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세레

Love is like a movie

RSW 2017. 5. 3. 03:34

 


몇 가지 예감이 들었다. 

곧 너와 함께 잠들고 일어나는 걸 좋아하게 될 거란 예감.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얼마나 밝은지를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최소 아침 여덟시다. 이렇게까지 몸이 가볍다면 족히 여덟시간은 잔게 분명하다. 그야 그렇겠지 네가 있으니까. 청연은 조심스럽게 잠들어있는 유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새삼 긴 머리카락이었다. 채도 옅은 새벽빛의 연보라색. 어두운 새벽밤을 몰아내고 아침을 찾아오게 하는 색.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다. 네가 나의 어두운 새벽을 몰아낼 사람이 될 거라곤. 


자기 전 까지만 해도 나른했던 몸이 제법 가벼웠다. 이 정도로 컨디션이 좋은 날은 일어나기 무섭게 곧장 트레이닝 룸으로 직행하곤 했다. 재밌는 건 트레이닝 룸으로 가는 길에 불러 낼 사람이 지금 옆에서 깊게 잠들어있다는 거다. 청연은 살짝 떠오른 트레이닝 계획을 단박에 구겨버렸다. 그리곤 픽 하고 웃음이 터지기가 무섭게 조금 더 유환을 끌어안았다. 


유환은 곧장 더 깊게 안겼다. 아직 잠들어 있는 건 분명한데도, 따뜻함이 기분 좋다는 듯 항상 품 안으로 깊게 들어온다. 앞머리가 살짝 흔들릴 때마다 이마 안쪽까지 낱낱이 보이는 이 거리가 좋았다. 숨을 깊게 들이 쉰 다음, 아주 천천히 내쉰다. 다른 사람의 체취를 깊게 맡아 본 적도 없었고, 그걸 좋다고 느낀 적도 없었는데. 신기한 일이다. 청연은 아직 김유환이라는 사람을 전부 다 알지 못하지만, 알 수 있었다. 유환은 최소한,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깊게 잠들 사람은 아닐 거다. 남과 같은 방을 쓴 적이 없다던가, 하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였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닮아있다. 타인과의 거리를 철저하게 그어둔다는 점에서는 특히.

그러니까 신기한 일이지. 너와 지내게 된 이후로는 거의 대부분이 신기한 일 투성이다. 마음을 확인하고 네 손을 이끌기 시작 한 날부터는 모든 일이 무대 위에서 어지럽고 아찔하게 벌어지는 일들 뿐. 예를 들면 네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 함께 누워서 잠을 청하게 된 일도, 내가 누군가와 밀착하게 된 이 거리를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게 된것도 전부. 

청연은 유환의 이마에 제 이마를 툭 하고 들이댔다. 유환은 예상보다 굉장히 얌전히 잠이 드는 사람이었다. 숨 쉬는 소리도 자신보단 작았고, 뒤척거리는 일도 적은 게 자신과는 반대였다. 그래도 이 거리라면 분명히 들린다. 가만 듣고 있으면 하루 종일 잘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마는, 천천히 들이내쉬기를 반복하는 느린 숨소리. 안정을 가져오는 호흡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예감을 무시 할 수 없어진다. 

곧 너와 함께 잠들고 일어나는 걸 좋아하게 될 거란 예감을. 이 닿을수 있는 거리와, 눈 앞의 상대를 정신없이 사랑하게 될 거란 직감을.



"ㅡ... ..."

"잘 잤어?"

"...응. 좋은 아침 청연."



마치 영화처럼, 주연 배우는 너와 나. 결말은 약속된 해피 엔딩으로 하는 게 좋겠어. 

청연은 잠이 조금 덜 깬 얼굴로 웃는 유환의 눈꺼풀 위에 키스를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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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는 간단하게 식빵이었다. 된장국을 끓이거나 김치찌개로 따끈한 밥을 먹기엔 두 사람 다 부엌과는 퍽 어색한 사이다. 우유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 청연은 말 없이 안심했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된 만큼 냉장고에도 변화가 필요한 걸 지도 몰랐다. 뉴스를 틀어놓고 꺼낸 딸기잼과 블루베리잼, 크림 치즈. 유환은 딸기잼을 골랐고, 청연은 셋을 전부 섞어 발랐다. 빵을 절반 정도 먹어 치우는 동안 대단히 화창한 날씨임에도, 아니 화창한 날씨였기에 더욱 유환의 얼굴이 실망에 잠겨 있었다.



"얼굴 펴게. 어쩔 수 없잖나. 응?"

"그래도... 모처럼이니까 더 더워지기 전에 가고 싶었는데."



십분 전, 깔끔하게 씻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유환은 짜증 섞인 한숨을 뱉었다. 휴가, 역시 안된대. 그렇게 말하며 젖은 수건을 걸어두던 유환의 옆 얼굴은, 머리카락이 절반을 가리고 있어도 역력한 실망의 선연했다. 


대영청에서도 최전방에 서는 알파팀은 마물퇴치의 핵심이다. 다만 체력의 한계가 있는 요원들과 달리, 마물들은 타이밍 딱딱 맞춰 출몰 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24시간 중 시간을 정해 출근 후 대기하며, 현장으로 나갈 때는 베타팀과 감마팀과 함께 움직인다. 한 술 더 떠 앞선 팀이나 다른 팀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 온다면 출근 중이 아니더라도 튀어가야 하는 등, 상당히 성가신 근무체계였다. 법정 근무시간 따위 개나 주라는 배짱. 과연 대영청 아닌가. 

직위야 공무원이라지만 대영청 요원들은 흔히 정시퇴근 하는 철밥통 이미지와는 180도 달랐다. 둘이 함께 휴가를 맞춰 보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타이밍을 맞춰 제출한 휴가였지만, 반려당하고 나자 기운이 쭉 빠진다며 앓는 소리를 하는 유환의 머리를 청연이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차라리 맞춰서 연차를 낼까. 휴가는 캔슬 당하지만 연차는 그래도 좀... 어떻게 되니까?"

"자네 시간에 내가 맞춰 볼게 그러면. 짬밥이야 내가 좀 더 찼으니까ㅡ"



말은 그렇게 했지만 힘들 거란 걸 청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분명 유환보다는 청연이 대영청에 들어온 근속햇수가 더 길지만, 휴가를 맞춰서 내는 건 다른 문제다. 섣불리 알파팀의 중요 전력들을 나란히 휴가 보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라도 터지면 누가 책임 질텐가. 다만 유환이 그 말에 조용히 끄덕였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청연으로서는 계속 풀 죽어 있는 유환의 모습은 그다지 보고싶지 않았다. 



"계획 다 짜뒀는데... 아깝다."



못내 아쉬운 얼굴로 유환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표만 끊어두지 않았을 뿐 말마따나 계획은 완벽했었다. 숲속의 정원을 테마로 해 뒀다는 춘천의 어느 야간개장 공원이 TV에서 나온 게 계기였다. 당일치기는 너무 짧고, 하다못해 1박 2일이라면 다녀 올 수 있지 않겠냐는 청연의 말에 불이 붙은 유환은 상당히 의욕적이었다. 

대체로 여행에 앞서 큰 틀만 짜놓고 심하게 무계획적인 자신과 달리, 유환은 스마트폰으로 재빨리 장소와 잠 잘 곳 까지 알아보는 행동력을 발휘했다. 그 동안 옆에 있던 청연이 한 거라곤 고작 춘천의 렌트카 번호를 알아낸 것 정도였다



"청연은 아쉽지 않아? 왠지 나만 실망 한 거 같아."

"그럴 리가 있나. 도심 한복판에서 마물퇴치하러 언제 튀어 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과 춘천의 봄내음을 만끽하는 것 중 어느게 더 좋냐고 물어보면 답이야 나와있지."

"그건 그렇지만."



보통 아쉬운 게 아니었나보다. 청연은 웃으며 텅 빈 식빵 봉투를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확실히 사귀게 된 이후엔 오히려 전보다 밖으로 나갈 일이 적어 졌다. 그도 그럴 게 교대 쪽의 본청이 날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온천과 스키장이 딸린 MT, 하얏트 호텔을 빌렸던 행사들이 가능했던 그만한 인프라가 받쳐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건물째로 날아간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기반 시설 재건과 결계 보수 작업을 동시에 해내는 와중에도 마물은 꾸준하게 나타났고, 전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덜 할 것 없는 사정이었다. 그나마 지방청에서의 지원이 속속 늘어나고 있었지만 설비가 부족한 상황이니 일이 더 쉬워질 리 없었다. 청연은 빈 접시 위에 다 쓴 냅킨을 올려 둔 유환을 향해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자네가 옆에 있으면 됐어. 같이 놀러 갈 기회야 계속 생길 테니까."

"으음ㅡ... 묘한 곳에서 어른스럽게 대답하네."

"어른이네만?"



테이블에 기댄 채 작은 기지개를 켜던 유환이 청연을 빤히 바라본건 잠깐이었다. 유환은 곧 푸흐흐, 하고 청연이 자주 보게 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래. 대신, 오늘은 청연이랑 같이 놀래. 실컷 뒹굴거리면서."

"좋지. 대신이라고 할 것도 없이, 내가 바라던 거야."

"내가 아니면 누가 청연이 형 마음을 알아 주겠어?"



유환은 사용한 식기를 들고 자리에 일어났다. 그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이번에는 청연 쪽이 웃어버렸다. 마침 잘 됐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겠지. 아마 너는 새로 사고 싶어진 토스트기나 침대에 대해서 확실한 의견을 내 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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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에 관심 생겼다는 거 진짜였구나."

"응? 내가 가짜로 말한 적 별로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생각보다 두꺼운 가구 제품 카탈로그를 가져오자, 유환은 조금 당황한 듯 했다. 청연은 콧노래를 부르며 소파에 앉았다. 곧 포스트잇으로 체크 해 둔 페이지를 휙휙 넘기자, 유환이 제법 흥미로운 눈으로 옆에 앉아서 카탈로그를 훑었다.



"기숙사야 빌려 쓰는 입장이니까, 가구 쪽을 바꿔야겠지. 마음 같아선 발코니부터 확장형으로 바꾸고 싶은데."

"내부 공사는 안되지."

"네이."



기운 빠지는 대답에도 유환은 픽 웃을 뿐이었다. 이미 다음 이동 시기때는 무조건 2인실로 해 달라고 델타팀에게 생짜를 놓고 온 뒤였다. 과연 유환은 하나 뿐인 연인이 배정 해 주지 않으면 업무상의 심각한 지장을 초래 할 거라며 뻔뻔하게 요구하고 온 뒤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뭐 몰라도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금방 여름이다. 주문은 하반기 이동에 맞춰 하는걸로 하고, 일단은 필요 한 것 부터 고르기로 한다. 



"뭐가 필요 할 것 같아?"

"내가 골라도 돼?"
"자네하고 같이 쓰려고 고르는 거니까."



빠른 납득. 유환은 곧바로 끄덕였다. 곧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는 옆모습이 약간 진지해졌다. 청연의 어깨에 습관처럼 머리를 기댄 채 페이지를 넘기는게 불편할 법도 한 자세였지만, 본인은 오히려 편한 것 같았다. 



"일단은, 신발장? 청연이랑 내 신발 합치면 두세켤레론 안 끝날테니까..."

"아. 그렇네. 비슷하게 옷장도 하나 사면 되겠어. 압축팩 같은 걸로 계절 지난 옷은 넣어버리면 되니까."

"응. 청연은 더 필요 한 거 없어?"



유환의 질문에 청연은 가만히 거실을 훑어 보았다. 거울은 괜찮을 테고,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건 전부 있다. 필요 한 건 전부 안방에 있으니 지금까진 수납공간이 모자라지 않았지만...



"글쎄... 자네랑 공간을 같이 쓰게 되는 거니까... 수납장 겸 책장? 아, 행거도 하나. 자네 모자 걸어둘 곳이 없어."

"괜찮은데."

"안 돼. 그거랑, 아까 생각 한 거지만 새 토스트기가 가지고 싶어."



따끈한 빵이 먹고 싶었구나. 유환이 그렇게 말하자 청연은 말 없이 핫핫핫 웃어버리기만 했다. 약간 민망해져서 끌어 안은 건 비밀이다. 이왕이면 따뜻한 게 더 맛있지 않겠냐는 말을 덧붙이자 유환 알겠다는 듯 웃기만 했다. 

주방가전 쪽으로 카탈로그를 넘기자 이번엔 청연도 유환도 좀처럼 모르는 세계가 펼쳐졌다. 청연으로서는 녹즙기가 가정용으로 보급 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유환이 찾아 낸 주방가구 베스트 순위표를 발견 하지 못했다면 눈알이 핑글핑글 돌았으리라. 이해 할 수 없는 글자가 너무 많다며 푸념을 늘어놓자 유환이 동의 해 준게 다행이었다. 하얗고 가는 유환의 손가락이 글자가 잘 보이도록 카탈로그를 짚었다. 에어 쿠킹 머신과 에스프레소 머신에는 두 사람 솔깃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엔 밥솥부터 없다는 냉정함을 되찾자 함께 침묵하고 말았다.

한 번 카탈로그를 보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다 공기 청정기와 칫솔 살균기. 평소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물건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청연이 했던 말, 좀 알 거 같아. 막상 사려고 하니까 욕심이 계속 늘어나네."

"그렇지ㅡ거봐. 그렇다니깐?"



연인의 동의를 사는 건 기쁜 일이다. 청연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볼펜으로 카탈로그 한쪽 귀퉁이에 재빨리 메모했다. 곧 만족스러운 얼굴로 펜을 치운 청연은 금방 자세를 무너트려서 유환의 무릎 위로 엎어졌다.



"ㅡ화병이랑, 액자?"

"응. 자네 사진 찍는 거 싫어하나?"

"딱히 그렇진 않은데."

"자네의 부끄러워 하는 사진을 잔뜩 찍어서 진열 해 둘거야."

"와- 악취미. 누가 찍게 내버려 둘까봐."



카탈로그를 옆으로 치운 유환은 곧 엎어진 자신을 가만 쓰다듬으며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걸 본인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네 의도를 잘 모르겠단 말이지."

"의도는 원래 간결하고 묵직한 거야. 선전포고ㅡ랄까."

"흐응... 내 부끄러워하는 사진을 잔뜩 찍겠다?"

"가능하면, 열과 성의를 다해서."



청연은 유환이 치운 카탈로그를 누운 채로 넘겼다. 몇십장이나 넘기고 나서야 겨우 침실 가구 카테고리가 나왔다. 침대는 사이즈별로 주문이 가능하다는 페이지였다. 샘플이 너무 많으니 오히려 고르기가 힘들다. 

그 때였다. 카탈로그를 넘기던 청연의 시선 안으로 유환이 한가득 들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어두워진 시야, 그 다음에는 속눈썹까지 한 번에 보이는 거리. 곧 부드러운 감촉이 청연의 입술을 쓸고 가더니, 부러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가까이에 붙기가 무섭게 깊은 체취가 숨 속에 섞이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자네 이 타이밍은 좀 반칙이지."

"열심히 해 봐 청연ㅡ?"



선전포고는 이쪽이 당한 셈이다. 청연은 내심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기술 어디서 익혀 온 건데 대체. 새 침대를 사고 나면 두고 보자는 삼류 악당의 치졸한 대사를 간신히 목 안으로 삼키며 청연은 유환을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새 토스트기와 침대, 어느 쪽도 정하지 못했지만 자업자득일지도 모르겠다. 두고 보자고 정말로. 청연은 카탈로그를 완전히 덮은 후 뺨을 쓸어주는 유환의 손을 잡고 티비를 켰다. 자주 보는 케이블 채널에서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 재방송중이었다. 왁자지껄한 티비의 효과음은, 어디까지나 배경음으로. 평온한 하루를 영화처럼 만끽하며 유환의 무릎을 차지한 청연은 말갛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