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25 전하지 않을 축사와 답가
졸업과 함께 작별은 찾아왔다.
입학이라는 기회로 새로운 이를 만나기 전 이루어질 필연적인 단계이다.
축사와 답가는 결코 당신이 들을 수 있도록 입에 담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가슴 안으로 집어 넣을 뿐이다.
이제 작별이다. 안녕히.
*
입학식의 상징은 흐트러지게 핀 벚꽃이다. 눈송이처럼 휘날리는 꽃잎을 보며 봄의 향기에 취하고 새로운 시작에 설레이곤 한다. 그렇다면 졸업식의 상징이란 무엇일까.
조용히 화단에 걸터 앉은 채 아직 새싹이 피어나지 않은 벚나무를 올려다보며 실없는 생각에 잠겼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두번의 졸업을 경험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건 어쩌면 나 자신이 졸업이라는 것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고 하뉴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 해보면 어쩌면 오늘의 졸업식은 인생 처음으로 무언가의 의미 있는 감상에 젖은 졸업날일지도 모른다. 목적은 한 사람을 위해서는 아니다. 제법 신세진 선배나, 어쩌면 이번 졸업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어쩔지 장담할 수 없는 선배가 제법 있으니까. 결코 강요가 있었다던가, 어쩔 수 없네- 라며 투덜거리면서도 못내 따르던 태도로 인연 없는 3학년 졸업식에 오게 된게 아니었다. 분명하게 참석의 의사를 밝혔던 건 이례적이다. 신기하지만 그래야만 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태연하게 누군가의 졸업에 축하를 던지며 꽃 한송이씩을 건네러 올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는.
내 자신에게 질려버린 웃음 인건지. 픽하고 터진 웃음은 아마도 반년 전과 그리 다를 것 없을텐데 마음은 제법 평화롭다. 아무리 그래도 졸업식장 내부로 들어갈 엄두는 안났다. 교복차림이니 어색할 건 없지만, 얌전히 다리 오므리며 있어야 할 손님 좌석에선 오히려 꾸벅꾸벅 졸아버릴 거라고.
조금은 부산스러운 학교의 대강당 바깥에서 졸업식 노래가 들려오는 것을 가만 듣고만 있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모두 함께 선배들의 졸업을 축하하자며 가면라이더부 일동이 왁자지껄 모이게 된 졸업식은 평소 여행이니 뭐니 들떠서 밀어붙이던 실행력이 어디 안갔다는 걸 증명했다. 아마 졸업식이 끝나면 누군가는 선배의 졸업이 아쉽다며 눈물을 쏟아내겠지. 아쉬운 사람들과의 작별을 의미하는 졸업식이다. 눈물 흘린다고 창피할 건 없겠지.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준에선 말이야.
실없는 생각이 흐른다. 귀를 통과하는 졸업식 노래는 계속된다.
*
가장 신세졌던 야츠야나기 선배에게는 언제든 부르실 일 있으시면 연락하라고 구십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코우토와 함께 있던 어른스러운 코우사카 선배에게는 조금은 어색하지만, 축하를 감히 입에 담았다. 졸업식보다는 입학식이 더 잘 어울리는 작은 앵두같은 사츠키 선배에게는 조금을 고개를 숙여서 축하인사를. 여기서 보고 말 거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쾌활하고 자신감있게 웃던 카스가 선배에게는 웃어주고 손을 맞댄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혹시라도 울고 있는건 아닐까 걱정했던 히라이 선배는 깜짝 놀랄 정도로 어른스러워보여서 오히려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하면서 내가 놀라버렸다니까. 언제든 부실에 놀러오라는 약속과 함께 굉장한 기세로 하이파이브에 응한 무바라라키와는 어째 졸업식답잖은 인사였지 않나 갸웃거렸고. 일본에서 다시 볼 수 있냐는 내 질문에 웃음을 터트린 앤서니 선배는 갑자기 내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는데, 졸업식이니 축하한다고 인사하며 참은 거라고. 호리에에게 두번째 단추를 건네주려고 찾고 있었는지 하마터면 놓칠뻔한 시로가네 선배는 내 허리를 쿡 찌르며 앞으로 잘 지내라며 되려 날 격려했는데 원 참. 축하할 타이밍을 놓칠뻔 했잖아.
그리고 당신이 남았다.
당신은 의외로 한가해보였다. 같은 반의 친구들, 그 다음에는 선생님. 조용히 인사를 나누다가 때로는 어색하게 사진을 찍고 나선 뭐가 그렇게 가슴에 사무치는지 조용히 학교를 훑어보고 서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축하를 전했지만, 역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른사람에겐 전부 축하를 받더라도 내게는 받고 싶지 않겠지. 당신은.
나는 참 당신에게 확실한 미움을 받았다. 알기 쉬운 분노의 화살표 방향을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피하지를 않았다. 타인을 상처입혔기에 돌아온 인과응보의 미움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일까. 아직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다만 이제 조심스럽게 생각을 열거 해본다. 목적이 뚜렷한 증오였기에,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기에 당신의 증오가 내게 더욱 확실하게 다가와 박혔던 것으로 예상해본다. 피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피할 줄 몰랐던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언제까지나 가슴을 펴고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당신에게서 느껴질 자그마한 증오도 나를 피곤하게 하니까, 이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고 마주 미워해주겠다고 이를 갈테지. 그러니 이쯤에서 작별은 맞는 말. 당신에게 졸업식이란, 제 자신의 인생을 괴롭게 한 더럽게 건방지고 재수없는 후배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도록 잊어버릴 수 있는 시작의 기회. 시구레 치히로의 인생에서 더이상 하뉴 타카히사를 인식조차 하지 않을 시작의 날이다.
그래서 망설였다. 당신의 졸업을 내가 축하해도 될지. 나는 당신의 졸업을 축하해주고 싶은 건지.
"잘…."
잘 지내, 졸업 축하해- 라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내가 당신에게 내밀어도 되는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난. 항상 모르는 것 투성이야. 그래서 일년이라는 시간이 내게 더 남아있는 걸지도 몰라. 남겨져서, 더 배우라는거 겠지. 과연 뭔가를 배울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고민조차 남겨져 있어야 할 사람의 역할이겠지. '아직 모르겠어.' 라는 말은, 남겨진 사람의 특권이자 역할인거야. 그러니 섣불리 입에 담지는 않을게. 축사도 답가도 입에 올리지 않는 거야.
"…잘가. 시구레 치히로 선배."
"……."
당신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잘못 분리수거된 재활용 자원물을 보는 눈길이라도 던질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하기사 언제나 당신이 내 예상에 맞아 떨어져 준 적은 없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잘 들어맞은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관계니까.
교정을 올려다보던 당신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천천히 나를 지나쳐가기 위해 걸어나왔다. 머지 않아 입을 열어 말했다.
"네에. 잘 있으세요 하뉴 타카히사 후배."
그렇게 당신은 나를 지나쳤고 그걸로 끝이었다. 선은 그였다. 우리는 이제 여기까지.
당신은 나를 향한 증오 같은 게 자신의 마음이 좀먹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천천히 당신에게 미움받았다는 사실조차 잊으며 돌아갈 것이다. 으레 모든 사람들이 겪는 졸업식의 작별이 끝나고, '예전에 알았던 잘 기억 안나는 누군가' 라는 관계가 되는 거겠지. 그러니 나는 남고, 당신은 떠난다.
전하지 않을 축하와 답가. 꽃망울과 함께 터져나올 봄의 계절. 당신이 증오를 놓고 간 교정의 한구석에서 나는 남겨져 있을것이다. 아직 떠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으니까. 당신은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잊게 되겠지.
벌써 교문 저만치로 사라져버렸을 당신의 뒷모습은 딱히 보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이것으로 되었을까, 자문해봤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차마 전하지 못한 말 따위는 없으니까 더 이상 너저분한 감정들과는 작별 할것이다.
벚꽃 만큼 대단하게 대신할게 없는 졸업식날이었다. 우리가 가졌던 증오와 불편한 감정들은 전하지 못할 축사와 답가가 되었다. 작별이 되었다.
이제 당신과 작별이다. 부디 안녕히. 잘가, 잘 있으세요.
그렇게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