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겸손은 힘들어

RSW 2013. 5. 13. 02:45




※ 올스타 카뮤 루트 네타바레 주의 ※








바야흐로 오월. 꽃은 피고 날씨는 따뜻한 게 꽃단장을 하고 다니기에 좋은 봄이다. 

즉, 자타가 공인하는 연애하기 좋은 시기다. 


덕분에 카뮤 또한 얼마 전 「특집★연인과 즐기기 좋은 특별한 테마 카페는?!」 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붙은 인터뷰를 하긴 했다. 데이트하기 좋은 곳을 소개 해 달라며, 여성들을 상대로 집사 아이돌로서 활약하는 카뮤가 제법 바빠지는 시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인터뷰 하는 잡지마다 줄창 「이케멘 남친을 사로잡는★방법!」 이라느니  「깜짝☆오월의 연인 특집」 같은 문구를 대문짝만하게 실어두고, 그런 잡지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걸 보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왜 하나같이 문장에 별 모양을 달지 못 해서 안달인지. 

카뮤로서는 이해 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와 따지기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는 세 녀석들과 그룹 QUARTET★NIGHT로 묶여 있으니 나무랄 순 없는 일이다.


사계절이 겨울인 실크팔레스에서는 연애하기 좋은 시기라는 것이 딱히 없었지만 이 나라에 온지 벌써 삼 년. 세 번이 넘는 봄을 맞으며, 계절감이라는 걸 가지기 시작한 카뮤였기에 이제는 이런 어중간한 시기에 결혼하는 커플들이 많은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료서적을 사러 서점에 들릴 때 마다 누구나가 할 것 없이 한심한 캐치프레이즈들이 실린 잡지에 코를 박고 있으니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 두 번이라면 모를까, 매년 봄마다 반복되는 광경이다. 도대체 어떤 한가한 사람이 저런 잡지에 코를 박고 있는 건지. 잠깐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궁금함도 얼마 가지 않을 정도로 카뮤에게는 하찮게 일이었다.


딱 한 시간 전까지는 그랬다.








“푸하하하 말도 안돼, 전부 다 당첨이야!”

“큭…크큭…크크크….”

“전부 다 해당 될 확률은 10% 미만인데…어떤 의미론 대단하네.”


지방 로케를 끝내고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 촬영 스태프들과는 따로 버스를 사용하게 된 것도 있어서, 결국 또 지겨운 상대들과 함께 버스에서 얼굴을 맞대게 된 게 세 시간 째다. 카뮤는 짜증을 참으며 눈을 감으려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오토메의 노림수대로 한 번 뿐이었던 그룹 QUARTET★NIGHT의 결성은 반응이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덕분에 크리스마스 라이브가 끝나고 나서도 넷이서 나란히 촬영을 다니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새삼스레 혼자서 다니는 시간이 얼마나 편했는지 실감하고 만다. 수학여행 온 여고생처럼 꺅꺅 떠드는 최연장자를 향해 결국 카뮤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시끄럽다 이 우민들-!! 얌전히 자리에 앉지 못할까!”

“예이, 앉아 있지롱.”


카뮤는 뒷좌석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레이지를 쏘아본 후 다시 목베개에 몸을 맡겼다. 목베개 따위 하루카가 선물 해 주지 않았다면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을 텐데 최근 들어 사용 해 보니 확실히 편한 물건이란 걸 최근 알았다. 주변이 조용하다면 잠깐이나마 선잠에 들기도 딱 좋은 날씨이건만….


“뮤-쨩, 뮤쨩 이것 봐!”

“고토부키…네 놈의 머릿속엔 휴식이라는 단어가 없나보지?”

“나한테는 지금이 쉬는 시간이야.”


여고생이 따로 없다는 아이의 촌철살인에 레이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사이 카뮤는 온갖 짜증을 얼굴에 가득 담은 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자! 문제입니다! 카뮤는 연인으로서는 몇 점짜리 남자일까요?!”

“……무슨 헛소리냐.”

“아까 편집부 사람이 특집호가 남는다고 하나 주고 갔거든.”


카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잡지 표지를 흘겨보았다. 잡지의 오른쪽에는 있는 대로 폰트 크기를 키운 캐치프레이즈가 온갖 싸구려 반짝이 효과와 함께 실려 있었다. 


이름 하여── 「당신의 남자친구는 몇 점 짜리?☆!새로운 연애의 바람에 몸을 맡기는 건 어때?」


카뮤는 여태까지 가지고 있던 불쾌한 감정까지 싹 지워버리곤 절대영도의 차가운 눈길로 레이지를 응시했다.


“고토부키… 이런 한심한 잡지나 읽어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더니….”


바로 옆. 

그것도 가장 연장자씩이나 되는 상대가 잡지에 코를 박고 킬킬거리느라 정신이 없다니. 여러모로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말 말고 들어보라니까. 읽어줄 테니까 한 번 들어 봐.”

“…….”


이렇게 가열해서 들뜬 상태가 되는 레이지는 말리기도 싫어진다. 

얽히기도 싫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이미 넷 밖에 없는 로케 버스는 신나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으니 빠져 나갈 구멍조차 없었다. 카뮤는 별 수 없이 목베개를 치우고 뒤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흠흠, <세상의 반이 여자라면 나머지 절반이 남자! 지금의 남자친구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새로운 연인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특히 이런 남자는 절대 싫다! Beest 5에 해당되는 남자가 있다면 새로운 인연을 찾아보아요!>”


답지 않게 목소리까지 한 톤 올려서 귀여운 척 말을 잇는 레이지를 보며 카뮤는 밀려오는 화를 참았다. 그러나 레이지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자, 신경은 조금씩 다른 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내가 들러리가 된 것 같아! ─No.5 지나가는 여자들이 쳐다보는 잘난 남자!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은 내 마음을 몰라줘! ─No.4 항상 먼저 전화를 끊자고 하는 남자! 

가끔은 작은 꽃 한 송이라도 받고 싶은 여자 마음을 몰라! ─No.3 선물은 기념일이나 생일 때만 주는 남자!

케이크를 먹으러 가도 큰 조각은 언제나 자기 몫. ─No.2 자기만 아는 남자!"


……잠깐.

……잠깐만.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제 1위는! 축하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남자, 정말 밥맛이야! ─No.1 겸손함이 부족한 남자!"

"……. ……고토부키. 일단 확인 차 묻겠는데, ‘축하한다’는 무슨 의미지??"

"뭐야. 감이 팍 안 오는 거냐? 그건 나도 알겠는데."


란마루는 오렌지 껍질을 벗기며 카뮤에게 눈을 흘겼다. 평소라면 퍼질러지게 자고 있을 녀석이 희희낙락거리며 이죽거린다.


“네 녀석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하루카는 아무런 문제없다만.”

“<이상의 다섯 개 항목에서 두 개 이상인 상대는 연애 상대론 좀 그렇지 않아요? 이럴 땐 마음 굳게 먹고 새로운 인연을 찾는 것도 한 방법! 한 방에 남자 친구를 바꿀 만큼 귀여운 화장과 최신 코디는 129페이지에> ……아앗!! 너무해에!!!”


카뮤는 공을 물어오는 알렉산더가 이럴쏘냐 싶을 만큼 빛과 같은 속도로 잡지를 빼앗아서 풀 스윙으로 내던졌다. 정확하게 로케 버스 뒤편의 트렁크에 안착한 잡지를 보며 레이지가 울부짖었다.


“뮤쨩, 의외로 연애는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정확하다?! 이건 연장자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라니깐?!!”

“사시사철 머릿속이 꽃핀 춘삼월인 네 녀석의 충고 따윈 필요 없어!”

“카뮤. 하루카를 향한 너의 태도는 내가 기록 해 둔 패턴에 의하면 다섯 가지 전부 정확하게 일치 해.”

“특히 마지막 부분이 걸작이지.”


란마루는 그렇게 말하곤 ‘겸손~ 겸손은 힘들어~’ 라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장이라도 란마루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카뮤를 진정시키며 레이지가 말했다.


“뮤쨩, 아이돌이지? 당연히 다들 쳐다 볼 테고, 기본적으로 ‘선물은 필요 없다’ 주의 아냐? 결국 저번에 크리스마스 선물도 안 주려다가 줬고. 이번 로케에서 후배쨩에게 전화 한 거 몇 번?”

“……두 번이다만.”

“카뮤. 이번 로케가 14일간 인 거, 알고 있지?”

“전파가 안 닿았단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 뒷풀이 때 그 커다란 홀 케이크도 혼자서 다 잡수시고, 잘난 백작님 나셨네. 연애 사업 하나 제대로 못 하다니 볼 장 다 봤군.”

“워워 싸움은 그만두고. …어쨌든 지금은 만사형통이긴 해도 한 번쯤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어때? …겸손한 모습을 보여준다던가.”

“난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만.”


그 순간. 

봄기운이 만연 해 있던 로케 버스에는 북풍보다도 차가운 이터널 블리자드가 몰아쳤다.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건 먹던 오렌지를 전부 삼킨 란마루였다.


“……그게 겸손 한 거라면, 네 여자는 진작 널 차버리는 편이 행복할걸.”

“네놈 뚫린 입이라고 아까부터 잘도 나불거리는군, 이번 기회에 그 입을 단단히 봉해주지! 밖으로 나와라!!”

“잠깐, 둘 다 갑자기 일어나지 마! 좁잖아. 다음 휴게소 까지는 아직 20분 남았어.”

“으아! 란쨩, 뮤쨩 스토옵! 달리는 버스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니깐!!”



그리고 20분 후. 당연한 수순이지만 휴게소에 도착 한 란마루와 카뮤의 혈투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네 사람 다 너나 할 것 없이 운전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는 운전수의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긴 설교를 들어 파김치가 된 넷은 이번에야 말로 조용히 시트에 몸을 맡겼지만, 세 사람이 잠이 든 동안에도 카뮤는 홀로 창밖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했던 저택이 코앞이었지만 카뮤는 드물게도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말았다. 

한 손에는 여행지에서 사 온 선물…단 과자를 들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에는 문제의 ‘한심한 잡지’들이 제법 두툼한 볼륨을 자랑하며 봉투 속에 담겨 있었다. 

평소라면 집으로 직행했을 발걸음이 서점으로 빠진 이유는 알고 있다. 그래. 아주 한껏 동요한 덕분이다. 우민의 연애 따윈 흥미가 없다고 냉정하게 내친 3년의 세월과 함께 귀족의 프라이드가 말짱 도루묵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하루카다. 세실이나 란마루 같은 녀석들이라면 싫은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해도 달고 다니는 상대지만, 카뮤의 기억 속에도 하루카가 카뮤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담 반대로 자신이 하루카에게 볼맨 소리를 한 적은 얼마나 있었지?


……셀 수 없다.

어쩐지 손에 든 잡지 무게가 한 층 더 무거워 진 느낌이었다.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를 ‘배려’하기 위한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자기를 돌아보려는 행동이 아니니까. 

자신에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들려주며 카뮤는 쇼핑백을 고쳐 들었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카뮤는 답지 않은 헛기침을 하곤 현관문을──



“카뮤 선배?! 돌아오셨나요?”

“?!”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막 용건을 마치고 돌아왔는지, 한 눈에도 무거워 보이는 토드백을 걸쳐 맨 하루카가 볼을 붉히며 카뮤를 향해 뛰어들었다. 양 팔에 짐을 들고 있는 카뮤는 엉겁결에 양 팔을 들곤 하루카를 꽉 껴안았다.


“어서오세요!!”

“음…방금 돌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다렸을텐데…. 빨리 오셨네요! 촬영이 빨리 끝났나 봐요.”

“흥. 내가 참여한 촬영이다. 한 번에 OK가 나오는 게 당연하지.” 


입을 연지 십 초도 안 되서 카뮤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겸손함, 이라는 말을 아까 지껄인 입이 이 말이었는데 또!

하지만 하루카는 전혀 괘념치 않는 표정이었다. 카뮤가 든 짐을 본 하루카는 자연스런 동작으로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알렉산더가 꼬리를 흔들며 총알 같은 속도로 거실을 가로질러 오자 쇼핑백을 받아 들곤 종종걸음으로 먼저 짐을 놓고 오겠다는 말까지 남겼다.


“그래. 다녀왔다. 알렉산더. 걱정 마라, 가기 전에 했던 약속은 기억 하고 있어. 그래. 산책은 저녁에 나가지.”


하루카가 부지런히 빗질을 잊지 않았다곤 하나, 역시 주인의 손길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헥헥 거리는 알렉산더를 쓰다듬으며 카뮤는 슬쩍 서점에서 사 온 잡지와 책을 향해 눈을 흘겼다.


<관계의 정립>

<이젠 연애도 정보의 시대! 연애사 지피지기★백전백승>

<오래 가는 커플에게는 뭔가가 있다?! 사랑색 센티멘탈♥>

<우리 사이 이대로 괜찮은 거야? ~ 가르쳐주세요! 레이지 Professer 특집! ~>


“…….”


카뮤는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정신없었다고 해도 그렇지, 하필이면 레이지가 인터뷰 한 잡지를 사올 건 또 뭔가. 한 시간 전의 정신 상태를 저주하며 카뮤는 혀를 찼다.


역시 충동적으로 잡지를 사 온 게 문제였다. 지금껏 카뮤가 이용 해 왔던 저택 가까이에 있는 서점은 조용하고 아담한 장소인데다가 노인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기에 별달리 카뮤에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케 버스에서 내려서 역 앞의 서점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카뮤는 경솔했다고 시인했다. 주변에서 알아보는 눈초리와 수군거림 서점에서 줄곧 따라다녔던 것이다. 

다행히 조용히 해야 하는 서점이었으니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적었지만, 카운터의 점원이 ‘이번 달에 인터뷰 하신 잡지인가요?’ 라고 가볍게 인사 했을 때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웃어보이곤 작전상 후퇴를 감행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소파에 풀썩 걸터앉은 카뮤는 알렉산더를 쓰다듬으며 잡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그리곤 문제의 특집 기사를 가만 바라보았다. ‘최악’ 이라는 도장이 당당하게 찍힌 <No.1 겸손함이 부족 한 남자>를 바라보며, 카뮤는 잠깐이나마 말문이 막힌다는 단어를 실감했다.


애초에 카뮤는 겸손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납득 할 수가 없었다. 

남을 존중하고 내세우지 않는 태도? 그런 건 언제나 표현하고 있을 텐데? 


당장 세실이 들었다면 악령은 물러가라고 우렁차게 외칠 만한 생각을 하며 표정을 굳히고 있자 알렉산더가 끙끙거리며 카뮤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카뮤는 웃음 대신 몇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뮤 선배? …무슨 일 있나요?”

“음. 아무 것도 아니다.”


하루카가 고개를 쏙 내 민 것은 그 때였다. 정말 괜찮나요?, 그렇게 되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래도 굳은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선물로 사온 막과자를 접시에 담아온 하루카는 알렉산더에게 양해를 구하곤 카뮤의 소파 옆에 풀썩 앉았다. 바로 옆에서 기분 좋은 무게감과 따뜻한 체온이 금방 전해져온다. 그제야 카뮤는 실감했다. 꽤 긴 편에 속했던 2주간의 로케가 끝나고, 나는 그녀의 곁으로 돌아 온 것이다.


“…크리스자드. 거짓말은 안돼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죠?”


먼저 벼랑에 몰린 것은 카뮤였다. 그녀에게 이름을 불린 이상,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크흠, 하고 다시금 목을 가다듬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


하루카는 조금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어도 될까…?’ 설마 카뮤가 그런 어조로 물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모양이다. 얼떨결에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카뮤는 마음을 굳혔다.


“내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부족한 점…이요?”


말을 확인하듯 다시 확인하는 하루카를 향해 카뮤는 순순히 끄덕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조금 동요하고 있다. 아니, 꽤…?


만약 지금, 이름을 부른 하루카의 한 마디에 꼼짝도 못하는 카뮤를 본다면 레이지나 란마루, 아이, 세실 네 사람 중 그 누구도 카뮤를 향해 ‘겸손함 부족’ 이라던가 ‘오만불손’ ‘제멋대로’ ‘마왕’ ‘자기중심적’ ‘근성이 썩어있음’ 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못 했을 터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말 못하는 축생. 알렉산더뿐이었다.


하루카는 가만 카뮤를 바라보았다. 수정처럼 투명한 눈동자는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바래긴 커녕 더욱 아름답기만 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수 귓가로 넘겨주며 하루카는 웃었다.


“아뇨. 그런 건 없어요. 있는 그대로의 크리스자드가 너무 좋아요.”

“……흠. 역시.”

“역시 무슨 일 있었나요?”

“아니. 잠시 우민들의 소란에 어울려 준 것 뿐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

“다행이네요. 아, 막과자 감사해요. 함께 먹어요.”

“그러지.”

“그런데 그건 왠 잡지인가요?”

“우민들과 놀아준 증거다.”

“……?”

“뭐 다음 인터뷰의 참고자료라고 해두지.”

“아, 여기 추천 데이트 장소가… 봐도 되나요?”


막과자를 입 안으로 털어넣으며 끄덕인 카뮤가 하루카에게 몇 개의 잡지를 더 집어다 주었다. 이 곳도 좋고 저 곳도 좋고. 

화색을 띄우며 말을 꺼내는 하루카와 함께 데이트 장소를 살펴보며 카뮤는 생각했다. 

제법 잘나가는 아이돌. 실크팔레스에는 본가의 저택. 일본에는 작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분가 저택. 단 과자. 차車대신 애마. 충성스런 애완동물. 그리고….


“크리스자드?”

“모레까지 휴가를 받았다. 한 곳 쯤 이라면 함께 갈 수 있어.”

“정말이요?!”


홍조를 가득 띄우며 바로 옆에 앉아있는 그녀가 있다.

카뮤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무렴. 이렇게 자랑 할 게 천지인데 겸손함 따위 다 무어냐. 실제로 잘났는데 여기서 더 어떻게 겸손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겸손 할 필요가 없지 않나. 어차피 우민들의 한심한 사고방식으론 귀족인 자신을 죽을 때 까지 이해 못 할 텐데. 

게다가 다른 상대에겐 이해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상대가 이해 하고 있으니 말이다.


“겸손은 참 힘든 일이군.”

“…?”


씩 웃어보이며 하루카의 어깨를 끌어당긴 카뮤는 다리를 꼰 채 키득거렸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잡지를 함께 들여다보다가 두 사람은 기분 좋은 오월의 햇살을 만끽하다가 서로에게 기대서 살짝 잠이 들었다. 

오직 그 광경을 본 상대는 알렉산더뿐. 


주인과 똑 닮은 콧바람을 뀌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든 알렉산더는 마찬가지로 겸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거실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