이었다. 어쩐지 제이든의 표정이 약간 민망해진 걸 깨달았을 땐, 테오도르의 농 섞인 말이 뒤를 이었다.
"손가락 여섯 개가 잘 붙어 있는 건 아-주 중요하지."
"흠. 나는 살인마가 아닌 살지마가 되었고. 제법 불명예스러웠어."
"전혀 안 웃겨. 심지어 청연은 못 알아듣고 있잖아."
말마따나 청연은 지금의 대화주제를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살지마? 그게 뭔데? 한참 대영청의 전통 이야기를 하며 거꾸로 물구나무서서 술을 마시느니 뭐라느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해대고 말이야. 물음표를 한가득 띄우는 청연을 내버려두고 제이든은 민망해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스페치아와 테오도르는 슬그머니 웃음기를 띄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와중에 씨씨의 난색을 표하는 얼굴을 본 건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여긴 누구고 나는 어디인지 하는 얼굴을 하는 씨씨는 방금 나온 루꼴라 피자를 포크로 쑤시다 못해 피클을 올려놓는 기상천외한 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 상황의 어디가 그를 부담스럽게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질려버린 낯빛을 위로 해 주기엔 제 코가 석자였다.
자리 선택이 문제였을까. 사실 가장 마음에 드는 스타일은 씨씨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시크한 숏컷의 아가씨인데. 근래에는 르네 아가씨나 우 양 처럼 하늘하늘한 매력을 가진 여성들을 자주 접해서인지,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는 맛이 있었다. 다만 제대로 말이라도 붙여보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역시 자리 선택이 문제였어. 하지만 기회는 나중에라도 찾아 올 테니까. 청연은 눈웃음을 치다가, 와인이 잠긴 잔을 가만 흔든 다음 눈이 마주친 여성을 빤히 보았다. 테오도르의 맞은편에 앉은 긴 생머리의 여성은 눈코입이 오밀조밀 몰린 게 스페인 도자기 인형 같은 매력이 있었다. 고양이상을 한 것도 매력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앉은 상황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가슴이다. 청연은 퍽 자연스럽게 제 입에 미소가 걸리는 일을 경험했다. 그러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식사 언제 끝나?"
"글쎄."
"...어떻게 좀 해봐."
"뭘?"
착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청연의 발을 두어 번 친 건 제이든이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왜. 날더러 뭘 어쩌라고. 내 감상에 젖은 순간을 방해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며 툴툴거리고 싶어진 청연을 향해 제이든은 '분위기' 라고 짧은 한 단어를 던질 뿐이었다. 이 분위기가 뭐 어쨌다고? 나름 무난한 대화잖아?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왜. Accident가 필요한가?"
"왜 억지로 영어 써?"
"별로 큰 의미는 없어. 어쨌거나 자네가 해 보라고. 원래 전문이잖나? Accident든, 띄우는 거군."
청연이 히죽히죽 웃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제이든은 실눈을 뜨고 청연을 가만 노려보았다. 눈앞의 제이든 하워드로 말할 것 같으면, 알파 팀은 물론이고 능력자들 중에서도 소수라는 C급의 요원이시다. 공간을 조종하고 공기 중의 바람을 때로는 커터처럼 변형시키는 위협적인 공격마저 가능한 인물. 그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제 능력을 사용하는 범상찮은 분이신 걸, 일전의 담력체험에서 겪고야 말았다. 그런 상대 앞에서 농이나 치며 히죽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건 뭐, 설마 별 일을 벌이긴 하겠는가- 라는 청연의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리 싫다 싫다 해도 이 자리에 끌려와 앉아 있는 남자 아닌가. 예의를 모르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때때로 사람은 속단으로 인한 낭패를 본다.
"...?!"
착각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띄워진' 건 청연이 사용 한 적 없던 커피 티스푼이었다. 그 다음은 냅킨. 착각이 아니면 테이블보가 펄럭인 거 같은데. 아니 잠깐만.
잇따라 청연의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듯 테이블의 '일부' 물체들이 자리에서 떠올랐다.
처음에는 청연조차 착각하고 말았다. 이건 그거냐? 폴터가이스트 현상?
이 신기한 괴현상에 맞닥뜨린다면 누구나 당혹스러워 할 테지. 청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괴현상과 신기한 일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겪고 있는 사람이다. 덕분에 재빠르게 이 현상의 근원을 캐치해 낼 수 있었다. 미친, 하고 저도 모르게 중얼 거리고 말았다. 티스푼. 냅킨. 테이블보는 펄럭이고 진동벨이 흔들거렸다. 제이든 앞에 놓인 사이다는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회오리를 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얼음 하나가 동동 떠오르더니 기여코 청연의 앞에 놓인 각설탕이 떠올랐다.
숨어 있는 염동력자의 장난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0과 1을 가지고 노는 일반인과 사냥개를 자처하는 인외마물, 영국산 피카츄는 물론이고, 능력만 없으면 난 연예계로 나갔어야 했다는 청연에게조차 이런 능력은 없다. 잠깐이나마 맞은 편 여성들의 장난인가 싶었지만 곧 제이든의 스치듯 걸린 미소를 보고 확신했다.
이 인간, 지금 분위기를 띄우라고 했더니 테이블을 띄운 거야?!!!
스페치아는 테이블 한 쪽에 있는 이 이상 현상을 아주 생생하게 목격 한 듯 했다. 진동벨이 두둥실 떠오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무어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뭐라 말 했는지까진 들리지 않는다. 좀 신경 쓰이긴 하는데...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청연은 소리치는 대신 제이든의 발을 툭 쳤다. 지금은 서울 강남 시내 한복판이고, 이 자리에 끌려나온 인간 중 기억을 제거시키는 베타팀 요원은 한 명도 없다. 일반인에게 목격 당한다면 대소동이 벌어질 행동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C급 요원을 보며 청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을 강하게 쏘는 것 뿐 이었다. 기어코 스페치아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갈색 단발머리 여성이 입가를 가리며 조그마한 놀라움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안 돼. 이건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분위기 띄우지 마!!!
"이 식사 언제 끝나?"
삼십이 년 간 키운 자청연의 눈칫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제이든은 조용히, 질문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주장하고 있었다.
ㅡ짜식아, 난 세 번 안 물어본다. 내가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진 나도 몰라. 감정을 담아 테이블 다리 한 쪽을 폭파시키는 수가 있어.
청연은 제이든의 손목을 턱 소리가 나도록 굳게 잡았다. 그리고 대지진을 일으키고 있을 눈동자를 필사적으로 수습해야만 했다. 청연은 더욱 시선을 끌기 전에 대답했다.
"지금. 지금 끝나."
그러니까 제발 그만 하세요 이 자식아.
제이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티스푼은 제자리로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 긴장은 곧 공기 중의 바람과 함께 잠잠해졌다. 식사 시간이 끝날 때였다. 청연에게는 참 애석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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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왜 화장실을 같이 가는 걸까. 깡촌 시골에서 폐교 직전에 몰린 고등학교를 나온 청연이지만, 그런 학교에서도 여자들은 화장실을 함께 갔다. 같은 칸에 들어가는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왜 같이 가는 건가. 심지어 다섯 명이 전부 다 우르르.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입장으로선 그런 불만을 한 번쯤 하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오늘은 소개팅의 날. 다섯명이 동시에 다 같이 화장실을 간다는 말은, 아무래도 그거겠지. 중간 평가. 쉽게 짐작이 간다.
"다음은 어디야?"
"다음이 있어?"
씨씨가 묻자마자, 청연의 대답보다도 제이든의 경악이 빨랐다. 그래. 놀랍게도 이다음이 있단다 이 친구야. 다만 문제가 생겼을 뿐이고.
"괜찮은 바에 예약을 넣어두긴 했는데... 예약제라서 미리 가도 안내를 못 받아. 시간이 너무 애매해. 이동 시간을 빼도 사오십 분은 남았다고."
원래대로라면 조금 더 레스토랑에 눌러 붙어있을 생각이었다. 꼭 누구 때문이라고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제이든은 어쩌라고, 라는 표정으로 청연을 째려보았다.
"적당히 다른 곳을 들렸다 가야할 것 같은데..."
청연은 말끝을 흐렸다. 이 것 만큼은 마땅히, 뾰족한 대안이 생각나질 않았다. 당장 사오십 분의 시간을 죽일만한 장소도 생각이 나질 않았고, 떠오른다고 해도 인원이 인원이니 헛걸음을 할 확률이 높았다. 현실적인 고민에 시달리는 청연을 가엽게 여긴 걸까. 씨씨와 스페치아는 각각 노래방이나 오락실은 어떠냐는 말을 넌지시 던졌다. 하지만 둘 다 패스였다.
"이 멤버 중에 태연하게 노래를 부를 만한 멤버가 있다고 생각해?"
청연의 질문에 스페치아는 끄덕였다. 곧 검은 장갑을 낀 스페치아의 검지 손가락이 청연 쪽을 가리켰다. 너 있잖아 너. 청연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나더러 사오십 분 동안 노래를 부르라고? 차라리 봉 춤을 추라고 하지 그래."
"그 쪽도 상관없겠지."
"패스야!"
진심이잖아 이 자식. 청연은 스페치아에게 비명에 가깝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후로 나온 대안 몇 가지들을 전부 다 기각 할 수밖에 없었다. 예약 시간을 조금 뒤로 미루는 걸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씨씨는 황록색 눈동자를 가만 굴리더니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당장 검색 돌려 봤는데, 볼링장은 어때? 한 게임만 치는 걸로 하고."
"힘 조절이 필요하겠군. 볼링공은 몇 kg까지 준비 되어있지?"
"음... 평범하게 7kg 까지 준비되어있지 않을까. 볼링공은 근력에 따라 맞춰서 드는 거야 스페."
"근력에 따라서... 그럼 레일은 합금 재질인가?"
"...볼링장은 패스하겠네."
스페치아는 잠시 낙담한 듯 했지만 청연을 비롯한 씨씨는 가볍게 넘어갔다. 스페치아와 볼링장을 가려면 필요한건 새 볼링공과 레일, 볼링핀을 포함해서 주변 환경을 복구할 베타팀 요원 일 것이다. 차라리 볼링장을 따로 짓고 말지.
당구장은 어떠냐는 테오도르의 말에 잠시 솔깃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의견도 기각 되었다. 포켓볼은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하다. 게다가 진지하게 하기 시작하면 어쩐지 소개팅은 뒷전이 되어 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조차 든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공유하고 좋은 추억,까진 아니더라도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만 한! 그런 매지컬 한 거 뭐 없어?!"
"없어, 그런 거. 있겠냐고."
냉정한 테오도르의 대답이 시원시원하게 들렸는지, 제이든은 픽 하고 코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데?
더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구두 굽이 바닥을 차는 소리가 여럿 들렸다. 청연의 안색이 달라진 것과 거의 동시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화장을 고친 다섯 명이 우르르 나왔다. 태연 한 척 웃곤 있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오락실이라도 가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때운다고 해도 그런 정신없는 장소라면 있던 무드도 죄다 깨지겠다고!
"아, 청연. 저거."
그 때였다. 누군가 어깨를 톡톡 하고 두드려서 돌아보자 테오도르가 엄지손가락으로 창문 밖을 가리켰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내려가던 청연이 도로 계단을 올라가 창문 밖을 바라보자 의문은 풀렸다. 그리고 풀리는 것과 동시에 테오도르를 아주 꽉 껴안아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기특한 녀석!
창문 밖에는 인형 뽑기 기계들이 가득 들어찬 가게가 유리문을 활짝 열어두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행 따라 연 지 얼마 안 된 가게 인 걸 증명하듯 간판은 깔끔했다. 졸속으로 만든 입간판에 뭐라 적혀 있는 듯 했지만 거기까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삼사십 분의 시간을 보내기엔 충분 해 보였다. 고민거리를 날려버린 청연의 환한 웃음이 어찌나 아이 같았는지, 테오도르 쪽이 어이 없이 웃어버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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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디서부터 시작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인형 뽑기가 유행이긴 유행인가보다. 강남대로 한복판의 월세가 눈알 튀어나오게 비싼 곳에서 오백 원짜리로 돈을 버는 사업이 먹히고 있다니. 포X몬스터의 인형 뽑기 기계에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달라붙었던 건지 유리창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했다. 증강 현실과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내세운 한 모바일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인기몰이를 하는 덕에 시너지 효과가 상당 했던 모양이다. 인형은 별로 쓸모가 없다, 라는 생각을 가진 어른들조차 막상 동전을 집어넣고 오기가 발동하면 무서울 정도로 현금을 탕진하니까. 게다가 옆에서 탄성과 함께 뽑은 인형을 보란 듯이 꺼내는 사람들이 지갑을 텅 비우는데 부채질을 했다. 인형 뽑기에는 영 관심이 없는 청연조차도, 막상 테오도르더러 이거 너 닮은 친척이니 인사해라, 라고 놀려주기 위한 전기쥐 인형을 뽑는 데만 팔천 원을 쓴 것 같다. 에라이. 뭐 어떤가. 정승처럼 돈을 쓰면 떡이 나오냐. 지금이 고려 시대도 아닌데. 청연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자기장으로 어떻게 안 될까?"
"그건 카지노 구슬을 조종하는 거라서 안 될 걸?"
"파칭코 기계 일 걸."
도대체 어디서 이런 발칙한 대화들이 들려오는 걸까. 청연은 자연히 제이든과 테오도르 쪽으로 시선을 흘끔거렸다. 그의 곁에 붙어있는 씨씨는 곧 자기장으로 슬롯머신에 부정적인 행위가 어째서 먹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들과 있는 두 명의 여성 중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거 부숴도 돼?"
잠깐. 뭐라고? 청연은 안색을 달리했다. 곁에 있는 여성에게 마음에 드는 인형을 뽑는 건 참 어렵다고 너스레를 떨다가 고개를 홱 소리 나게 돌렸다.
다행히 씨씨가 테오도르를 향해 탄탄한 근육질의 팔로 단호한 엑스자를 그리고 있었다. 얼마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분해 보이는 테오도르는 죄 많은 기계를 툭툭 치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한국 업자들이 일부러 집게를 느슨하게 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기장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꺼낸 이유를 알 만 했다.
"스피, 어떻게 못 해?"
"상당히 섬세하고 정교한 촉수의 컨트롤이 필요한 작업이다. 성공은 장담 할 수 없어."
그런 작업을 하라고 있는 인형 뽑기가 아니네만. 청연은 애써 뽑은 전기쥐 인형과 슬라임 인형을 마주하고 있는 여성에게 보여주면서 대화를 한 귀로 흘렸다. 스페치아의 옆구리에는 어쩐지 전혀 어울리지 않은 포X몬스터의 물대포를 쏘는 거북이 인형이 있었다. 도대체 왜? 게다가 스페치아의 옆에는 그 인형을 여성이 제법 가지고 싶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이 무슨 얼굴을 하건 스페치아는 어림도 없다는 듯 인형을 단단히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곧 청연은 그걸 뽑았냐며 묻는 제이든에게 스페치아가 '우 에게 줄 거다.' 라고 대답한 걸 듣자마자 속으로나마 잔잔한 비난을 던졌다. 야 이 딸 바보야. 적어도 당분간은 자네에게 연애란 사치야. 사치라고.
잠시 동안 스페치아를 향했던 신경이 도로 테오도르에게 쏠린 건, 대부분의 기계가 몇 대 치면 낫던데- 라는 말과 함께 가벼운 스파크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그 땐 비단 청연 뿐 만 아니라, 모든 이가 테오도르 쪽을 바라 볼 수밖에 없긴 했다. 테오도르는 안쪽의 형광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한 인형 뽑기 기계를 아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왜 네가 그런 얼굴을 하는 건데. 그런 얼굴을 하고 싶어지는 건 이 쪽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한 박자가 지나자 제이든의 조용한 목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테디, 뭐 한 거야?"
곧바로 터져 나온, 뭘 하고 자시고 '가볍게' 기계를 쳐 봤을 뿐이라는 테오도르의 말을 모두가 쉽게 믿지는 않았다.
청연은 시계를 흘끔 바라본 후, 뒤이어 CCTV를 바라보았다. 예약 해 둔 술집에 십 분 쯤 먼저 간다고 해도 그렇게 큰일은 아니겠지. 지금 당장 빠져나간다면, 아르바이트 생으로 보이는 앞치마 차림의 청년에게 기계가 이상했다며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변상이니 뭐니 직원에게 붙잡힌다면 보통 체면 구기는 일이 아니다. 테오도르가 이 자리에서 순순히 지갑을 열어 변상 할 것 같지도 않고. 아니 일단 정말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국인 집단이 소란을 일으킨다면 해결해야 하는 건 대한민국 국적의 소유자이자, 참여자이면서 주최자이기도 한 자신뿐이니까.
"어떡할까."
"...어떡하긴. 잽싸게 튀어야지."
삼십육계 줄행랑이 손자병법보다 먼저 나온 병법인 건 이유가 있는 법이다. 도망 칠 때를 아는 자는 얼마나 현명하단 말인가. 청연은 조용히 남은 동전들을 주머니로 털어 넣었다. 그 때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핸드폰의 알림이 울렸다. 처음에는 기상청 단체 문자인가 싶었지만, 곧 알림 소리에 얼굴을 굳히며 핸드폰을 꺼내드는 사람들이 전부 다 대영청 소속이라는 걸 깨닫고 청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니 젠장. 설마. 설마, 아니겠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가장 간절한 소원은 언제나 쉽게 이룰 수 없는 건가 보다. 자신을 포함한 열 명이 모조리 핸드폰의 화면을 확인 하는 걸 보자 청연은 곧바로 절망했다. 이런 빌어먹을. 대영청 소속 직원들의 핸드폰에 설치된 전용 어플리케이션은 수신자가 확인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알림을 반복한다.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은 놀라울 정도로 잘 적중하는 법이다. 청연의 핸드폰을 포함한 모두의 핸드폰에는 같은 내용이 띄워져 있었다. 걸어서 십 분도 안 되는 거리에서 출현한 마물의 등급과 간단한 현지 상황. 차라리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재난 경보인 게 낫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건 소개팅이 이렇게 어이없이 파토 날 수 밖에 없다는 걸 무시하고 강행하기라도 하지... 심지어 C급이다. 여기 옆에 계신 두 요원이 출동을 안 할 수가 없네. 옌장맞을.
"현실 도피 하지 마라 자청연."
엿됐다, 라고 중얼거리는 자신을 보는 게 즐거워 보이는 스페치아와.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잖아 이 일."
라는 말로 조용히 사람의 속을 긁는 제이든이라던가.
"일단 이 가게에서 나갈래."
인형 뽑기 기계에서 완전히 신경을 꺼 버리고 싶은 눈치의 테오도르와.
"...일단 난 본청으로 돌아갈래. 지하철이 움직이고 있을까?"
제발 날 이대로 다섯 명의 아가씨와 함께 택시를 태워 보내지 말아달라는 눈빛을 하고 있는 씨씨에겐 사과 해야겠다. 미안 하지만 내 코가 석자일세.
"음... ..."
청연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뒤를 돌았다. 왜 이렇게 안 좋을 때 유환이 가볍게 웃으며 했던 말이 생각나는 걸까. 소개팅 자체는 둘째 쳐도 어쨌든 네 옆에선 안할 거야. ㅡ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아, 랬던가. 제길. 임무가 끝나자마자 대영청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나무 돗자리를 하나 사다가 유환의 기숙사방에 던져 줄 테다. 한강에서 한 몫 벌어보라는 사업 계획도 제시해주고. 울그락 불그락 안색을 달리하는 청연이 그렇게도 웃겼을까. 스페치아와 제이든은 조용히 웃으며 먼저 가게를 빠져 나갔다. 씨씨는 테오도르에게 몇 가지 잔소리와 당부를 하더니 곧 두 사람을 쫓아 나섰다. 아무나 나 좀 보호 해줘, 라는 말을 던진 것 도 같다. 곧 테오도르도 청연의 어깨를 두어 번 치고 밖으로 걸음했다.
이제와서, 정말 이제와서지만. 다섯 명 중 세 명이 알파팀이었다는 게 이번 소개팅 실패의 원인 아니었을까. 청연은 본능적으로 '다음'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습관적인 눈웃음을 치며 여성진을 바라보는 얼굴이 찌르르 하게 떨려왔다. 어떤 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자마자 작살을 내 버릴 테다.
"...죄송합니다. 일이 조금 바빠져서. 대영청에서 뵙겠습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같은 PPT의 단골 문구가 생각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충분히 이해 한 다는 다섯 명의 위로가 뒤따랐지만, 청연은 자못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이 지옥같은 소개팅의 종료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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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흐흐 하는 웃음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 기숙사 라운지를 지나간다면 곧 묘한 조합을 발견 할 것이다. 대영청 두루마기를 센스 있게 소화하는 어느 호랑이 영물과, 치즈스틱을 오물거리는 건장한 청년, 오묘한 매력을 가진 연두색의 외눈의 사내. 하나 같이 감마팀에 소속 되었다는 노란 수실의 노리개를 매단 세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청연은 바이샨의 웃음소리를 한 귀로 흘리곤 고개를 푹 숙이며 마저 한탄했다. 자청연을 위로 해주는 착하고 기묘한 영물의 브레맨 음악대라고 해. 내 기분이 좀 더 유쾌 해 질 수 있도록.
마루한은 조금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무사 하신 게 다행입니다."
"그거야... 멤버가 멤버였으니 마물이야 깔끔하게 퇴치했지."
청연은 입을 댓 발은 내밀고 투덜거렸다. 강남대로 한복판에 나타난 마물 덕분에 일대가 잠시 통제되기도 했지만, C급 마물이었던 걸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신속하게 처리 되었다. 곧바로 출동 한 요원만 다섯이었으니까.
"좋은 경험으로 치면 되지 않겠소?"
"바이샨, 웃음부터 지우고 말 하게. 이건 기회비용의 문제야."
일련의 사건을 한탄하며 테이블을 치는 청연이 웃겼던 걸까. 바이샨은 참 호기롭게 웃으며 한참을 끄덕거렸다. 기회비용을 운운하는 청연을 참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묵군은 캔커피를 가만 들어 올리며 살짝 웃더니 말했다.
"좋은 인연이란 또 생길 테야. 그래서 예쁜 아가씨는 좀 만났누?"
예쁜 아가씨라. 청연은 그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볼이 미어터지게 치즈스틱을 먹고 있는 마루한과 선글라스 너머로 청연을 가만 바라보는 그 시선을 가만 받아들이며 한 생각이란? 글쎄. 분명 예쁜 아가씨들이긴 했지. 헌데 예쁘다, 라는 기준을 다섯 명에게 전원 다 붙일 수 있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거든. 사람에게는 개인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청연은 곧 답변을 고심하다가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아니, 어느 쪽이냐 하면 주최를 한 르네 아가씨가 제일 예뻤지."
주최자로서 할 말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청연의 솔직한 답변이 뭐가 그리 웃겼는지 묵군은 한 옥타브 소리를 높여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덜컥 민망해진 청연의 볼멘 투덜거림이 뒤를 이었다.
"솔직히 외모만으로 따지자면 우 양이나 르네 아가씨 급은 되어야지 진지하게 만나 볼 만 하지 않겠어? 어? 안 그래?! 내 말이 틀렸어?!"
순 개인취향으로 점철된 평가이지만 뭐 어떠냐고. 원래 평가는 박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테이블을 연달아 치는 바람에 치즈스틱이 든 봉투와 바이샨의 최신식 아이폰이 흔들릴 뻔 했지만 청연은 애써 못 본 채 했다. 하여간 이 지옥 같은 소개팅을 겪고 나니 다음이라는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일 대 일을 추진하는 게 백 배 낫겠다는 훌륭한 결론에 도달 했을 때는 개미 새끼 흩어지듯 소개팅 이야기가 물 건너 간 이후였다. 이놈의 직장 생활, 휴일도 제대로 즐기질 못한다고 투덜거리는 청연을 향해 위로인지 놀림인 지 알 수 없는 말들이 뒤 이어 따라붙었다. 나 제주도에선 진짜 이렇게 안 살았다니까. 자신을 위한 변호가 따라 붙었지만 슬프게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은 없는 어느 평일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