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소원을

선물 #08 결석의 이유

RSW 2014. 6. 23. 23:00







"그러고 보니까 깜빡했어."

"뭘?"

"니 생일 선물."




…순간 마시던 냉녹차 흘릴 뻔했네. 

근데 정작 말을 꺼낸 인간은 왜 저렇게 태연한거지. 형은 발끝으로 무릎을 긁어대는 신묘한 기술을 선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유카타 차림으로 그런 자세 하지 말라고. 속옷 보인단 말이야. 눈 썩어.




"내 생일 지난지 한 달도 더 됐거든?"

"준다면 닥치고 받으라고 이 애새끼야."

"…."




백 보 양보하더라도 그 태도를 고치고 줘야 하는게 아닐까. '생일 선물' 이 정말 축하하는 의미라면.




"아버지가 돈 주셨어. 내 돈도 아닌 거 목돈으로 굴려두면 재수 사납다."

"…돈으로 주던가 그럼."

"지랄."

"그럼 그 돈 가지고 뒈지던가."




형은 훌륭하게 내 얼굴로 실내용 슬리퍼를 명중시켰다.

언젠간 죽여버릴거야.


손 언저리로 떨어진 실내용 슬리퍼를 형 쪽으로 내던진 후 잠깐 잡지를 내려놓았다. 

이번 달 월드 챔피언이 바뀌었다는 충격적인 속보는 이미 너무 당연하게 예견 되었던거라 놀랍지는 않고. 그것보단 미○엘 슈○허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는게 더 신기해. 역시 그 사람은 신은 아니고 갓 정도는 된다니까. 분명 금방 걸어다닐 수 있을거야. 암. F1의 전설이라고 그 사람은.




"가지고 싶은 거 아무 것도 없냐? 그럼 내가 적당히 산다?"

"웃기지 마! 어린이 과자 세트 같은 거 사올 거잖아."

"들켰네."

"죽는다 진짜."




작년 생일날 아침, 자고있던 내 얼굴 위로 골판지 박스 하나 분량의 과자들을 우르르 쏟아버리더니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했을 때는 살의가 치솟는다는 단어를 실감했었다. 형은 분명 즐기고 있다.


갑자기 들어도 뭔가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게 있었나…없었던 것 같은데. 

곰곰히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내가 퍽 재밌었나보다. 형은 히죽거리며 듣고있다.

두 번이나 형의 등쌀에 밀려서 삼주 내내 과자만 먹는 생활을 할 생각은 없다. 가지고 싶은거. 글쎄. 바로 확 오는게 없는데. 요즘은 좀 샛길로 빠지는 일은 있지만 학교나 집을 걸어서 반복하는게 전부니까.




"…아. 맞다. 하나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진짜 괜찮아?"

"어라 진짜 있냐? 뭔데?"

"좀 비싼건데."




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히려 진짜있냐고 반문한다. 하긴 내가 뭐 사달라고 하는 것도 별로 없는 편이고, 형이나 아버지가 용돈을 넉넉하게 주는 만큼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긴 하네.

나는 끄덕였다. 뭐 사야 하는 건 아닌데, 어차피 집에서 놀리고 있는 것 보단 내가 가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거.'




"차고에 있는 바이크 나 줘."

"지랄한다 새끼가!!!"

"어차피 형 면허 따고 나서 거의 안 타잖아."

"안 돼!! 내가 그거 얼마나 힘들게 모아서 산 건 줄 아냐?! 내 애마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생각 하지 마! 얼마나 조심조심 탔는데!"

"그 애마 먼지만 쌓이고 있잖아. 안 탈거면 나 줘."

"ㅡ안돼! 그게 얼마 짜린데! 면허나 따고 말해 이 자식아!!"




아.

그 말은 맞군.




"…그럼 따지 뭐. 면허 딸 돈은 있으니까 따면 줄 거지?"

"마귀같은 새끼…죽어버려."

"준다고? 고마워."

"안 줘 임마!!!"




거 참 떽떽거리지 좀 맙시다.







*









그리하여 생전 처음 면허를 따게 되었는데. 학교가 끝나고 면허장에 가면 거의 교육따윈 거의 다 끝날 시간이다. 아슬아슬하게 면허 딸 수 있는 나이는 커트라인을 넘었는데, 문제는 시간이 된 셈이다. 


결국 일주일 간은 오전 수업만을 듣거나 오후 수업만을 듣고 난 후 학교에서 부지런히 자체조퇴를 한 결과 필기 시험과 실내 교육은 끝냈는데….

직접 레일을 돌아야 하는 실기 시험에 들어가자 상황은 한 번에 달라졌다. 시간이 없는건 물론이고, 설상가상이란 말은 이럴 때 쓰나. 생각보다 이륜구동은 다루기 쉬운 만큼 사고나기도 쉬웠다. 게다가 면허 따는데는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지. 보험이니 뭐니,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것도 있어서 정신차려보니 통장 잔고의 자릿수가 하나 모자라. 미친 게 아닐까 자본주의.


낮에는 면허 교습소. 저녁에는 한 숨 잔 다음 심야 동안 셀프 주유소의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 형은 학교를 얼마나 빠지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 날 가만히 내버려뒀는데, 정확하게 이 생활은 주말을 끼고 닷새 간 반복 되었다. 그래도 알바비는 심야알바라고 돈이 제법 나오니까. 어떻게든 다음 달까지 식비만 해결하면 되겠지. 




"…."




다만 한 가지 걸리는게 있다.

대걸레를 창고 한 곳으로 넣어두며 가만 생각 난 건데.

기말고사가 언제더라.


고민 할 새도 없이 다음 차량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 나는 모자를 바로 썼다. 아무렴 어때. 일단은 면허부터 따고 가면 되겠지. 졸업 만 하면 된다니까. 졸업만.







*







"자. 봐라."

"독한 새끼…."




형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내 수료증을 받아들였다. 더럽게 험악한 인상으로 찍힌 증명사진이라 생각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카메라 앞에선 얼굴이 굳는단 말이지. 임시 면허증이지만 어쨌든 하뉴 타카히사 본인의 면허증이 맞으니까 이걸로 된 거야. 형의 키를 훔쳐서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지.




"키 내놔."

"나한테 맡겨놨냐?! 에이씨…."

"면허 따왔잖아. 어차피 타지도 않을 거 욕심 좀 그만 부려."

"…기스 내면 가만 안둘 거다."

"아 예. 퍽이나."




끝까지 재수없는 동생이라며 내 쪽으로 바이크의 키를 던지는 형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너 학교 꽤 빠졌다."

"주말 껴 있어서 그렇지 5일밖에 안 빠졌거든?"

"…천벌 받을 자식. 나가 임마!"




기집애도 아니고 칭얼거리긴. 나는 킬킬거리며 보란듯이 바이크의 열쇠고리를 빙빙 돌리며 미닫이 문을 닫았다. 

다다미의 바닥 감촉이 유독 기분 좋은, 시원한 여름 저녁이었다. 뭐 일단은, 첫 행선지는 걸어서 사십분 거리였던 학교로 해볼까. 기름값이 녹록치는 않으니까 매일 타고 다닐 순 없겠지만 면허 따는 돈으로 바이크가 딸려온 거면 정말 왠 떡이냐 싶은걸. 하하. 역시 인생은 이렇게 하나 씩은 즐거운 사건들이 터져줘야 한다니까.



ㅡ그런데 기말고사가 정말로 언제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