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양품과 금수저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의 환승구간이란 점에서 교대역은 언제나 사람으로 붐볐다. 그런 교대역에서 출퇴근 시간에 맞춰 지하철을 이용하는건 정말 사양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강남역 부근에서 여성에게서 오는 열혈한 시선을 기꺼이 막지 않고 세심한 아이컨택으로 카카오톡 아이디 정도는 가볍게 교환했을 자청연이었지만, 요즈음은 또 사정이 달라졌다는게 그의 말이었다. 그런 청연을 비웃는 백영또한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때때로 스치는 것 만으로 남의 기억과 흔적을 읽는 능력자로서는 잠깐 동안에도 수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콩나물시루마냥 섞여있어야 하는 대중교통은 지옥이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택시를 잡았었겠지만, 민방위훈련과 함께 저녁 시간의 강남대로 교통사고가 겹친 덕분에 교통상황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20분에 2만원 정돈 나올거라는 택시비 계산기는 둘째치고, 일단 택시가 잡히질 않았다. 족히 3m 정도 되어 보이는 버스 대기줄을 보자 결국 선택지가 없었다. 지하철을 두 대 떠나보내고 나서야 청연과 백영은 간신히 열차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오늘의 쇼핑을 취소한다면 이 다음 비번일은 언제일지 불투명했다. 수능날이 가까워질수록 출동은 빈번해지고 있었고, 마물 또한 사상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끈질겨지고 있었다.
백영은 이제야 드디어 여름용 배게와 싸구려 담요로 버틸 수 없는 시기가 왔음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은행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입김이 나오는 계절까지 버틴게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청연은 기꺼이 그의 쇼핑에 따라갔지만, 사실 백영의 쇼핑은 상당히 재미가 없었다. 일단 유환과 쇼핑 할 때 처럼 이 옷 저 옷 입혀보고 손 들어봐 어깨 움직여봐 뽀뽀 해봐 하며 놀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백영은 옷을 고르는게 까다로운지 쉬운지 좀처럼 모를 인간이었다. 유니클로와 GU라는, 일말의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성복 매장을 돌아본 다음 선택한곳이 무인양품점이었다. 여기 옷도 팔았나. 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하는 청연과 달리, 백영은 M사이즈 터틀넥을 입어 본 다음 만족스럽게 옷을 집었다. 터틀넥 M사이즈, 화이트 블랙 네이비 카키색을 전부 다.
"깔맞춤으로 일괄 구매라니..."
"뭐라고 중얼거리는거야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괄 구매라니...!!"
허탈함을 숨기지 못하며 옷봉투를 돌려준 청연은 투덜댔지만, 백영은 뭐 어쩌란거냐 라는 표정으로 그를 꼬나보았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딱 죽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분통을 터트릴 정도로 말이다.
"나 자네랑 더이상 쇼핑 안해..."
"나도 안 해. 더 이상 용건 없다."
"아니 불만은 내가 있지 왜 자네가 안한다고 해?!"
"네가 무인양품을 모욕했잖아."
"디자인이 죄다 똑같다고 말한 것 뿐이거든?"
"그게 세일즈 포인트라고."
"아주 멤버십 포인트까지 적립을 하지 그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청연과 달리 백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포인트 제도는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툭 하고 쏘아부치는 말로 청연을 타박했다.
"너도 샀으면서 불평하지 마."
"어라~ 무슨 소리신지? 나는 몰개성의 극치인 무인양품점에서 뭘 살 생각은 추호도..."
"...네가 산 캐시미어 스톨은 고양이 용이냐?"
...들켰군. 콧바람을 뀐 백영은 인사조차 없이 쌀쌀맞게 걸음을 돌려 제 기숙사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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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어?"
"응, 좋은데? 깔끔해서 어디에든 잘 어울리잖아. 재질도 괜찮고 따뜻하니까..."
뜻밖에 쏟아지는 찬사에 청연은 입을 콱 다물었다. 79,900원이라는 얄팍한 상술이 가미된 스톨값은 어이를 상실하게 만드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재질이 보드라운 캐시미어 100% 였다. 뭣보다 백영이 다른 곳은 들리지 않고 곧장 대영청으로 돌아갈 기색이었다. 유환을 위한 선물을 뭐라도 하나 사갈까 싶었던 청연으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급하게 떠올려본 선물들이 다 시원찮았다는 점도 포인트였다.
고양이들이 깨트릴 수도 있는 디퓨저는 NG, 드라이플라워도 너무 촌스러우니 NG. 신발이나 옷은 본인의 취향을 고려할 시간이 적다. 반지, 그건 더더욱 신중하게 골라야하니까 패스. 소거법으로 하나씩 지워나간 결과, 청연의 손에는 결국 79,900원짜리 베이지색 스톨이 손에 쥐여있었다. 패션 머플러를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정말 유환이 마음에 들어하는 디자인을 골라주고 싶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지금 뭔가, 다행이란 표정이랑은 거리가 있었는데...?"
시험 삼아 스톨을 둘러본 유환은 갸웃거리며 청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해줬는데도 못마땅한 이유는 단순했다.
"뭔가 좀 더 특별한걸 해 주고 싶었어."
"특별 한 거?"
"이왕이면, 절대 못 잊을 만한거 말 이야."
"그게 뭔데?"
"잘 모르겠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유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기는 이야기다. 선물하는 본인도 잘 모르겠는, '특별한 선물' 이라. 유환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청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왕이면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너에겐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으니까 가장 값지고 각별한걸 골라서 주고 싶은데.
"적어도 무인양품은 아니고, 다른걸로?"
"...? 나 자주 가는건 아닌데, 거긴 깔끔한 물건을 파는 곳이잖아?"
"으음~ 그렇긴 한데..."
유환이 무인양품 택을 흔들자 청연은 잠시 고민했다. 분명 하나하나 질이 좋다는 인상은 있었다. 심플 이즈 베스트, 가장 무난한 디자인은 깔끔한 호텔들을 생각나게 했었지. 청연은 잠깐 고민하다 더듬더듬 말을 끼워맞췄다.
"어쩌면... 내 취향이랑은 좀 빗나가 있을 지도... 아니 디자인이나 메이커가 싫단 것 보단 뭐랄까... 너무 무난하고 평범하다는 점이...? 그게 매력이긴 하지만... 설명하기 너무 어려워."
예를 들면 그런거다. 똑같은 이불이 있다면 네게는 극세사와 오리털이 가득 들어간 따뜻하고 포근한 걸 덮어주고 싶다. 반지를 선물한다면 다이아보다도 값지고 희귀한 보석을 해주고 싶다. 내 손을 거쳐서, 네게로 흘러갈 물건은 가능한 희귀하고 고급스럽길 바란다. 왜냐하면, 너는 그만큼 특별하니까.
"아무래도 자네에게 주는 건 숟가락 하나라도 금수저였으면 좋겠으니까...?"
"ㅡ...? 푸하하!"
유환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나 싶었더니 곧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터트렸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쑥스러워진 나머지 청연은 흠, 하고 고개를 돌린 채 볼을 긁적였지만 했던 말을 번복하진 않았다. 한참 큭큭대며 웃던 유환은 곧 함께 침대로 걸터앉은 다음 팔을 목에 감아안았다. 민망하게 긁고 있던 볼로 쪽, 하고 간지러운 감촉과 사랑스런 소리가 들렸다.
"나 청연이 형 덕분에 금수저 물게 되는 거야~?"
"으음, 조금만 기다려주게. 주택청약 적금이라도 해제하고 올테니까..."
"ㅡ워, 진정해 청연."
"아니 하여간 무인양품 물건으로 기뻐해주는건 나도 기쁘네만..."
가만, 생각을 해보자고. 예를들면 무인양품제 패브릭이다. 우리가 쓰는 킹사이즈 침대를 무인양품제로 도배한다고 쳐보자고. 아이보리색 체크무늬 박스시트와 이불. 갈색 줄무늬 베개가 두개. 아무런 무늬 없는 대형 쿠션은 바람이와 보리의 전용 침대로. 그리고? 역시 제일 중요한 김유환이 거기 있어야겠지. 샤워를 끝마치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졸음 가득한 시선으로 침대 위 앉아있다가 미적미적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음 청연, 하고 부르는 거다. 같이 자자는 것도 좋고, 아침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채 곤히 자고 있는거면...
"...어라? 무인양품이라도 괜찮나?"
"어느 쪽이야?"
"음, 잘 모르겠어. 중요한건 무인양품이 아니란 건가..."
"청연... 오늘 굉장히 이상해."
"미안. 무인용품같은 평범한 가구나 생활용품 사이에 자네가 있는걸 상상 해 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져서... 생각이 바뀌었네. 역시 포인트는 김유환이지."
청연은 멋쩍게 웃으며 슬쩍 유환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원한다면 정말로 금수저 하나 맞춰다 줄까?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것 같은 질문에 유환은 또 소리높여 웃으더니 부드러운 키스로 청연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그래도 금으로 된 수저로 밥을 먹는건 좀 그렇지 않을까?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 돌려줄 대답이 궁색해졌다.
하긴. 대세는 미니멀리즘이라던가, 가진걸 최대한 줄이고 깔끔한 무인양품식 인테리어도 나쁘진 않겠지. 보리도 바람이도 우다다 거릴 장소가 늘어나니까 좋아할지도 모른다. 네가 좋아해준다면 뭐든 좋았다. 무난한 선물 하나도 환하게 웃으며 받아주고, 휑할 정도로 깔끔한 집안을 꽉 채워주는 존재.
"...바쁜거 끝나면 이번엔 우리끼리 겨울 살림 사러 가겠나? 함께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니까... 12월이 되면 트리도 팔겠지."
"그럴까? 난 좋아. 보리랑 바람이도 트리 보면 좋아하겠다."
유환은 푸스스 웃더니 청연의 이마 위에 약속이라는 말과 함께 살짝 키스했다.
특별할 것 없는 키스지만 무엇보다 특별한 키스.
아ㅡ 그런가.
청연은 왜 무인양품이 인기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