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소원을

답보 #12 혈혈단신의 이중성

RSW 2014. 8. 2. 21:08






이것은 깊은 실망이다.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길 위에서, 애매한 선택을 고집하던 자신을 향한 실망.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을 앞둔 한탄이다. 


답보를 반복하는 제 자신을 향한 감정은 곪는 상처처럼 부풀어오르다가,

─언제나 그랬듯 가슴 한 구석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






-반복합니다. <가면라이더부>는 의무가 아닙니다.




기분 나쁜 시계초침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엉망진창으로 구르고 난 이후의 기분은 제법 그럴싸하게 더러워서 누구라도 붙잡고 실컷 두들겨 팰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망은 주로 제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바람에 가까웠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금방 윤곽을 드러낸다. 제 아무리 대단한 스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혼자 힘으로 라이더부를 공격하는 괴물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분 나쁜 뒷맛을 참아내며, 이를 갈고 있는 동안 맛보아야만 하는 무력감.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이 갈곳 없는 분노와 자기혐오의 원인을 깨달았다.


혈혈단신의 한계다.




"조심히 들어가, 타카히사."

"매번 신세지게 하지 마십쇼. ……먼저 가봅니다."




통증이 조금씩 옅어지는 느낌과 함께, 누군가가 등을 두드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그나마 의지가 될만한 선배 한 명이 서 있었다. 방금 건 아무래도 메디컬 스위치였던 모양이다. 영문을 모를 '스위치'라는 걸 쓰는데는 아직도 거리낌이 많지만 이럴 때는 솔직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런 생각들은 언제나 제 속에 담아둘 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열 여덟. 고맙다는 말, 넉살 좋은 대답을 돌려주는 나 자신을 이제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실망하고 만다. 타인에게도, 내게도.




"같은 부 동료인데 이 정도는 신세로 생각하지 말아 줘."




ㅡ그런게 신세지게 한다는 거야. 짜증나게.



'성격 좋은' 상대를 마주하고 있으면 더더욱 두드러진다. 

발전이 없는 자기 자신이 노란 캔버스에 찍힌 빨간 점 처럼 말이지. 싫어도 시선을 던지게 된다고.


예상 외로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라이더부 녀석들에 대한 생각이 차오르자 답답함이 가슴을 가득 메운다.

알고 있어. 하나같이 좋은 녀석들이지. 적어도 선입견 없이 나를 대해주는 드문 상대들이다.

라이더부에 들어온지 적어도 한 달이 지났다. 좋은지 나쁜지, 그 정도의 판단 쯤은 설만한 기간이었다. 그런데도 왜일까.


여전히 나의 세계는 흑백논리로 결정된다. 그런 주제에 타인을 향해, 언젠가는 이런 나를 이해해 줄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기대를 품다가, 이내 지금처럼 실망하고 발을 뺀다.


타인을 받아 들 일 준비가 되지 않은 내게, 이해받는 관계를 갈망하는 내 자신의 어설픈 태도는 언제나 실망 만을 초래한다. 


그래. 그러니 이것은 깊은 실망이다. 관계의 정립은 불가능 한 일이다ㅡ 그렇게 생각하는 한 편으로 기대를 품고 마는 자신을 향해 끓어오르는 감정들은 어느날 문득 흘러 넘칠듯이 차오른다.





"피곤해."




가면라이더부는 의무가 아닙니다. 그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ㅡ어깨가 욱신거린다.







*







"오랜만이네. 교실에 없길래 꽤 찾았어."

"…그러게. 간만이다. 어떻게 찾았냐? 게다가 지금 수업 시간인데."

"교장선생님의 명령이라면 수업 쯤이야 한 번 빠져도 문제가 안되거든."




녀석과의 인사는 단촐했다. 나는 뻔뻔하게 그 말만을 하고 말았지만, 녀석은 내가 사이다를 마시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다. 민망하게스리.




"…내가 왜 온 건지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 때문이잖아."



나는 앞주머니 포켓에서 스위치를 꺼내서 그 녀석에게 흔들어보였다. 호피무늬 안경테 너머 갈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일렁인다. 녀석, 코바야시 유즈루는 스위치보다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애들이 이걸 뺏기기 싫다고 어지간히 짜증을 내야지."

"나도 느꼈어. 다들 스위치를 회수 하러 가니까 엄청나게 노려봤거든. 너도 그럴 생각이야?"

"설마."




코웃음을 치며 녀석에게 스위치 두개를 던졌다. 꽤 세게 던졌는데도 능숙하게 받아들인다. 의외로 운동신경이 둔하지 않구나. 혼자서 감탄해버렸다.


일련의 사건으로 가면라이더부의 위치가 어쩌고 폐부가 어쩌고 하더니, 결국 교장이라는 인간까지 몸소 행차하셨던 모양이다. 스위치를 회수 해 갔다는 말을 전해주며 다른 녀석들은 꽤나 분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홀가분하게 버려주마 싶은 기분이다. 


한여름에 남의 스위치를 가져가기 위해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교정을 돌아다니던 입장에선 꽤 신선한 대답이었을까. 코바야시는 내가 던진 스위치를 가만 내려다 보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 이렇게 미련 없이 주는 건 또 신선하네."

"별로. 그딴 게 있으니까 괜히 조디아츠인가 뭔가 하는 것들 앞에서 도망 치지 않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 했단 말이야?"

"그래."




입부 초, 하야미에게서 넘겨받은 스위치라는건 도저히 영문을 모를 물건이었다. 커다란 로켓이나 단단한 방패를 소환 할 수 있는 건 신기했지만, 이런 걸 소환해봤자 어디에 쓰란 거야. 물이라던가 불 같은게 나오는 스위치도 있나보지만, 여태껏 살아오는 동안 이런 스위치들이 필요한 순간은 그리 없었다. 조디아츠를 조우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스위치에 매달리는 다른 녀석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꺼림직한 감정은 버릴수가 없다.

'조디아츠' 라는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더더욱 그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물건을 재미있는 장난감 처럼 쓸수가 없다고 표현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수도 있겠지만. 별로 내키지 않아.




"대항 할 만한 수단이 없으면 알아서 도망치겠지. 딱히 라이더부 녀석들이 그거랑 싸워야 하는 이유도 없잖아. 싸우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다치는 것 보다는 나을테니까."




눈 앞에서 다친 녀석을 몇 명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안에 들어가있다. 입부 한 지 반 년도 안 지났는데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마음 속으로 한 질문은 공허하다. 대답 해 줄 상대는 아무도 없으니까.


코바야시는 가만히 내 쪽을 바라보다가 잔잔히 웃었다.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한 웃음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다치는 게 싫어?"

"……친구 아닌데."

"다치는 게 싫다는 건 부정 안 하는구나."

"그런 캐릭터였냐 너? 그냥 그렇다는 거잖아. 말꼬투리 잡지 말고 그거 줬으면 얼른 사라져. 낮잠 잘 거야."

"하하. 그래 가볼게. 그치만 수업 좀 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기말고사가 끝났는데 수업이고 자시고 무슨 소용이냐…고생해라."




손을 휘적휘적 내젓자 코바야시는 못말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등을 보이며 사라졌다. 


빈 사이다 캔을 우그러트리고 풀스윙. 깔끔하게 골인 되었는데도 전혀 상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날씨 때문이라고, 그런 생각과 함께 그늘가 벤치에 드러누웠지만 커다란 키는 장식이 아니라는 듯 무릎 아래는 삐져나온 꼴이 되어버렸다. 양 팔을 머리 뒤에 대고 가만 바라보자, 나뭇잎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햇살이 너무 밝다.




"그래. 가면라이더부가 의무는 아니지."




시계초침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 말만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일련의 조디아츠 습격은 기말고사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더 이상 어깨도 아프지 않고, 태연하게 시간만이 흘렀다. 


상황은 변했고, 스위치는 내 손을 떠났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 또한 남아있었다.

여전히 왁자지껄한 교정에서 가만히 서있는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말이 걸려 올 일은 없다. 혈혈단신의 몸으로 타인에게 이해받는 내 자신을 갈망하면서도 다가오는 사람을 거부하는 내 자신에게는 꼴사나운 이중성이 남아있다.


ㅡ그리고 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라이더부라는 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하뉴 타카히사가 밥그릇 주변을 맴도는 배고픈 개 마냥 오늘도 교정을 얼쩡거린다.




"한심하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은 작은 목소리로 자조하며 눈을 감았다.

제법 비참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