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소원을

착각 #06 Have a nice day!

RSW 2014. 6. 11. 01:47




글러브와 미트에서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난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내질러지는 녀석의 주먹의 궤도는 비슷하면서도 제각각 다르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나 말인데. 



“어이.” 

“왜.” 

"정신 좀 차리지?" 



오늘따라, 약간 상태가 별로다. 













부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대들은 둘로 나뉜다. 

인사를 하거나, 안하거나. 

압도적으로 제 눈 앞의 목표물에만 관심 많은 복싱부에는 후자가 많다. 몇몇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이게 누구셔. 하뉴 타카히사 아냐." 

"후려 터지고 쫓겨나던 삼류 양아치 같은 대사 읊지 마라 타카스기." 

"소문 다- 났다. 학생회장 후려 패니 기분 시원하냐?" 

"끝내주게 더러워." 




그리고 예외적으로 태연하게 말을 걸어오는 녀석이 부실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신수 훤한 얼굴로 하는 말이 영 거슬리는 게 아니다. 테이핑 한 손으로 가방을 들고 훌쩍 복싱부의 문턱을 넘는 모습이 퍽 자유로워보이는 모습이다. 


그나저나 분명 이 녀석은 그 자리에 없었을텐데 말이야. 다음 날엔 결석했었고 내 입으로 어쨌다 저쨌다 말한 적도 없는.

왜 타카스기는 머리의 퓨즈가 끊어졌던 일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걸까. 징계 공문이 안 내려온 것 만큼이나 신기한 일이다. 

퉁명스럽게 쏘아대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는데, 녀석은 곧장 포카리 하나와 함께 미트를 던지더니 턱 끝으로 링 위를 가리켰다. 뭐 아침부터 땀 흘리고 싶어서 온 거긴 하지만… 협조 좀 하라는 저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순순히 그러마 하고 스파링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어째 너 오늘 좀 상태가 별로다? 더위 먹었냐?" 

"날씨가 거지 같잖아." 

"아 어제 비왔었지…체력 후달리면 곱게 들어가 보지?"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꾸물꾸물 링 위에 올라가서 미트를 손에 감는데, 어쩐지 녀석의 얼굴이 못마땅하다. 타카스기는 곧바로 셔츠에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더니 빠른 몸놀림으로 링 안으로 올라왔다. 




"진짜 이상하네 너." 

"내가 뭘?" 

"아니 평소에도 뚱한 얼굴이긴 하지만…." 




가볍게 거리를 좁혀 오더니 가슴 안쪽으로 내지르는 주먹. 견제는 무시무시 했다. 나도 나름대로 유도나 아이키도로 단련했다고 생각했지만, 타카스기 앞에서 만큼은 복싱으로 숙련자가 되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손이 시큰 거릴 만큼의 타격은 몇번이나 이어졌다. 




"뭐 괜찮으면 됐고." 

"…남 신경 쓸 시간 있으면 너나 챙겨라." 

"또. 또." 




혀를 쯧쯧 찬 녀석이 마지막 잽 만은 꽤나 천천히 내질렀다. 

미트에서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네. 




"말 한번 섭섭하게 한다. 남이냐 니가?" 




ㅡ그 한마디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대답 할 수 있는 입은 있지만 꺼내야 하는 말을 한참이나 골라야 하네. 아니. 사실 한참 고른다고 해도, 저 솔직한 한 마디에 이길만한 대답은 발견 할 수 없을거야. 




"또 정신 빼는 것 봐라." 




타가스기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제법 봐줄만한 웃음이었다. 











스파링은 계속 된다. 




"정신 빠트리고 있다가 훅 가는 수 있다 너?" 

"그럼 좀 살살 하라고!" 




타카스기는 복싱부 중에서도 제법 주먹이 매섭다. 그나마 내가 덩치가 있어서 망정이지! 

이 녀석이 작정하고 미트를 앞두고 아침부터 날뛰기 시작하면, 정말 이빨 하나는 나갈 각오도 해야 할 거다. 주먹 쓰는 걸 가만 보고 있으면 이 녀석'도' 사람 하나 잡는 데 시간 오래 안 쓰겠다 싶긴 하지만….




"너무 들어왔다. 좀 빼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뒤로 빠지는 타카스기의 발이 유독 무게넘치게 링 위에서 울린다. 

ㅡ역시 재밌는 녀석이다. 복싱부에서는 부장조차 내게 말을 잘 안 거는데 태연하게 인사를 건내질 않나, 스파링에 끼랍시고 대뜸 미트부터 던져대는데 그게 묘하게 싫지는 않아. 

그래. 그러니까 실은, 이 녀석 굉장히 정이 많은 놈이다.




"하긴 그러니까 미즈가민가 뭔가 하는 거랑도 잘도 놀아주는건가." 

"ㅡ어? 류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계속 놀라고." 




학교 앞 편의점에서 있었던 어떤 만남을 생각 하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다시 생각을 털어내버린다. 이쪽을 살피다가 선반의 물건을 우수수 떨어트리던 모습이 퍽 한심했었지. 사람을 탐색하려 드는 시선에 화가 치밀어서 멱살을 잡으려던걸 타카스기가 멈추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또 한바탕 했을지도 모른다. 음. 뭐 그 점은 본인에게 감사하는 수밖에 없나. 아마 미즈타니란 녀석은 내가 타카스기 때문에 많이 참아준다는 걸 알 리가 없을테니까.


내겐 그다지 내키는 녀석은 아니지만, 타카스기에겐 나름대로 오래 지낸 사이라도 되는 걸까. 같이 다니는 걸 꽤 본 것 같은데. 학교 끝나고 같이 밥이나 먹을까 싶어서 찾아보면 영 얼굴 보기도 힘들고 말이야. 




"…하긴 밥 먹자고 문자로 안 불러내는 나도 나긴 하다만."

"너 오늘 정말 정신 산만하다. 어디 지갑이라도 떨구고 왔어?"

"아니라니깐."

 



물론 내가 오늘 생각이 많은 건 인정하지만 말이다.

계속 되는 스파링에 턱 끝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어느새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아침부터 주의력이 결여 될 대로 결여 된 와중에도, 타카스기의 말은 똑바로 들린다. 왜 일까 가만 생각 해 보다가, 미트를 감은 손목이 화끈 거릴 때 쯤에야 결론 답지 않은 결론이 하나 나왔는데.


ㅡ사실 나는 이 녀석과 주먹을 치고 받으며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꽤 즐거운 게 아닐까. 




"하뉴."

"왜." 

"눈에 잠 왔다 너."




녀석은 땀을 훔치며 픽 웃는다. 잠 못잤냐? 그런 말과 함께 글러브를 벗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뭘 가만 있냐고 이쪽에게 핀잔을 던진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란, 수면부족은 만병의 근원이라는 늙은이 같은 대사다.

 

꽤 둔감해 보이면서도 남을 살피는 눈치가 날카로운 것까지. 정말로 나와는 다르다고, 새삼스레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게 실망스럽다던가 그런게 아니라 그저 때론 부럽기 까지 해. 




"자라 임마." 

"…복싱부 소파 좀 빌린다." 

"이 땀 냄새 나는 곳에서 잠이 오냐?"




서투른 모습 없이, 자연스레 겉도는 내게도 말을 거는 녀석. 

아마 타카스기 소우스케는 꽤 괜찮은 놈이다.




"잘 자라. 아, 근데 그럼 너 오늘 아침 수업은 땡땡이겠네?"

"시끄러ㅡ"





킥킥 거리며 던진 날카로운 지적에 저도 모르게 '윽'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여간 아픈 곳을 찌른다니깐!






*







인생을 살면서 착각을 한 적이 몇 번 있다.


첫인상이나, 행동이나 말투, 어조. 그런 것들로 판단한 타카스키 소우스케는 사실 나처럼 말주변도 없고 인상도 그닥인 '나와 닮은 녀석' 이 아닐까 싶었는데.

졸음이 가득한 머리로 링 위에서 주먹을 부대끼고서야 깨달은 사실이란 실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원래 착각은 깨지기 위한 거니까. 실망 할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는거야.




"좋은 하루 되라, 하뉴."

"…너도."




복싱부실 창문을 타고 넘어 오는 풀냄새. 선풍기의 바람. 큰거리는 손목.
그런 것들과 함께 타카스기가 부실 문을 닫고 나가는 것으로 완벽하게 깨진 착각을 곰씹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과 함께, 괜찮은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