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세레

순백의 분노와 무너진 남자

RSW 2018. 1. 14. 19:22



1월에 열리는 결혼식에 사람이 얼마나 올까 싶었다. 예상대로 결혼식장 분위기는 떠들썩하기보다는 차분했다. 단아한 신부는 새 출발의 기쁨을 가득 안은 채였지만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신랑 또한 예식 이후에는 정신이 없을 것 같다며 미리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러 다니기 바쁜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을 원해서 한겨울에 결혼을 하는 걸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매형이 될 사람은 물론 누이의 속을 청연이 알 수는 없었다.


까만 구두코를 닦자마자 택시에서 내렸던 청연이 가장 먼저 들이닥쳤던 곳은 신부 대기실이었다. 2층 신부 대기실 안에서 가만 앉아있는 드레스 차림의 누이는 정말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골랐던 드레스를 그대로 입은 채, 깔끔하게 넘기고 화장으로 단장한 모습이 아름다웠고, 볼만했다. 그 정도 감상이었다. 아주 짧은 감상.


새하얗고 심플한 드레스. 풍성한 곡선을 그리는 드레스는 아니다. 프릴은 가슴을 살짝 가리는 정도. 발을 모두 덮는 드레스지만 잘 움직이면 넘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오월의 신부들이 입는 새하얀 드레스와 다를 건 없었지만 신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깔끔하다 못해 단출한 디자인이 문제였다. 화려한 결혼식장 내부 인테리어와 비교해서 더 그녀를 소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생의 하루 뿐인 결혼식이니 조금 더 화려한 걸 고르는게 낫겠다는 청연의 조언을 누이는 무시 한 것 같았다.


"왔구나. 늦지 않아 다행이다."

"설마 이런 날에 늦겠습니까."

"혹시 모르잖아. 청아는 아까 전에 왔어. 대신 인사 다니고 있는 것 같아. 드레스로 움직이는게 여간 불편한게 아니더라. 결혼도 자기가 먼저 해 봤으니 안다면서 한사코 나서는데 원..."


만류하고 돌아다닐 만큼 마음 편하지는 않다며 슬쩍 웃는 모습을 보며 청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이 반가워서일까, 혹은 신부 가족측 자리에 앉을 사람이 생긴게 좋아서일까. 청연으로선 알 수 없었다. 청연은 누이 앞에선 유독 심성이 꼬일 때가 있으니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닐 수 있었다.


"뜯어 말린 다음 쫓아 내지 그러셨습니까. 제 살길 찾다가 먼저 결혼 하겠다며 누님도 모른척, 맹랑하게 도망친 기집애를 이제 와서 자매인 척 받아 줄 이유가 없는데요."

"너도 참... 그런 말은."

"핀잔 주셔도 진심이라서."


청연은 벽면에 걸린 거울로 몸을 쑥 디밀었다. 거울 안의 자기 자신은 오늘도 퍽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깔끔하게 빗었던 머리카락이 사르륵 거렸고 가볍게 짓는 미소는 평소 이상으로 상냥해보였다. 셔츠깃에 꼭 맞게 맨 넥타이는 십분 정도 고민한 보람이 있을 정도로 외모를 돋보이게 해줬다.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기엔 안성맞춤인 웃음. 준비는 끝났다. 청연은 물론 누이에게도 긴 시간이었다.


"드디어 오늘이군요."

"응."


누이는 더 이상 잘 지냈는지 묻지 않았다. 

청연이 어떻게 대답할 지 짐작 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인생이 누님 마음에 드시길 빕니다."


누이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아버지가 잡고 들어가야 하는 결혼식장이지만 오늘은 청연이 안내해야 했다. 그 단촐한 행위 하나를 위해서 이틀이나 연차를 내야 했다. 유환은 잘 다녀오라고 했지만 뭐라고 대답 했는지 기억 나질 않는다. 상념을 깨는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대기실 안으로 스태프가 들어왔다. 곧 누이에게 면사포를 씌운 스태프는 두사람을 채근했다.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건만. 

대답은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떨리다고 해도 그렇지 생략 할 필요까진 있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청연아, 연아. 화가 났느냐. 그렇게 말하며 팔에 매달린 누이를 매몰차게 뿌리치며 솟을대문을 박찼던 날에서 꼭 1년이 지났다.  제 가슴 속에 차올랐던 잔인함을 못 이기고 그녀에게 뱉었던 말들은 하나같이 뜨겁고 붉었지.

하나 뿐이 동생이 얼마나 외도外道의 길을 걷는 자인지,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했던 말.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살리지 않았을 뿐이죠. 살릴 가치가 없었으니까. ㅡ그 말들이 어쩌면 당신에겐 너무 강한 자극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는데. 당신이 그 정도에 상처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빨간약과 파란약을 쥐고 천륜의 고리를 벗어나 인세에서 가장 먼 우주 끝까지 걸을 동안, 당신은 이곳에 남겨졌고 나는 내 자리를 찾아 흘러갔다. 서로를 이해하는 착한 남매로 남을 기회가 있었는데 사라졌지. 누구의 잘못일까? 

틀어진 관계는 양쪽 다 잘못한 결과. 그러니 나는 손을 잡고 당신의 미래를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넘겨주게 된 거고, 당신은 내 축복을 귀담아 듣지 않게 된거지.


이윽고 내가 도착한 곳은.

결국 내가 도달하고 싶은 장소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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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은 차분히 진행되는 결혼식이 마치 원숭이 쇼 같다고 생각했다. 



감흥 없이 떠나려는 청연과 악독하게 구는 청아

TV 프로그램에 하는게 전부 일 정도로 가소롭지도 않은 미련함. 

다 죽으니 시원하지? 아무것도 없으니 깨끗하고 개운해? 

사람 새끼도 아냐 너같은 거

때리려다가 그만둔다. 


그래. 정말 싫다. 내가 타고 나버린 버러지같은 집안도. 너도, 누님도. 다 지긋지긋하고 한심해서 구역질이 나와. 

순백의 분노. 

사람 사는 게 다 이렇나? 이렇게 일관적으로 개 같을 수가 없네.

살인죄라는게 있다는 걸 감사해라, 자청희. 



청연은 발바닥 끝에서 타고 올라오는 자기모멸감을 느꼈다. 웃고 싶었다. 이왕이면 끝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여유롭고 아무렇지 않은 것 처럼 하고 싶었는데. 난생 처음으로 남 앞에서 토한 분노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