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 투더 이집트!
** 유희왕 극장판 THE DARK SIDE OF DIMENSIONS 의 스포일러가 포함 되어 있습니다.
카이로 국제공항을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후끈함은 이 땅에서 자랐던 오누이에겐 익숙한 열기였다.
작열하는 태양과 숨이 막히는 더위는 일본의 여름과는 다른 압박감이 있다. 많은 여행객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이집트의 공기였으나 남매가 적응하는데는 오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보다도 더 척박한 공기 속에서 지냈던 시간들이 무수히 많았었기 때문이다.
세라와 발맞춰 걸어가던 디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착했다. 우리들의 땅."
"응, 겨우 돌아 왔구나."
반가운 기억보다는 쓰라린 아픔이 많은 땅이었지만 그럼에도 고향인 장소다. 내심 기쁜 건 자신 뿐만이 아니겠지.
장기간의 비행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세라의 얼굴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디바는 기뻤다. 원래대로라면 조금 쉬고 돌아가자고 하려 했던 생각이 바뀐건 그 탓이었다.
익숙한 모국어로 택시를 잡아 타고 오누이가 잘 알던 마을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가 무섭게 차가 출발했다. 녹음이 푸르른 일본 땅과는 정 반대의 세계. 황색 모래바람이 그들에게는 유독 가혹한 기억만을 몰고 왔던 이집트다.
그런 곳이지만, 우리에겐 고향이기도 했다. 잔인한 모래의 감촉을 잊을 순 없었지만, 따뜻한 석양의 기억 또한 함께 잠든 땅.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옆 자리에 앉아있던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디바의 손을 잡았다.
디바는 누이의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것에 대한 위로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차원의 세계로 떠나려 했던 십수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디바가 그려왔던 이상적인 세계는 산산조각났다. 지긋지긋했던 현세를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디바는 자신이 불구하고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감사해야 했다.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을 향해 앙큼할 정도로 귀엽게 웃고 있는 세라 덕분이었다.
세라는 정말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생기발랄한 모습이다. 고차원의 세계로 떠나지 못한다고 해도. 현세에 얽매인 채 앞으로도 힘겨운 삶을 지켜내야 하더라도 이제는 많은 짐을 내려놓은 디바를 가장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동생이다. 자신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기뻐하는 세라가 있다. 그런 여동생이 있기에, 디바 또한 이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바는 택시의 창문을 열었다. 지평선의 끝에서, 디바에게는 많은 아픔이 서려있었던 마을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신기하게도 불신을 품은 채 세상을 내려보았던 때와는 달리 더 이상 마음은 무겁지 않았다. 그러니까ㅡ이대로, 이렇게, 훈훈한 마무리?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디바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 뻔 했다.
왜냐하면 이 사이좋은 오누이가 오붓하게 이집트의 땅을 밟기까지의 사연이라는 게 도저히 언급하지 않고선 넘길 수가 없을 만큼 황당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면 않을만한 일이기도 하지만 곰곰히 생각 해 보면 이것 보다 말도 안되는 일이 없단 말이다.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미간을 세라에게 들키지 않도록 애를 쓰는 디바가 되살린 2주 전의 기억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 "그래서 이 큐브는 얼마에 팔겠나."
라는 말을 들었다.
다름 아닌 카이바 세토에게 말이다.
*
그러니까 세간을 발칵 뒤집어놓고도 남았던 말 많고 탈 많던 카이바 랜드의 듀얼대회에서, 디바가 어떤 최강의 듀얼리스트에게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털털 털린게 며칠 전이었다.
자칫하면 세계를 멸망시킬 뻔 했던 사태를 야기 시킨 장본인으로서 일 말의 책임감을 못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기적적으로 일은 잘 풀렸고 디바는 멀쩡하게 천년링의 사념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비록 디바가 그 후로 며칠 간 첫턴 드로우에 함정카드만 다섯장 뽑은 기분의 코마상태에 빠져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다행인 것은 까딱하면 다같이 명계행 특급열차 편도길을 내달렸던 플라나 동료들이 어디 한 곳 다치지 않고 몸 성하게 건강하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모두가 디바에게 입을 모아 아무 일도 없었으니 되었다며 상냥한 말들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모두가 오랜 숙원이었던 고차원의 세계와 샤디에게 이어받았던 이상을 잃어버리게 된 것 까지 빠르게 적응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플라나가 아니었으며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그나마 디바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마니를 비롯한 세라와 동료들이 디바보다도 빠르게 털고 일어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를 이끌어준 덕이었다. 디바 또한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들을 이 이상 걱정시키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카이바 세토의 부하라는 자가 찾아온 건 그 때였다.
"ㅡ뭐라고?"
"얼마에 팔겠냐고 물었다."
카이바 세토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디바는 어이가 없다 못해서 이집트어로 욕을 할 뻔했다. 천만다행으로 딱 봐도 엄청나게 비쌀 것 같은 찻잔을 집어 던지진 않았다. 백룡 문양이 프린팅 되어있는 찻잔은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사장이 얼마나 푸른 눈의 백룡으로 온갖 사업을 저지르고 다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마 이 찻잔도 싸구려값을 매겨서 백룡의 가치를 떨어트릴 순 없다고 온갖 말 없는 땡깡을 부렸을게 뻔했다. 쓸때없이 비싼 가격으로 책정해서 팔고 있겠지.
"팔 리가 없잖아."
어쨌거나 백룡은 제쳐두고. 이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 노숙에 가까운 생활을 한지 삼일 째 되던 날 디바는 익숙한 선글라스와 정장차림의 보디가드에게 카이바 코퍼레이션으로 초대받았다. 카이바 세토가 자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어서 찾아 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디바 또한 카이바에게 용건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디바의 용건은 놀랍게도 카이바와 일치했다.
바로 지금 카이바가 책상 위에 올려둔 영자 큐브 때문이었다.
디바의 눈썹이 카이바와 마찬가지로 불쾌함을 가득 담아 팔자로 찌푸려졌다.
감히 뻔뻔하게 뭘 팔라고 하는 거냐 이 자본주의의 불량배 같으니라고. 사장이면 단 줄 알아?!
"남의 큐브를 멋대로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 이제는 팔라고 강요까지 할 셈인가?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사장 쯤 되면 재산권 따윈 어길 수 있나보지? 그건 내 물건이야. 팔 생각 따윈 없어."
"듀얼에서 진 이후 너는 큐브만 남겨두고 사라져버렸으니 그걸 주운 내가 돌려줄 필요는 없다만."
"모순이네. 그럼 넌 왜 이제와서 내게 큐브를 사겠다고 말하는 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게 내 물건이라는 사실엔 변함 없어. 내 놔."
"……."
디바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카이바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 진 것에 쾌재를 불렀다.
카이바 세토라는 인물은 정말 남들과는 스케일이 다른 인물인데 특히 소유권에 대한 개념이 그러했다. 디바는 아이가미라는 인물을 연기하며 도미노쵸에서 지내는동안 유우기와 바쿠라를 감시했는데, 눈 앞의 카이바 세토가 푸른 눈의 백룡카드를 원한다는 이유로 거두절미하고 돈가방을 들고 찾아 갔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라 캐 낼 것 까지도 없었다.
"네 얼빠진 뇌가 차원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나보군. 똑똑히 잘 들어라. 그 큐브 하나로 네가 평생 만져 볼 수도 없는 거금을 지급하겠단 말이다만."
"귓구멍을 다이렉트 어택으로 뚫어줄까? 필요 없다고."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디바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당장이라도 자신을 씹어먹을 기세인 카이바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머리를 조금만 굴려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이다. 눈 앞의 이 인간은 신성한 파라오의 무덤을 파헤칠 정도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건 물론이고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울 정도로 악바리 근성에 가득 차 있으니 그렇게 간단히 파라오의 부활을 포기 할 리 없단 말이다. 그러니 이 곳으로 강림시키는 것에 실패한 이상 이제 남은건 차원 영역을 뛰어 넘는 것 뿐인데….
디바는 한껏 비아냥거리며 카이바에게 보란 듯이 다리를 꼬았다.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샤디님께 선택받은 플라나조차 해내지 못 한 차원영역 시프트다. 제 아무리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첨단 기술이 뛰어나다고 한들 차원을 뛰어 넘는 건 무리야."
예상대로 카이바의 미간이 엄청나게 좁아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을 두들긴 카이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녀석 따위가 뭐라 지껄이든 신경 쓸 이 몸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차원영역의 문을 여는 매개체 일 뿐, 네 놈의 사견이 아냐. 영자 큐브를 넘겨라. 보아하니 그 성가신 플라나의 능력 조차 사라져서 큐브를 쓸 수 없어진 모양인데…쓸모 없어진 물건을 비싼 값에 사주겠단 말을 하고 있단 거다!"
글쎄 안 판다니까. 짜증 섞인 눈으로 카이바를 바라보던 디바는 이번에야말로 반론 따윈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건 샤디님의 유품이야. 죽어도 넘길 순 없어. 소유자가 있는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하지 않는 고결함은 칭찬 해 주겠지만 미안하게 됐군. 큐브의 힘을 쓸 수 있건 없건 그건 평범한 골동품이 아냐. 돌려 받겠어."
예상대로 사장실을 가로질러 디바가 카이바의 책상 앞에 도달할 때 까지, 두 사람의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샤디의 처참한 최후와 마지막 유언, 그리고 물려받았던 큐브는 플라나의 능력이 사라졌다고 한들 디바의 안에서 지워 질 수 없는 기억이었다. 고차원으로 모든 플라나들을 데리고 시프트한다는 마지막 사명을 다하지 못한 무력함은 이미 며칠동안 맛 보아왔다. 그러니 이것 만이라도 지켜야 했다. 샤디님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큐브만큼은.
그리고 디바의 손이 큐브를 쥔 순간,
엄청난 악력으로 디바의 손을 카이바가 잡아 눌렀다.
"?!"
"고분고분 말로 하려고 했지만 안되겠군."
뭐지 이건? 갑자기 등줄기로 싸한 땀 한방울이 흐른 것도 같은데. 듀얼에 정신이 팔렸을 때와는 또 다른 투지와 아집에 뭉친 카이바의 눈동자를 보고 디바는 순간 소름이 들었다. 뭔 놈의 힘은 또 이렇게 센 건지 손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뭐야 이거?!
"이소노!"
"넵!"
카이바의 부름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금껏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디가드 한 명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사무실의 커튼이 쳐지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디바가 들어왔던 출입구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커튼이 쳐진 사무실 내부는 방금 전과는 영 딴판으로 순식간에 컴컴한 방 안이었다. 곧 펑 하고 플래쉬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디바가 있는 자리로 녹화를 알리는 카메라의 빨간 자외선 불빛과 새하얀 조명이 쏟아졌다.
"디바, 네가 한 어리석은 선택임을 명심해라."
"?! 너, 대체 무슨 짓을…!"
그러고 보니 이런 상황을 한 번 겪어본적이 있었다. 카이바 코퍼레이션이 해체 공사를 진행하던 폐건물로 나오라고 했던 때도 아마 이랬었지. 다만 그 때와 지금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는 이름도 기억 안나는 만두 찐빵 같은 놈을 당장에 차원 시프트로 저차원에 보내버렸다는 점이지만 지금의 자신은 혈혈단신, 혼자인 몸. 게다가 플라나로서의 능력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든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물 앞에서 디바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얼마 없었다.
"…! 비겁하다 카이바 세토! 내가 폭력과 AV의 위협 따위에 굴할 것 같ㅡ"
"ㅡ지금부터 도미노 시티의 신원 보증 심사를 실시 하겠습니다!!!!"
"…………………뭐??"
제 아무리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던 디바라고 해도, 이 예측 못한 상황에선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소노라고 불린 보디가드는 어느새 선글라스를 멋지게 빛내며 손에 든 서류를 쭉 읽어나갔다.
"디바. 당신은 도미노 시티에서 자신의 신원을 보증 해줄 수 있는 8촌 이내의 친인척이 있습니까? 만약 친인척이 없다면 칠일 이내에 신원보증인이나 사회적 보장이 가능한 후원자의 서명이 담긴 신원보증서를 카이바 코퍼레이션이나 도미노 시티 청사로 보내야 합니다. 이를 지키지 않을 시, 칠일 후 당신은 도미노 시티의 불법 체류자로서 분류하여 시티 경찰과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특수부대원에게 구속 당할 수 있으며 도미노 시티 밖으로 강제 추방 당할 것임을 알립니다."
"뭐…!?!?"
말도 안되는 상황에, 예상치 못한 다이렉트 어택이다. 아니 왜 일개 도미노 시티에서 불법 체류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건데ㅡ라는 반론을 하기도 전에 떠올리고 말았다. 그래 저 놈은 도미노 시티의 폭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피도 눈물도 눈꼽만큼도 없는 냉혈한 인간이었지.
"또한 정식적으로 도미노 시티의 주민으로서 등록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삼 일 이내로 카이바 코퍼레이션에서 인정하는 정식 카드로 구성된 덱을 등록하여 심사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덱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아니…."
그거야 삼일 전 까진 가지고 있었지. 문제는 지금 플라나의 능력이 깡그리 사라져버려서 큐브 안에 덱이 들어가 있어서 디바 본인도 꺼낼 수가 없단 거지만.
"그렇다면 이대론 불법 체류자 확정입니다."
"뭐가 어째?!"
디바는 저도 모르게 버럭 화를 터트렸지만 저 놈의 선글라스 때문인지 마주 본 보디가드의 표정은 하나도 변하질 않았다. 신원 보증 심사라니 장난하냐, 라고 버럭버럭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은 하늘을 뚫었지만 '현재의 영상은 녹화 되고 있으니 까딱해서 모욕이라도 하면 당장 모욕죄로 감빵에 쳐넣어주마' 라는 얼굴을 한 카이바 세토가 이쪽을 향해 재수없는 미소를 보이고 있다.
안된다. 침착하자.
여기서 넘어가선 안 된다고.
"……칠일 이내에 신원 보증인을 찾으면 된다는 거야? 찾으면 될 거 아냐. 나도 이제 이런 곳엔 볼 일 없지만 순순히 쫓겨 나줄 줄 알아?!"
물론 아직도 바쿠라에 대한 복수라던가 머리가 복잡해서 해치워야 하는 마음의 정리는 산더미처럼 많지만 일단 눈 앞의 이 인간에게 진다는 건 디바의 프라이드가 허락하지 않았다. 원래 목적대로 큐브를 가지고 재수없는 카이바 코퍼레이션에서 빠져나가는 것 만을 생각하자.
그러나 디바보다도 진다는 걸 허락 못하는 인간, 카이바 세토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호오. 그렇다면 부디 너를 비롯한 네 동생과 삼십명은 족히 넘어가는 플라나들 전원이 칠일 이내에 신원 보증인을 찾아서 불법 체류자 신세에서 벗어나길 빌어주지. 근방에 이름 말곤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줄만한 후원자 삼십명이 굴러다닐지는 모르겠지만."
"……!! 너어…!"
그렇다. 카이바 세토는 배수의 진을 치고 승부에 임하는 인간. 본인이 지는 걸 애초에 상정하질 않고 덤벼대는 인간이다. 아마도 디바가 순순히 큐브를 넘기지 않을 거란 점 또한 간파했겠지.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본격적으로 신원 보증 심사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을 리가 없다.
디바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비겁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지만 분명 디바가 '아이가미' 라는 이름으로 도미노 고등학교에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은 플라나로서의 능력 덕분이었다. '아이가미' 라는 인물의 정보를 처음보는 인물의 정신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들었던 힘이 사라진 이상, 디바는 더 이상 '아이가미'가 될 수 없는 평범한 외국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곤 해도 불법 체류자라니!
그 점을 날카롭게 간파해 낸 카이바 세토의 능력이란 분명 대단하지만, 그의 목적이 너무 뻔했기 때문에 디바는 이대로 당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네가 그 큐브를 넘긴다면 내가 '후원자'답게 너는 물론이고…."
"찾으면 될 거 아냐.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다들 후원자를 찾아 주면 된다 그거 잖아."
"……."
"내 큐브 내놔!"
빽 소리를 지른 디바는 이번에야말로 카이바의 손을 뿌리쳤다. 후원자? 어쨌거나 보증인을 찾아주면 된다 이거지! 아르바이트든 취직이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이 놈에게 기대는 일이 없도록 하면 될 거 아닌가. 돌아가는 길에 아까 봐뒀던 '알바친구' 라는 신문지라도 다발로 챙겨다가 돌아가고 말테다.
디바는 자 이제 할말은 더 없겠지, 라는 표정으로 카이바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카이바에게선 어쩐지 약간 한심하다는 시선까지 섞은 채 저를 차분히 훑어보더니ㅡ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군. 일본은 15세 미만은 아르바이트가 금지 되어있다. 적어도 네 동생이 아르바이트로 취직해서 신원보증서를 채워 낼 순 없을 거다."
ㅡ디바의 모든 퇴로를 끊어버렸다.
*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고?
그야 물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큐브는 너 같은 놈에게 못 넘긴다고 물고 늘어지는 디바와 어쨌거나 됐으니까 시끄럽고 큐브나 내놓으라는 카이바 세토와의 설전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없었기에 사장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쿠바와 세라가 사이좋게 들어와 형님과 오빠를 말리느라 십오분 정도는 걸렸다.
모쿠바는 현실적으로 큐브를 사용 한 사람은 디바 밖에 없기 때문에 큐브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가 아니라는 말로 자신의 불도저같은 형님을 말리느라 최선을 다했으며, 세라는 플라나의 모든 동료들이 이미 일본에서 먹는 낫토와 가츠동에 질린지 오래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우습지만 이 동생들의 지적은 매우 날카로웠다.
카이바 세토가 제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고 해도 '차원'을 다루는 물건을 함부로 썼다간 언제 몸이 영자로 조각나서 차원 저편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유우기와 마지막 듀얼을 하며 한번 소멸 당해보았던 기억에 의하면 그건 카이바에게도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디바 또한 세라의 말에는 입이 백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플라나가 모이던 장소에서 디바의 복수심 하나에 공감해 일본으로 온 플라나들이 능력을 잃어버린 지금, 뜻밖의 부랑자 신세가 되는 것도 모자라 무료로 제공되는 낫토에 감사하며 꾸역꾸역 가츠동이나 먹는 생활을 앞으로도 반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이집트로 돌려보낼 비행기삯이 있냐고 하면 당연히 있을리가 없고.
현실적인 문제에서 둘은 힘을 합쳐야만 했으나 물과 기름보다도 더 섞이지 않을 두 사람이었으니 큐브의 소유권이 불분명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찾아낸 타협점이란, 카이바 세토가 듀얼 디멘션 시스템의 시험작을 만들어 낼 때 까지 영자 큐브를 '대여'해주는 것과, 디바와 모든 플라나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차원 영역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것을 대가로 카이바와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후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정작 본인들은 이 미적지근한 협력관계 자체에 상당한 회의감을 가지는 건 물론이고 비아냥을 숨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지켜보던 동생들의 간이 콩알만해질 정도로 악담을 주고 받는게 일상이었던 카이바와 디바였으나, 의외로 이 협력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게 확실하기 때문인지 둘은 업무 외의 사담은 일절 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칙으로 두었을 뿐 일은 제대로 했다.
"ㅡ그럼 이 건에 대해서는?"
"차원과 차원에 발을 걸친 채 이동한다…발상은 나쁘지 않지만 어중간한 차원 시프트는 시도하지 않는게 좋아. 차원 영역 듀얼과 마찬가지야. 현실세계와 우리가 목표로 했던 고차원의 경계에 걸쳐져 있는 상태에선 무슨 일이 일어 날 지 모르니까. 자칫하면 너를 구성하는 영자 자체가 불안정해져서 현실세계와 고차원의 세계, 어느 쪽에서도 속하지 못하고 네 존재 자체가 증발 해 버릴수도 있지. 그런 건 질이 나빠. 차라리 완전한 차원 시프트를 실패했을 때 돌아오는 방식을 연구하는 게 낫지. 난 안 돌아와도 상관 없지만."
"흥. 네 놈 좋은 일만 시켜 줄 성 싶나? 연구만 끝난다면 너희들 모두 포대기에 싸서 백룡 제트기에 짐짝으로 실어다가 이집트로 강제 송환 시켜주지."
"아 그래? 그 잘난 머리로 잘 고민 해 보라고. 내가 배알이 뒤틀려서 깜빡 다른 차원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줘도 알아서 차원 이동 해야할 거 아냐?"
…일단은 일은 제대로 했다.
아마도.
*
놀랍게도 카이바 세토가 듀얼 디멘션 시스템의 시험작을 만들어 내는데는 고작 일주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건 디바가 예상 한 것 보다도 수십배로 빠른 속도였다.
더더더욱 놀라운건 카이바는 이미 요 전에 한 번 세라의 힘을 빌려 파동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걸 성공했었다고 하는데, 내 귀여운 동생과 뭘 했던 건가 싶어 디바의 복장이 한 번 뒤집혔다. 하지만 카이바에게 중요한 것은 디바의 뒤집혀진 복장보단 두 사람 만으로는 진입에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이었나보다.
카이바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충실한 심복 푸른 눈의 백룡과 함께 진입하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본인이 원하는 듀얼을 펼칠수는 없는 상황이었음을 시인했다. 따라서 '이번에야 말로 내 손으로 아템을…' 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장황한 소리를 디바는 요령껏 무시하고 차원 영역에 대한 자신의 고찰을 지면에 상세히 적는 것으로 맡은 바를 다했다. 오죽하면 그 카이바의 동생이 덕분에 살았다는 말로 작게 노고를 인정할 정도였다.
완성된 듀얼 디멘션 시스템이 얼마나 높은 완성도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해야 시험작이라고 여기는 디바로서는 카이바가 당장이라도 시스템을 실행시키려 하는 기세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디바는 금방 카이바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는 쪽을 골랐다. 한마디로, 쌩 까기로 했다.
내심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카이바는 내버려 두고, 카이바 코퍼레이션이 몸소 후원해 준 덕에 일주일 간 플라나들은 더 이상 기름진 가츠동과 규동만을 먹으며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환호했으며 이집트로 돌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에도 소리 없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카이바 본인의 배려인지 아니면 그의 건방지지만 영민한 동생의 배려인지, 플라나들은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배움의 기회를 얻기까지 했다.
디바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학교라는 곳에서 일상을 누려 보았던 만큼, 고통스러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플라나들에게도 만인에게 공평한 배움의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는 크게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은 잘 와닿지 않는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며, 어쩌면 세라나 자신 또한 모국으로 돌아가 평범한 일상이란 것을 누려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겼다.
마지막 날까지 카이바의 기기묘묘한 언행에 시달려야만 했지만, 어쨌거나 디바는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잘 풀린 것이라는 마니의 말을 필사적으로 되살리며 자신을 컨트롤했다. 때맞춰 모쿠바가 비행기 표 서른장을 들고 와서 그에게 건네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없어진 플라나의 힘을 되찾는 한이 있어라도 카이바를 차원 저편으로 보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뭔가 잊어 버린 것 같은데."
"왜 그래 오빠?"
"……아냐 아무것도."
디바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것도 잠시, 세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공항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집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아무리 생각 해 봐도 뭔갈 잊어버린 것 같은데. 하지만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나보다.
"비행기 시간 다 됐나 봐. 나 비행기는 처음인데."
"무서워?"
세라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 모습을 보자 디바는 저도 모르게 푸, 하고 웃어버렸다. 플라나들보다 먼저 이집트로 돌아가서 그들을 기다리겠다고 선언한 세라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시험작도 만들었으니 멋대로 하라며 쫓아내다 시피 한 카이바 세토의 얼굴에 주먹 한 번 정도는 꽂아주지 못한게 천추의 한으로 남을 듯 하지만, 대신 카이바 세토가 깡그리 잊어버린듯한 졸업식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소소한 복수는 대신했다. 졸업장 없이 중졸로 살아보라지. 젠장 그래봤자 카이바 코퍼레이션 사장이니 별 탈은 없겠지만 어쨌든 세라와 함께 이집트로 떠난다면 다신 볼 일 없는 녀석이다.
디바는 창 밖의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많은 일이 있었고, 결코 기쁜 일만 가득했던 땅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이 곳에서 지낸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무너진 이상과 부서진 미래. 하지만 이 손을 함께 잡아주는 여동생 덕분에 디바는 유우기가 말했던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장소에서 겨우 무언가를 시작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플라나의 능력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갈수 없는 곳을 향해 허우적거리지 않고 하나씩 현재에서 희망을 쌓아나가기 위한 매듭을 지은 땅. 언젠가는 돌아와서 증오 했던 것들도 미워했던 것들도 털어낼 수 있을까.
"이제 가자."
"응."
비참함에 젖었던 곳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현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왠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길고 긴 탑승 통로를 지나, 처음으로 차보는 안전벨트. 기압의 차이에 멍멍해지는 고막. 비행기의 바퀴가 접어들고 작은 창문 밖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파도와 구름에 눈이 멀듯했다. 빛나는 창공과 빛나는 누이의 눈동자처럼 디바는 마치 미래도 그렇게 빛나주길 기원했다.
ㅡ그리고 이륙 후 4시간 후.
디바는 드디어 카이바가 빌려준 영자 큐브를 들고 홀라당 다른 차원으로 튀었다는 걸 깨달았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