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저주 01
#01. 편백나무 문 저편
멀리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누가 부른 건지, 어디서 들려온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몽롱한 의식 끝에서 청연은 흑장미를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금 부르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대답 할 뻔 했다.
ㅡ청연을 끌어낸 건 또다른 목소리였다. 차갑게 가시가 돋힌 목소리.
“뭐 하고 있어? 들어오지 않고.”
그제서야 정신이 확실하게 돌아왔다. 청연의 시야는 급속도로 맑아졌고 곧 눈앞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아. 이것이었나.
끔뻑이기를 몇 번. 깊게 잠들고 난 다음 날 기상하는 경우와 비슷했다. 몸이 조금 무겁긴 했지만 정신은 맑다. 초여름이라지만 날이 너무 더웠다. 아마 현기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잠깐이라곤 해도 땅으로 꺼질 것처럼 아득해진 감각을 설명 할 수 없으니까. 붕 뜬 부유감, 밀려오는 위화감. 청연은 그 것을 설명 할 수도 납득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곧 청연은 깨달았다. 붉은 장미가 흐트러지게 핀 저택에서, 기별 한 번 하지 않고 찾아온 자신은 분명한 불청객이다. 초대는 커녕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여인이 사는 저택의 철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온 거다. 당장 침입죄로 신고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재밌는 건, 여인이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관문을 열고 청연에게 말을 건넸다는 사실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청연은 허, 웃어버리곤 들고 있던 부채를 펄럭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눈에서 얼굴, 얼굴에서 가슴. 그리고 구두 끝까지. 청연은 천천히 여인을 살폈다. 사실 그다지 관찰 할 맛이 없는 편이다. 일단 화려함이 부족했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치맛자락과 새카만 흑발. 눈동자도 머리카락도, 심지어 어깨에서 목으로 이어진 장미 코사쥬마저 어두운 흑색이었다. 생화로 장식된 플라워 코사쥬에는 꽃을 좋아하는 청연조차도 본 적 없는 풍성하고 싱그러운 흑장미가 장식 되어있었다. 온 몸이 까만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차분한만큼 겉잡을 수 없는 우울함을 간직한 것 같았다. 특이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자신이 보기에도 퍽 독특한 여자다. 마치 엊그제 상을 치른 미망인 같지 않나.
“안 들어 올 거야?”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빈손이라서 말입니다.”
아무리 뻔뻔하다는 말을 잘 듣는 자청연이라곤 하지만 예쁜 여자의, 그것도 생면부지인 상대 집에 빈손으로 들어 갈 순 없는 노릇이다.
너스레를 떨자, 눈앞의 여인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청연을 응시했다. 곧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던 것도 잠시. 그녀는 현관문을 직접 열어준 손으로 정원 쪽을 가리켰다.
청연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아까 전 담장 밖에서 구경했던 장미가 여름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붉었다. 저택 입구에서부터 느꼈지만, 아직 초여름인 걸 생각하면 일찍부터 싱그럽고 화려하게 핀 장미였다. 원한다면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게 꽃인데.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더니 다시금 정원의 장미를 가리켰다.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저걸 원해ㅡ 라는 의미인가.
“꺾어 달라고?”
“내가 꺾을 순 없거든. 선물은 그걸로 충분해. 집주인인 내가 괜찮다고 말 한 거니, 직접 꺾어 오도록 해.”
게다가 이곳으로 온 것만으로 충분한 선물이니까.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청연을 채근했다. 청연으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꿔 먹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다. 터무니없는 걸 요구하며 저택 안으로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한다면 곤란하지 않나. 이곳까지 온 게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니까.
한 송이로 충분하다는 말에 청연은 끄덕이며 발을 옮겼다. 잎사귀 사이사이에 핀 수많은 장미를 한 번 훑어 본 청연은 가시마저 기세 좋게 뻗어있는 가장 싱그러운 한 송이를 꺾어내고 다시 걸음을 돌렸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도 됩니까, 집주인씨?”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무시였다. 청연이 건넨 장미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며 함박웃음을 짓기가 무섭게 그녀는 청연을 자신의 세계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린 것 같았다. 오직 세상에는 장미와 자신 뿐 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심 기가 찼지만, 여인은 싱그러운 장미의 향기를 한가득 만끽 한 다음 말없이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어 둔 건 따라 오라는 의미겠지.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나를 두고 장미만 보는 게 가당키나 하냐 속으로 궁시렁 거리던 것도 잠깐이었다. 곧 투덜대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활짝 젖혀둔 현관문이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쾅 소리를 내며 저절로 닫혔다. 절대 저절로 닫힐 수 없는 각도로 열어둔 문이었는데.
“......”
“왜 그래?”
“아니, 이 정도는 해야 재밌겠다 싶어서.”
청연의 요상스런 대답에, 앞서가던 여인은 그를 뒤돌아보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청연 쪽이 그녀를 무시하고 저택을 살폈다. 저택 안은 바깥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넓었다. 홀에는 정중앙에서부터 중앙 계단까지 긴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낡은 피아노와 오래된 나무 그네, 원목 테이블과 의자. 벽면에는 사슴 박제와 오래된 앤틱 식기가 진열 되어 있었다. 품위도 격식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갖춘 저택이었다. 다만 부족한 게 있다면 딱 하나다.
“아무 것도 묻질 않네? ‘알고’ 왔나 봐.”
“어느 정도는? 찾는데 애 먹었지.”
“...바깥에서 이 저택이 어떻게 불릴 지는 조금 궁금하네.”
“저주받은 저택이라고 불리고 있지. 매 해 여름마다, 공간의 틈을 비집고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신기한 저택.”
신기할 정도로 깨끗하고 정갈한 저택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없다. 단 한명도.
이 정도 되는 저택이라면 사용인 한둘은 있어야 정상이다. 좋든 싫든 너무 넓은 집이고, 그녀 혼자서는 감당 하지 못할 크기의 저택이니까. 그렇다는 말은?
소문은 사실이었나. 기쁨을 숨기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입가에 슬며시 걸리는 미소를, 청연은 애써 손으로 감춰 숨겼다. 앞서 걷고 있는 여인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게 퍽 다행이었다.
“저주받은 저택에 들어온 기분은 어때?”
“생각보다 멀쩡하다ㅡ? 사실 어떤 저택인지는 큰 흥미가 없어.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거야. 이 저택에서 얻을 수 있다고 들었거든.”
“어떤 걸?”
“불멸. 사람의 길을 벗어나는 방법.”
시간이 멈춰버린 저택. 어딘가라고 딱 잘라 짚긴 어렵지만 오래된 저택 특유의 목재 냄새와 세련되고 화려한 내부 장식이 소문을 뒷받침 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고개를 되돌려 희번덕인 여인의 시선.
그 시선이 청연에게는 확신으로 다가왔다. 정확한 긍정은 아니지만, 부정 또한 아니었다.
“얻을 수 있을지는 당신에게 달렸어.”
그렇게 말하며 여인은 멈추어 섰다. 여인의 시선은 청연이 아닌 벽을 향했다. 벽면에는 거대한 커튼 뿐이었다.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벽면을 거의 다 커튼이 가리다 시피 했다.
다만 청연의 눈은 커튼 사이의 작은 틈를 놓치지 않았다. 커튼 뒤에 있는 건 아무래도 그림인듯 했다. 미처 다 가려지지 않은 벽 너머 액자 안에는 구두 끝이 그려져 있는게 보였다.
불현 듯 여인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바라보던 벽이 아닌, 왼 편의 닫혀진 문을 가리켰다.
“자.”
하얀 손잡이가 인상적인 문.
“당신이 포기 할 수 있는 것들이 불멸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인지. 나는 그걸 계량하고, 환산 할 거야.”
편백나무 문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청연은 그 시선에서 의도를 읽었다. 원하면 들어가도록 해. 불멸을 간단하게 내줄 리는 없잖아.
청연은 코웃음을 쳤다. 같잖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부터 간단히 얻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벌써 십 오년간 쫓았다. 사람을 벗어날 길. 다시 확인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환멸을 뿌리치기 위해 발버둥을 쳐온 인간이다. 그 결과가 이곳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
“잊지 마. 모든 건 당신이 포기 할 수 있는 것들에 달렸다는 걸.”
조금은 차가운 어조였다. 그녀에게서 너를 지켜보겠다는 듯 시선이 따라 붙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청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편백나무 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고 힘껏 돌렸다. 힘을 주고 돌릴 필요가 없었다는 듯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청연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하게는, 이 장소를 ‘방’이라고 해도 좋을지 청연은 애매해졌다. 앞과 뒤 뿐인 새하얀 공간.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청연과 청연의 그림자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하얀 빛 뿐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또다시 알아서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때였다. 안쪽에서 동그란 빛망울이 튀어나와 청연을 스쳤다. 그 빛망울을 채 눈으로 쫓을 틈도 없이, 청연에게서도 어떤 기억들이 터져 나오며 자신을 덮쳤다.
그 기억은, 어느 한여름의.
유독 태양이 끈덕지게 따라붙던 정오에.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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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나무 문 저편의 빛망울에서 터져 나온 기억. 기억은 플래시처럼 터지더니, 청연을 스치고 지났다. 워낙 생생해서 잊어버리는 게 당연한 말 한 마디까지 전부 또렷하게 떠오르고 터졌다. 아무것도 없었던 하얀 방이 갑자기 형체를 갖춘다. 아주 잘 알고있는 형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으로 변하고 시간을 덮어 썼다.
“ㅡ다시 가지 않는 게 좋겠군.”
“갈 생각은 애초에 없다니까. 다만 좀 찝찝해서 그래.”
청연은 볼멘소리를 던졌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남자는 청연이 언짢다는 얼굴로 찧는 소리를 내던지면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럴 수밖에. 일단 애초에 이 남자는 ‘사람’이 아닌데다가, 그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갖췄음에도 숨기지 못하는 마물성을 품은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존재였다.
“자네도 느끼는 건 별로 없다는 건가? 스페치아.”
“이거 아무래도 날 편리한 저주 탐색기쯤으로 생각 하고 있나본데.”
“그 정돈 아니지만... 세상의 온갖 죄악은 다 품었다며? 내 왼손을 작살 낼 땐 언제고.”
“언젯적 이야기를 하는 건가. 그리고 내가 그런 존재라도ㅡ”
스페치아는 무어라 더 반박했지만 청연은 한 귀로 흘려버렸다. 잊을 것 같냐고. 하마터면 누이의 명예를 더럽힐 뻔 했던 일을 꺼내며 청연은 멋대로 쫑알댔다. 스페치아가 반론을 구구절절 제기하는 와중에도 내심 참, 잘도 기억하고 있구나 싶어 청연이 멋대로 감탄한 건 비밀이다.
이미 몇년 전의 일이다. 화가 나서 스페치아에게 함부로 남의 기억은 엿보지 말라며 밀어붙였던 날. 불쾌하고 무례한 옆집 존재들에게 왼손이 작살나버렸던 기억을 돌이키자 뒷맛이 썼다. 청연은 괜스레 왼손을 한 번 흘끔거렸다. 과산화수소를 들이붓던 무지막지한 마물을 향한 투덜거림은 평생 가지고 갈 작정이었다.
“아~ 몰라! 나는 불만은 두고두고 잊지 말자는 주의거든. 원한 사면 고달프단 거나 알아둬.”
하늘이 찢어졌던 날로부터 벌써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소식이 끊긴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연락이 닿을 때 마다 무턱대고 술이나 마시러 오라며 저지르고 보는 존재도 있다. 그리고 이 남자와의 인연은 아마도, 평생 가겠지. 자신과 달리 이 남자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영원을 논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 존재는, 조금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확신을 담은 어조는 아니었지만 무시 할 순 없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당신의 기억에 혼선이 온 것 같은데. 청연은 오히려 의문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난 멀쩡한데?”
“설명하기 어려워. 뭔가가 뒤틀려 있다.”
“무슨 소리야?”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 했잖아. 뭘 하고 왔길래 이런 상태가 됐나.”
“그건 나야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가장 마지막 기억은?”
“저택 안에서, 장미를 봤어. 그거 외엔 모르겠어서 내 주변에서 일단 가장 초월적인 존재를 불러본 거라고. 자네가 모르면 나도 모르는 거야 이거.”
다소, 아니 상당히 뻔뻔한 대답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스페치아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긴 했으나 더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어, 하는 뒤늦은 안부를 건네고 말을 주고 받길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도 두 사람의 앞에 놓인 국화차가 바닥을 보일 때 즈음이었을 거다. 자리를 먼저 뜬 건 멀리서부터 찾아온 스페치아였다. 그는 코트를 입고 넥타이를 한 번 매만지더니 청연을 흘겨보며 말했다.
“당신이 간단히 소망을 포기 할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래도 적당히 하는 게 좋겠군.”
“답잖게 잔소리는.”
“ㅡ새겨들어라.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혼자가 아니잖아. 그 말이 묵직하게 가슴을 때리고 갔고 나는 분명 뭐라고 대답했을 텐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째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스페치아가 가리키는 대상. ‘그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고, 잊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다. 이렇게 선명하게 모든 걸 회상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기억하고 있어야 할 텐데.
그 때, 나는 무슨 대답을 했더라. 도통 기억나질 않는다. 의아해하는 청연을 두고, 기억은 계속 플래시처럼 멈추지 않고 터져 나왔다.
“꽤 걱정 해 주는 건 고맙네 그래.”
“물론. 이 나는 당신의 친우니까.”
“...”
그 확실한 대답이 새삼스럽게 다가와서 기억 속의 청연은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도, 멋쩍음도 아니었다. 그저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 앞의 사내는 어쩌면 정말로, 자신과 평생 인연을 이어 갈 수도 있다.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마물로 태어나선 안 되는 존재였다. 마물의 삶을 뒤집어 쓰며 살아가기엔 너무 상냥했고, 가까이에서 추억을 쌓으며 달래주기엔 마물로서의 삶에 새겨질 추억이 영원히 그를 괴롭힐 고독한 존재다. 자청연이라는 사내가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던 과거도, 마음도, 이면까지도, 모조리 알면서도 친우라고 칭해 주는 존재. 삶에서 뜻밖에 만나버린 악우.
“고맙네.”
헤어짐은, 아마도 웃음을 머금은 채였던가. 둘 다 그 이상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뭐 이렇게 훈훈하게 끝나는 건 우리답지는 않지ㅡ 악담이나 하며 배웅 해 줄 테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 스페치아를 배웅 하던 것으로 이 기억은 닫혔다.
청연은 아련한 기억의 끝을 더듬었다. 하지만 실크의 올이 거침없이 풀리듯 기억의 타래는 도통 끝을 보이지 않았다.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포기한 이유는 왼쪽 다리가 맹렬하게 아파지기 시작해서였다. 너무 오랜 시간 멍청히 서있어서 그런가. 기억나지 않은 걸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별 수 없지. 청연은 걸음을 돌려, 이 편백나무 문으로 들어온 방을 나가려 했다.
그 순간 뒤이어 다른 기억이 그를 덮쳤다. 들어 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편백나무 문 뒤편에 숨겨져 있던 까만 파편 같은 기억이다. 파편은 그의 볼을 날카롭게 스치고 갔다.
그건 청연의 기억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
아마 이 저택의 주인인, 그녀의 기억이다.
- 아름다우신 분.
흐트러지게 핀 장미의 정원.
남자는 정원. 여자는 발코니에서.
- 부디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런지요.
- 주변에선 나를 독고 아가씨라고 부르더군요. 당신도 그렇게 부르도록 해요.
- 아뇨, 저는 당신의 이름이 궁금합니다.
무저갱을 훑으며 살았던 고독한 여인에게 남자는 처음으로 이름을 물었고.
- 소문대로 이상한 남자네요. ...윤. 독고 윤.
- 예상대로 예쁜 이름이로군요.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 이름을 밝힌 듯 했다.
-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윤.
- ... ...
- 윤 아가씨. 제가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 해 주시겠습니까.
남자의 시선은 다정했다. 무저갱 속에서 살던 여인을 생생한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올릴 정도로.
그 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청연이 봐도 알 수 있었다.
곧, 두 사람은 현기증이 나도록 사랑을 한 것이다. 이 장미의 저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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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천히 편백나무 문을 열고 돌아온 청연을 반겼다. 다만 건네는 말은 퍽 차가웠다.
“어서와. 계량이 끝났어.”
방 안과 밖은 공기가 달랐다. 초여름의 공기처럼 후덥지근했던 방 안과 달리, 바깥은 싸늘하기 까지 했다. 그 차가운 기운이 나쁘진 않았다. 청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녀가 했던 것 처럼,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왼쪽 다리쯤은 되는데? 그렇게 값싸질 않네. 의외야. 싸구려일 줄 알았는데.”
“...어떤 가치였지?”
“버팀목. 희망. 꿈. 타인과의 관계. ㅡ당신이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것.”
환산 해 보면 이 정도는 되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청연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바닥의 카페트 위에서는 크고 분명하게 숫자가 그려졌다. 숫자는 52.
“하지만 그걸론 부족해. 응, 부족하고말고.”
과연 저주받은 저택답게 기기묘묘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군 그래. 청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필름을 재생 한 것처럼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회상과,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 적히는 숫자라니. 52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집주인이 원하는 만큼 충족하질 못했나보다. 청연은 쌜쭉하게 입을 내밀곤 으쓱였다.
“어차피 이걸로 끝은 아닐 것 같은데.”
“당연하지. 따라와.”
그녀, 독고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음을 돌려버렸다. 뒤 따라 가려던 청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따라 올라 가기 전 벽면의 커튼을 한 번 걷어보았다.
먼지조차 날리지 않는 커튼의 뒷 편. 벽에는 커다란 액자 안에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초상화의 주인은 청연이 방금 전 본 사람들이었다. 독고 아가씨와, 그녀의 이름을 물은 남자. 다만 그녀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초상화 안에는 그림으로도 차마 숨길 수 없는 행복과 사랑이 있었다. 하얀 드레스에 금색 실로 수놓인 우아한 드레스 차림. 그림 속의 독고 아가씨는 차가운 미소는 지어 본 적 없다는 듯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복을 입은 미망인마냥 까맣게 차려입은 지금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 ... ...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독고 아가씨가 부른 목소리겠지.
청연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