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도리없는 시대

RSW 2018. 3. 17. 04:01




사관으로 살기는 힘든 시대였다. 역사로 남기기엔 치욕스런 시대였다. 왕위에 눈이 멀어 선왕과 형을 죽인 암군이 폭정을 펼치는 시대였다. 종묘사직보다는 일신의 안위가 다급한 시대였다. 풍전등화처럼 목숨이 스러져가는 시대였다. 옳고 그름이, 원리와 원칙이, 도리와 책임이 퇴색해가는 시대였다. 


어두울 암에 살 주. 어둠 속에서 사는 이름을 가지고도 사는 게 녹록지 않은 시대였다.


왼손에는 각인을 새기고 오른손으로는 안면을 뭉갤 수 있음에도 사는 게 녹록지 않은 시대임이 분명했다. 권세 높은 양반들이 더러 죽어 나가셔도 대단할 것 없는 시대였다. 보잘것없는 천민에게는 더욱 각박한 시대였고.


참 사람답게 살기 힘든 시대였다. 백성을 위한 완벽한 신이 없는 시대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머리에 농담 같은 생각이 스쳤다.



얼굴에 거슬리는 자상이 새겨진 날, 남자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완벽해진 건 아니었다. 

제 이름을 밝히며 목숨을 위협받을 일도 없는 확실한 자아를 증명해 냈을 뿐. 


인적없는 장소에서만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밤이 쏜살같이 스치는 동안, 기울었던 달이 차오르다가 다시 기울기를 반복하는 동안, 모를 수가 없었다. 


증명은 어디까지나 증명일뿐. 

인정을 받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진실로 남자의 존재는 증명은 되었으나 인정은 받지 못했다. 명문가의 도련님으로도, 빼어난 의술사로도, 타고난 장사로도. 무엇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나날 속에 생각했더란다.


참 도리없는 시대 아닌가.




-

-




외투를 벗은 남자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지쳐 보였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는 피곤할 일이 없는 데도 지쳐 있었고 타고나길 허약했다. 하얗게 뜬 핏기 없는 얼굴은 언제나 남의 인생을 망쳐놓았다는 걸 알고 백짓장처럼 질린 것처럼 보였다.


남자와 처음 만났을 때도, 처음으로 할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그는 똑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러면 내려놓을 수 없는 짐 때문이었나보다. 남자가 진이 빠진 얼굴로 암주를 이용하겠다고 찾아왔던 이유라는 게. 


존재를 증명해 낸 순간부터 군관을 모조리 죽이고 도망친 반역자의 아들께선 애초부터 갈 곳이 없었고 수배지가 수도 없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암주는 별일이 없으면 갑연의 식솔로서 집 안에 있었다. 앉아만 있어도 기관지에서 피를 토하는 나으리의 병수발은 여태껏 했던 공부가 우스울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물론 우습지는 않았다. 환자가 뭐가 우습다고.


갑연은 여느 때처럼 암주가 해내야 할 일을 읊었다. 대부분 혼자 행동해야하는 암주의 수배령을 조금 느슨하게 해두었다는 말에 암주는 조용한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했다. 사실 수배령으로 쫓기는 몸이라 한들 갑연이 명령하는 대부분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겁박과 협박, 위협은 결국 문자의 차이일 뿐 근본이 같다. 빼내야 할 정보는 명확했고, 마음처럼 풀리지 않을 때 해야 하는 행동은 더욱 명확했다. 암주는 일을 잘했다. 갑연이 시킨 일을 아주 잘 했다.


애초에 명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갑연이라는 남자였다.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실수 없이 나눌 줄 알았다. 득도 실도 명확하게 판단하기에 적재적소에 맞는 사람을 구슬리는 재주 하나만큼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사람이다. 

어느 날 불시에 든 생각 중 하나는 나으리 아래에서 불편하게 일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필요한 것을 부족하게 준비해 준 적이 없었고 상찬賞讚이 부족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암주가 태어나서 입어본 가장 좋은 옷들은 모두 갑연이 직접 골라온 옷들이었기 때문이다. 


갑연의 가장 큰 명확함은 대부분 지시에서 드러났다. 때때로 알 수 없는 의중을 모색할 실마리였기에 암주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지시에 집중했다. 지시 속에는 의중이 있었고, 의중 속에는 욕망이 있었다. 다만 그 욕망을 암주로서는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관계를 맺게 된 출발점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은 서로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듯, 결국 자신만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암주는 때때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으로 나으리가 하는 명령을 이해할 수 있기도 했지만, 없는 것도 있었다. 

쟁반에 간단한 죽을 퍼다가 날라주자, 한수저 뜨려다가 상을 엎어버린 갑연의 명령이 그랬다. 곱게 썰어 넣은 야채 속 하얀 속살을 보자마자 헛구역질하더니, 약하다는 기관지로 피 섞인 가래를 걸쭉하게 뱉어내며 한 말이라곤 고작.


“내 상에 닭고기는 올리지 마. 절대로.”


그뿐이었다.


상다리 위로 올라오는 산해진미와 몸에 좋은 보양 음식을 마다한 적 없는 갑연은 좋고 싫음을 따지는 게 제 누이만큼이나 분명했다. 몸에 받는 음식과 받지 않은 음식이 확실했고,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그리고 못 먹는 음식조차 확실했다. 말하자면 먹물로 그어둔 확고한 선이다. 


그것만큼 알아보기 쉬운 게 어디 있을까. 평생을 절벽 위에 매달아 둔 보이지 않는 줄 위에서 살았던 암주는 감탄할 정도로 편하게 그 선을 지켰다.


그 선 덕분에 퍽 편하게 살았다. 편히 아낌 받았고 온 힘을 다해 건네준 애정을 받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별하면서 자알 지냈다. 갑연은 존재를 증명해 낸 암주를 신뢰했고 응당 해내야 할 일을 마치면 인정해 주었다. 


명령을 받아도 어렵지 않았던 건, 암주를 혼란스럽게 만들만한 명령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복종으로 얻을 수 있는 신의는 암주에게 천금보다 귀한 재보였다. 고마울 정도로 명확한 명령. 확실한 복종. 흔들림 없는 신임. 홀로 오롯할 때는 의미가 없었던 자격을 인정해 주는 상대.


암주는 그래서 어렴풋이 알았다. 누이동생 앞에서, 그는 똑같이 삶의 자격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복종마저 얻어내는 혓바닥이 독사의 혓바닥 마냥 갈라지는 때, 그는 맨얼굴을 드러냈다. 백짓장처럼 하얗기 질린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마치 닭죽을 눈앞에 두었을 때 마냥. 

 

왕의 아이를 지워버린 누이를 생각하다 현기증에 머리를 짚은 갑연을 부축하고 눕힌 다음 알았다. 아 그래. 참 누구에게나 공평하기도 하지. 나으리도 나으리의 누이도 심지어 암주조차도 사람답게 살기 힘든 참담한 시대는 한치 앞이 보이질 않았다.


도리없는 시대였다.














도리 (道理)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

어떤 일을 해 나갈 방도(方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