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가더 (SOUL GUARDER) - AU 트로이메라이 01
자기 덱을 꺼내 보는 건 오랜만이다.
생업에 치이고 생활에 치이다 보니 제대로 꺼내 본 게 언제 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한심하지만 회사에선 수많은 카드들을 카이바의 등쌀에 못 이겨 보고 있었지만 정작 자기 덱을 조정 할 시간 조차 제대로 안 났었거든. 어째 카드들에게 면목 없어지는 변명들만 잔뜩 하고 있다. 쓴웃음을 지으며 한 장 한 장 카드를 넘기며 느끼는 건 오직 하나. 실제로 듀얼에서 잘 통하냐 안 통하냐는 우선 사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카드들에 얽힌 추억들이 꼭 하나 씩은 있어서, 밸런스가 안 맞는다는 걸 알아도 빼는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그대로 끌어 안고 가버리게 된단 말이지.
피식 웃으며 끝까지 넘긴 카드의 마지막장에는 예상대로 내가 가장 아끼는 카드가 있었다. 레드 아이즈.
사활을 걸었던 듀얼의 증거인 카드를 가만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장 소중했던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들의 배틀 씨티. 몇 번이나 나를 격려 해 주었고 그 이상으로 투지를 들끓게 만들어주었던 친구와의 모든 추억이 이 카드에 담겼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너의 마지막을 생각해냈다. 무저갱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땅 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버린 천년 아이템들. 유우기가 언제나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황금 퍼즐. 퍼즐을 목에 걸고 누구보다도 꼿꼿하게 이 땅을 밟고 그 흔적을 새기고 간 나의 친구이자, 나의 왕. 유우기이자 아템이었던 친구와 등을 맞대고,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기억 할 것이다.
그 헤어짐의 무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템. 너와 함께 했던 추억들은 너무 강렬하단 말이야. 우리의 우정 만큼이나 쉽게 휘발 될만한 게 아니야. 너와 우리가 서로의 길을 걷게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이를 먹게 되니 가끔은 너랑 술 한 잔도 하고 싶고, 아무 말 안 해줘도 좋으니까 그냥 옆에 앉아서 내 푸념이나 들어줬으면 할 때도 있고. 그렇거든.
나이를 먹을 수록 진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가능성은 낮아지니까. 그래서인지 가끔 아템이 엄청나게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기억이 엉망으로 습격해와서 기분이 떡이 될 때도 있다. 너는 왜 없는 걸까. 너는 왜 우리와 함께 앞으로도 같은 시간을 달려 나갈 수 없는걸까. 너는 왜.
너는 왜 지금 우리의 곁에 없는 걸까.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밀려 들어오던 시절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참 큰 착각인가?
"……."
카드를 넘길수록 차분해졌다.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방향이 다른 삶을 사는 친구와 헤어진 지 벌써 십년 가까이 흘렀다. 여전히 보고싶고, 분명 내일 당장 만나도 어제 만난 친구 사이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를 나누겠지.
하지만 대체 그 녀석은 왜?
"ㅡ왜 이제와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등줄기를 얼어 붙게 만들 정도로 반론을 용서하지 않던 새파란 눈동자. 서슬 퍼렇게 뜬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고, 녀석과 나는 그 날 이후 가뜩이나 없었던 대화가 더더욱 줄어들었다. 아마 이 문제를 더 논해봤자 서로의 의견이 평행선일 걸 불 보듯 뻔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십 년 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기술력과 카이바 본인의 듀얼 실력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분하지만 한 때 프로 듀얼리스트를 꿈꾸었던 내가 봐도 완벽함에 가까운 전술과 덱 구성에 원숙함이 더해졌더니 이제는 심리전인 측면에서도 밀린 적을 본 적이 없다. 카이바 세토는 전 세계에서 최강의 듀얼리스트를 꼽을 때면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다. 이제와 최강의 듀얼리스트를 가리는 것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본인도 동의 할텐데. 대체 어째서?
의문은 깊어졌지만 대답 해 줄 이는 한명도 없었고, 덱을 내려놓고 대신 집어 든 핸드폰으론 오늘도 유우기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갑갑한 마음에 머리카락을 벅벅 긁고 죄없는 핸드폰을 던졌다.
아템은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
하지만 분명, 이런 방식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이런 식으로 재회한다 한들 의미따윈 없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의미가 있냐던가, 그런 식으로 물어 보지 마. 나도 유우기도 조리있게 설명 할 수 없어. 그리고 우리 둘이 설명 할 수 없다면 이 세상 누구도 설명 할 순 없는 거라고.
우리가 말 없이 나눈 마지막 인사를 너는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건지.
혹은 알아도 자기 고집을 부리느라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나는 쿠션을 깔고 그 위로 몸을 던졌다. 갈수록 차분해지는 머릿속으로 그날 밤 내내 두 사람을 생각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녀석에 대해서.
*
조금 천천히 와도 괜찮은 순간들은 언제나 눈 깜짝 할 사이 코앞까지 성큼 다가온다. 귀찮은 쓰레기 분리수거날 정도는 애교지. 카이바를 쫓아 다니느라 나흘 내내 새우잠조차 자지 못하는 해외 출장 순회기간, 혹은 알콜 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아버지와의 면담날이 날 덮치듯 밀려오는 것과 비슷하다. 안그래도 피할 수 없어서 난감한데. 좀 천천히 와도 되거든 그런 순간들은.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기술력은 과연 헛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카이바의 양 팔로 불리우는 모쿠바와 이소노씨는 나와 다르게 카이바의 말에 한 마디 이견 없이 명령을 수행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카이바가 우리의 작은 티타임을 깽판친지 2주도 안되서 두 사람은 정말로 천년 퍼즐을 찾아왔다. 신성한 땅을 뒤집어 엎었다며 요 근래 부쩍 KC 앞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정도로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모든 재력을 총 동원한 대규모 작업이었다고 한다. 이소노씨가 졸도할 것 같은 표정으로 집에도 못 돌아가고 출장을 하루 단위로 다녀온 걸 보면 녹록치 않은 작업이긴 했겠지.
나도 카이바 녀석의 SP로서 일한지 벌써 3년이다. 고참까진 아니어도 신입 티 못 벗은 햇병아리 애송이는 아니게 되었단 소리다. 카이바와 매번 티격태격 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퍼부어버린 바람에 내게 대단하다며 박수를 쳐주는 선후배도 생겼을 정도니까. 어…그러니까, 나는 얼마든지 원하면 작업 현황이나 발굴 관련 자료를 훑어 볼 수 있는 입장이긴 하다. 카이바도 딱히 내게 그런 걸 숨기진 않으니까.
이집트 땅을 얼마에 매입했고 공사 인부가 몇 명이 들었는지, 천년 퍼즐을 구성하는 조각들이 총 몇개이고 얼마만큼의 시간과 돈이 들었는지 숫자를 알아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관심이 없다.
그 증거로 카이바와 나는 그간 아템이나 천년퍼즐에 관한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고 서로가 할 일만을 했다.
그 녀석은 언제나처럼 신형 듀얼디스크 연구에 몰두했고, 나는 연구 자료를 노리고 침투하는 외부인을 그 자리에서 체포하거나 공식 행사에서 카이바에게 달려드는 불한당의 안면을 걷어차는데 최선을 다한 게 근황의 전부다.
즉 카이바는 내게 보너스는 없다는 말로 코웃음을 쳤고, 나는 이 정도로 남에게 원망을 살 수 있단 것도 재능이라며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주는데 날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다.
카이바 세토는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 넘는 놈이다.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건 바로 내가 바라지 않았던 천년 퍼즐의 모든 조각이 엄중한 세큐리티 시스템과 함께 본사 연구실로 옮겨져 왔을 때였다.
그래,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기술력을 얕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까 싶었다.
단 2주. 카이바의 집념과 재력, 고집과 녀석의 등을 밀어주던 조력자의 힘은 내가 바라지 않았던 순간을 순식간에 앞당겨왔다.
설마 이 퍼즐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형태로.
"어때? 땅에 묻혀 있던 거라곤 생각 못 할 정도로 깨끗하지? 물론 퍼즐을 전부 맞추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말야."
"굉장하네."
"그렇지? 이걸로 첫 단계는 클리어야."
모쿠바는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끔하게 머리를 자른 모습이 최근 사내 게시판에서 비밀리에 인기를 끌고 있다던가- 하는 쓸때 없는 생각들을 잠깐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혼란스러운가보다.
카이바를 쏙 빼닮은 포즈로 팔짱을 낀 채 황금색 퍼즐을 찬찬히 훑어보는 모습은 중학생도 안 된 소년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당한 풍채였다.
카이바가 사람을 위광으로 내리 찍어누르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모두를 쓰러트리고 돌진한다면, 이 녀석은 자연스럽게 남의 응원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고 짊어질 줄 아는 커다란 그릇이다. 아직은 카이바의 뒤에서 한 발 물러나있지만 분명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부사장을 해내고도 남는 녀석이라 해야하나. 카이바의 천년 퍼즐을 찾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불만 한마디 안 내뱉고 즉시 이행하고 이렇듯 해낼 정도니까 더 긴 말은 필요 없겠지.
"너 말야, 이렇게 태연하게 찾아오면 어떡하냐. 이러니까 카이바가 항상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기대치가 높아지는 거 아닐까."
"무슨 소리야?"
"너무 일 잘하는 동생을 가진 형님은 눈이 갈수록 높아 질 수 밖에 없단 거야."
나는 쯔, 하고 혀를 찼지만 모쿠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이 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니 왜 못 알아들어. 이집트의 성지를 죄다 갈아엎으면서까지 형님이 원하는걸 해다줄 정도로 오냐오냐 하고 있으니까 카이바가 갈수록 남들한테도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단 소리인데.
이 형제 정말 괜찮으려나. 일단은 내가 옆에 있긴 하지만 쫓아가는 것도 가끔은 벅찰 정돈데.
"에이 됐다. 말을 말자. 잘도 찾아왔네 정말…."
나는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리곤 기묘한 모양이 양각으로 새겨진 퍼즐 조각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한때는 역삼각형 모양으로 완성된 모습을 잘 알고 있는 퍼즐이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수많은 조각으로 구성되어있었구나 싶다.
유우기는 퍼즐을 맞추는데는 8년이 걸렸다고 했다. 정말 어린 시절부터 맞춰 온 퍼즐이었고 아템이 그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목숨을 걸고 지켜내며 아꼈던 물건이다. 잘 때도 몸에서 떼어 논 적이 없었다.
헌데 아무나 퍼즐을 맞출 수 없는 건 자명한데, 카이바는 이걸 또 언제 다 맞추겠다는거야. 맞추고 나선 정말로 아템을 불러 낼 작정이고?
잠시 우리 사이에 귀신이라도 지나갔나보다. 모쿠바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둥근 유리관 안에 보관된 퍼즐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세큐리티 시스템이 복잡한 기계음을 내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죠노우치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말이야?"
"형님이 하려는게 무슨 일인 지 알고 있잖아."
빤히 들여다보는 눈동자는 제 형 만큼이나 푸르진 않아도 차분하게 마음을 읽어내려는게 형과 똑 닮았다. 이런 부분까지 형제 일 필요 있냐 너희.
물론 알고 있다. 아템을 다시금 불러내, 그 혼을 깃든 유우기와의 듀얼을 하고 승리를 거둔 채 모든 걸 쥐고자 하는 네 형의 심리를 내가 왜 모르겠냐. 그런데 그게 말야. 참 얄궂지만….
"가지고 싶은 걸 전부 쥘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모쿠바."
"……."
"카이바는 결국 포기 해야 할 거야."
"죠노우치는 형님의 시도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거야?"
"글쎄…그런 말은 아닌데."
"유우기에게 연락은 해 봤어?"
가슴 한 구석이 뜨겁게 요동친 것 같다. 유우기에게 연락은 해 봤어?
2주가 조금 안되는 시간 동안 있던 일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스케일이었다. 하지만 천년 퍼즐을 발굴하기 위해 일대를 모조리 파헤치고 부상자까지 나왔다는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카이바는 내게 천년 퍼즐은 고사하고 아템의 이름조차 꺼내지 않았다.
다만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날 나를 쏘아보며 딱 하나 명령했었다. 무토 유우기에게 연락해라.
독일에서 네 꿈을 펼치고 있을 친우를 불러, 그 몸에 왕의 혼을 깃들게 만들라던 명령.
"웃기지마. 했을 리가 있겠어?"
시도 정돈 해봤다. 연락을 해 보려고 했어. 유우기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던 적이 몇 번이었는지 세지도 못 할 정도다. 하지만 결국 전화를 건 적은 없었다. 얼마나 오래 핸드폰을 쥔 채 고민했는지, 그 중 한두번은 유우기에게서 사소한 일상을 적은 안부 메일이 와서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다. 전화가 힘들다면 메일로라도 전해볼까.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역시 적는건 불가능했다. 나보다도 훨씬 더 아템의 존재가 가슴을 매웠던 유우기에게 해도 좋을 말이 아니다.
유우기. 너와 카이바의 힘으로 아템을 불러내자.
불러내서, 그 다음엔….
"ㅡ대체 뭐라고 말 하면 좋은데? 카이바가 고집을 부리니까 네가 와서 져주라고? 아템을 불러서, 카이바와 듀얼 좀 시키고 오랜만에 안부나 묻자고?"
"……."
"모쿠바. 떨어진 거리는 상관 없이 그저 상대를 진정으로 위해줄 수 있는 우정이 있어. 우리와 아템의 우정은 그런 종류야. 그리고 난 카이바와 듀얼을 하기 위해 이 세계에 아템을 불러내는 게, 아템을 위한 일이라곤 생각 하지 않아. 그러니까 난 절대 유우기에게 연락 하지 않을 거야. 카이바가 뭐라고 하건, 혹은 카이바와 갈라지게 되더라도 절대."
조금 차갑게 들릴 정도로 내 목소리는 단호했다. 입밖으로 내고 보니 정말 쉬운 문제다. 아템을 위해서, 난 더더욱 카이바의 행동을 지지해 줄 순 없었다. 근본부터 카이바의 편인 모쿠바나 이소노씨와는 달랐다.
카이바의 모든 행동을 지지하고 따라주지 않는 녀석이 이 회사에 한 명 쯤은 있어도 되지 않냐는 내 말에 매번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응수하던 모쿠바의 얼굴이, 이번에는 조금 굳어 있었다.
"날 설득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빠를 거야."
"그럼… 멈추게 할 거야? 죠노우치는 형님을 말릴 생각이야?"
"……."
머리가 아파온다. 모쿠바의 반응은 아까 전 부터 내가 생각 했던 것 들과 다 달라서 그게 문제였다.
카이바를 멈춘다니, 왜 그런 본인도 불가능 한 일을 내게 물어보는 거야. 안 그래도 복잡한 마음인데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녀석이 남이 말을 해서 듣는 녀석이라면 너나 나나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냐고 소리 칠 뻔 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모쿠바에게 화를 내봤자 돌아오는 거라곤 동생을 남 모르게 끔찍히 아끼는 카이바의 보복이겠지. 북풍한설 같은 업무 태도로 나를 괴롭힐게 뻔 한데 모쿠바에게 화풀이 할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다. 게다가 그건 연장자로선 할 짓이 못됐다.
모쿠바를 달래주진 못할 망정 화풀이라니, 어른이 되라고 죠노우치 카츠야.
"나도 몰라."
"…죠노우치."
"모르겠다 모쿠바, 내가 녀석을 말릴 수 있을지…. 어때 보여? 내가 말릴 수 있을 것 같냐?"
"……."
다시금 침묵만이 우리 사이를 휩쓸었다. 어느새 보기 좋게 팔자 눈썹으로 찌푸려진 모쿠바의 표정은 조금 슬퍼보였다.
아 진짜. 저렇게 서글픈 표정을 하라고 내뱉은 말이 아닌데. 역시 어른이 덜 됐다 난.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모쿠바가 모를 리는 없다. 카이바가 결단을 내린 일을 무를 리가 없다는 걸 이미 잘 알아. 아마도 난, 녀석을 말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을 녀석이기도 하고, 나 또한 아템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아템을 위해서 참고 있는 거다.
그 녀석은 다시 여기에 와선 안 될 녀석이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이상 황금색 혼이 가장 눈부실 왕좌 위에서 영원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 마음이 있고, 우정이 있어서 나는 나의 왕을 위해 내 욕심을 접었다. 가끔은 술 한잔을 함께 하고, 푸념 섞인 한탄을 늘여놓거나 함께 듀얼을 하거나 놀고 싶다는 욕심을 곱게 포장해서 내 마음 한 구석에 두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서 마음을 접은 몇 년이었다.
하지만 카이바는 다를 것이다. 유우기를 부르라는 말에 웃기지 말라며 배라도 째버리라며 배짱을 부리고 있지만 내가 안한다면 본인이 직접 할 녀석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겠지. 무토 유우기, 왕의 혼을 깃들게 할 수 있는 단 한명의 그릇으로서 책임을 져라.
미안, 하고 짧게 사과하고 말았다. 일을 친 본인은 없는 곳에서 우리가 이러고 있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냐는 내 말에 모쿠바는 쓰게 웃더니 끄덕였다. 저렇게 착한 동생을 슬프게 만들다니 넌 역시 개자식이야. 카이바를 향해 욕을 한바탕 하고 싶은 마음을 접고 한숨을 푹 쉬었다.
모쿠바는 곧 회사 내부 무전을 받더니 나중에 보자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아마 좀 더 이야기 할 수 있을테지만, 나와의 불편한 공기가 싫어서 걸음을 돌린 것 처럼 보였다. 아직 나보다 대여섯살은 어린 애한테 뭔 짓이냐 난. 짧은 순간 내 자신이 싫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런 경험 안한지 꽤 됐는데.
"하여간 이게 무슨 사단인지 모르겠다니까. 카이바도 참 도움이 안되는 녀석이지…그치? 유우기."
쓰게 웃으며 동의를 구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유우기. 또 하나의 너는 아직도 이 퍼즐 안에 잠들어 있을까. 네 혼은, 그 문 너머로 지나간 후 어떻게 되었을까. 퍼즐 안의 왕좌에 앉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을까. 유리관 너머의 퍼즐조각을 보며 유우기이며 아템이기도 했던, 내 소중한 친구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맞아. 참 도움이 안 되는 남자란 말이야."
ㅡ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퍼즐 조각이 늘여 놓아진 유리관 너머에는 대체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던 건지.
처음 보는 소년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천년 퍼즐과 똑같은 황금색 안광을 번뜩인 채.
*
"그렇지만 재밌는 남자이긴 해. 안 그래? 보통은 이런 발상은 해내지 못하니까."
"아 뭐. 그래, 근데 당하는 입장에선 보통 고역이 아니거든."
그래? 그것 참 고생이 많겠네.
살풋 눈웃음을 치는 모습은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내겐 좀 더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사냥감을 앞두고 도약할 힘을 얻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는 표범이나 치타, 그런 걸로.
남색 머리를 길게 늘여트린 소년의 옷이 펄럭였다.
천년 퍼즐 조각들이 들어가있는 유리관을 훑는 손가락은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왼손에는 본 적 없는 네모난 물건을 들고 있는 소년의 머리에 달린 금장식이 조명을 작게 반사했다. 복잡한 문양으로 장식된 옷 소매.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와 이마의 삼각형 모양 노란 마크.
어딜 봐도 평범한 복장은 아니잖아. 아무리 카이바 코퍼레이션 사장부터가 코트에 듀얼 디스크를 넣고 걸어다니는 인간이고 복장 자유라곤 해도 사회통념상 용납 받을 모양새는 아니지.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아니, 애초에 누구인 거지?
이 곳은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연구실 중에서도 가장 강도 높은 보안을 자랑하는 장소이다. 카이바 세토가 이름을 외워둔 연구원이나 소수의 인물들이 아니라면 발을 들여놓긴 커녕 이 장소의 존재조차 모르는 시설.
ㅡ그렇다는 소리는?
"하지만 어떤 남자이건, 신성한 장소를 갈아 엎고 파라오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는 응당 심판이 필요한 법."
"카이바한테 손가락 하나 댈 생각 하지 마."
"ㅡ심판의 때는 돌고 돌아 찾아오는 법이니 미룰 수 있어. 하지만 이 천년 퍼즐 조각은 순순히 넘길 수 없지."
품 안에서 총을 뽑아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침입자의 눈매가 바뀌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관이 깨지는 소리.
그리고 연구소를 뒤흔드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비집고,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