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빛과 틈

RSW 2013. 4. 7. 06:19



혹시나 하는 의심은 있었지만 애써 의식하지는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잔 하나를 깨먹고 나자 란마루는 순순히 바를 넘기고 주방으로 빠졌다. 안주거리의 밑 손질과 간간히 들어오는 주문을 소화했을 때는 이미 심야 두 시. 지하의 주방에서 뒷골목까지, 무거운 쓰레기통을 바깥으로 들어 옮기는 일 정도야 평소라면 가뿐했겠지만 오늘은 쏟아지는 식은땀을 속일 수 없었다. 


미끄러지듯 손을 놓자 묵직한 쓰레기통은 몇 번 기우뚱거리다 균형을 잡았다. 란마루는 더러운 손 대신 팔꿈치로 땀을 닦았다. 줄곧 굽히고 있었던 허리를 쭉 폈다. 그렇게 추적추적 비를 쏟아내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그제야 란마루는 인정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짐작 가는 바는 여럿 있었다. 사실 오늘은 아침부터 잘 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아침에 조금 내리다 말 거라는 생각으로 우산 없이 아파트를 뛰쳐나왔다. 비 때문에 자전거를 타긴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탔지만 꽉 막힌 도로를 보곤 라이브에 늦을까봐 무작정 버스에서 내렸고,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베이스 하나만 등에 매고 길가를 전력 질주했다. 라이브 하우스에 도착 할 때쯤엔 비를 맞아서 식을 만큼 식은 체온으로 두 시간 동안 라이브. 얼른 돌아가서 목욕이나 하고 잠이나 잘 생각이었지만 예전에 신세를 졌던 이자카야에서 SOS가 들어오자 그대로 목적지를 틀었다. 



그리하여 새벽 두시. 찬 몸으로 하루 종일 잘도 돌아다녔다 싶지만, 이 정도는 체력이 있으니 버틸 줄 알았건만. 점점 심해지는 두통과 식은땀에 불쾌함이 치밀었다.

단단히 신세졌다며 감사 인사와 하루 치 일당이 담긴 봉투를 건네는 매니저에게는 멀쩡한 척 인사를 했지만 그 후 어떻게 아파트까지 걸어왔는지는 솔직히 기억에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파트 거실 한가운데에서 이불도 없이 엎어져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시계를 보자, 벌써 새벽 다섯 시. 아침 아홉시부터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란 걸 생각하면 이렇게 잠에서 깨는 시간조차 아깝다. 게다가 제대로 씻지도 않고 죽은 듯이 잤는데도 두통은 여전했다. 구급상자야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조차 없다. 란마루는 젖은 옷을 벗어 던진 후 소파위로 기어 올라갔다. 


소파위에는 선객이 있었다. 정신이 없던 동안에도 근성은 발휘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집에 들어왔을 때 축축하게 젖은 악기커버에서 베이스만 꺼내서 소파 위에 올려놨던 기억이 있었다.


돌아왔을 적과 똑같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여전했다. 아침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추적거리는 날씨. 머리는 지끈거리고 체온은 평소보다 훨씬 뜨거웠지만 열에 찬 살갗에 맞닿는 베이스는 차갑고 기분 좋았다. 

아마 도쿄로 상경 한 이후 이렇게 아파본건 처음일지도 모른다. 체력 관리를 소홀히 한 적은 없었던 만큼 짜증이 치밀었지만 누굴 탓할 순 없는 문제였다. 베이스를 끌어안은 채 란마루는 열에 찬 머리로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 혼자서 살아간다는 건 이런 거니까. 


아프거나 힘이 들더라도 혼자 힘으로 해 나가는 게 당연한 일. 무슨 일이든 혼자서 책임 져야 하는 일. 체온계나 묽은 죽은 기대 할 수 없다. 물수건을 올려주는 손길은 거리가 먼 이야기다. 타인이 끼어 들 틈이 없는 삶. 아마 앞으로도 쭉 이럴 테지. 누군가는 삭막하게 여길, 그런 치열한 삶.


하지만 이런 삶을 택했다. 직접 택한 삶의 방식이다.

내 삶에는 이 품 안에 있는 게 전부니까. 

피곤하거나 아프고 지치고 힘들더라도 이 베이스 하나만 있다면 괜찮을 거라고. 배신하거나, 배신당할 일도 없는 악기 하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에 집을 나왔던 게 아니었던가. 그 선택이 어린 날의 치기가 아니었다는 걸 지금 이 순간이 증명하고 있지 않던가. 음악과 베이스. 아버지의 아들. 쿠로사키 집안의 장남. 그런 것들로 빈 틈 없이 채워진 쿠로사키 란마루를….


상념을 몰아낸 것은 졸음이었다. 가물거리던 의식의 끝에서 베이스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눈을 감자 들리는 건 빗줄기가 고요한 새벽을 적시는 소리. 둥그렇게 구부린 몸의 열기. 손에 걸쳐진 차가운 베이스와의 온도 차. 그런 것들을 느끼다가─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집안은 어두웠다. 거실의 불은 모두 꺼져있었다. 시계를 보자 오후 한 시. 한창 햇빛이 눈부실 시간이다. 그런 시간이지만 바깥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끄물거리는 날씨 탓인지 바깥이나 안이나 할 것 없이 평소보다 어둑어둑했다. 조용히 잠에서 깬 란마루는 몇 번 눈을 끔뻑거리며 어두운 아파트의 천장을 가만 바라보았다. 


분명 맨바닥에서 악보를 보고 있었을 텐데. 스르륵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몸을 말고 팔꿈치를 기대서 살짝 눈 감았던 기억은 나는데 어느새 머리 위에는 폭신한 베개는 물론이고 담요가 걸쳐져 있었다. 그 덕분인지 오랫동안 잔 것도 아니고 깊게 잔 것도 아니었지만 몸이 가벼웠다. 기대도 안 했던 호사가 따로 없었다. 시시한 생각을 하다가 란마루는 작게 웃었다. 



기억에도 없는 베개와 기대도 안 했던 담요를 하나 둘 꺼내 와서 챙겨준 상대가 누구인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안 볼 수는 없는 거리다. 따뜻한 체온의 주인은 란마루의 품 안에 딱 달라붙은 상태로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 쓸다가 뺨에 입을 맞췄다. 꽤 깊이 잠 들었는지 하루카는 깨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자고 있던 제 옆으로 하루카가 굴러 들어왔는지도 궁금했지만, 자연스럽게 팔 한 쪽을 내주고 팔배게를 해 준 자신도 신기했다. 음악과 베이스. 그런 것들로 채워진, 타인이 끼어들 틈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고양이 몇 마리가 달라붙었을 때와는 비교도 못할,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지금 곁에 있었다.

란마루는 조금 더 담요를 끌어 올려서 하루카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그리곤 자신 또한 담요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슬쩍 웃음이 새어 나온 건 숨길 수 없었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혼자 있던 것이 당연했던 순간. 미래의 네겐 짊어져서라도 곁에 있길 바라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 알려 줘도 코웃음 쳤을 시절. 결코 타인에게는 틈을 보일 줄 몰랐던 쿠로사키 란마루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여길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있다. 품 안에 있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하루카가 틀어놓은 걸까. 아니면 악보를 보면서 틀어놨던 음악 플레이어가 아직도 돌아가고 있는 건가. 따뜻한 하루카를 끌어안은 채 다시금 눈을 감은 란마루의 의식의 끝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연륜이 묻어나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느린 곡조는 익숙했다. 베이스 하나만으로 충분했을 시절에도 좋아했던 곡이다. 당연히 가사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깨지고 금이 간 틈이 있지. 모든 것에는 그런 틈이 있어. 바로 거기에 빛이 들어와. 바로 거기로.


오랜만에 듣는 곡이지만 여전히 좋은 노래이고 가사였다. 예전에도 이 가사만큼은 정말로 좋아했었다. 천천히 잠에 빠지는 와중에도 가장 좋아하는 파트의 가사를 중얼거리다가 란마루는 잠들었다. 그녀와 음악. 그 두 가지 만으로도 채워지는 빛이 가득한 삶의 길. 일요일 오후를 적신 빗소리가 그렇게 익숙한 음악 속으로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