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으로 단판 승부!
그 사소한 포인트를 집어낸 건 가장 마지막에 리허설을 끝낸 아이였다.
미카제 아이가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시간을 보니 진즉 레이지가 스탭들 몫까지 도시락을 전부 돌렸을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기실에는 레이지를 비롯한 카뮤와 란마루가 이미 자리를 잡고 휴식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대기실에 들어서자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얼굴들이 아이를 반겼다. 저를 힐끔 보고 마는 란마루나 각설탕 포장을 까는데 여념 없는 카뮤, 끼니를 거르면 키가 안 큰다는 오지랖까지 발휘하며 도시락을 들이대는 레이지를 전부 무시하고 아이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녹화가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곡을 체크 해 보려고 했는데. 잠깐만.
아이의 시선이 잠깐 테이블을 위에서 란마루 쪽으로 옮겨갔다.
“란마루가 도시락을 남기다니 별 일이네. 아니, 손도 안댄 거 아냐?”
“뭣이라고라?!”
억 소리를 내며며 자리에서 란마루 쪽이 아닌 레이지였다. 대기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레이지의 목소리 탓인지 카뮤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아이의 말에 깜짝 놀란 레이지는 한걸음에 달려가서 란마루의 테이블을 보았다. 놀랍게도 아이의 말이 사실이었다. 레이지가 직접 대기실을 돌아다니며 나눠주었던 고토부키 도시락은 고무줄로 묶인 상태 그대로 란마루의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었다. 레이지는 입에 파리가 들어 갈 만큼 입을 떡하니 벌리곤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란란 설마 편식 하는 거야? 그런 나쁜 습관이 들어버리다니 형은 슬퍼요!”
“시꺼. 누가 형이야! 편식 같은걸 내가 할 리가 없잖아. 지금 밥 먹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럼 뭐야, 업계 No.1 고토부키 도시락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단 말이야? 말 해줘! 말 해줘!”
“흔들지 마! 젓가락 떨어질 뻔 했잖아!”
하여간 기폭성 유전자를 타고난 란마루와 도화성 유전자를 타고난 레이지의 조합은 항상 이렇다. 아이는 이미 입력 되어있는 수 십 가지의 대화 패턴 중 또 한 가지를 추가하며 한숨 쉬었다. 슬쩍 옆을 보자, 이 광경에 익숙해진 카뮤는 한 편의 촌극을 관람하듯 우아하게 티 컵을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종이컵 밖에 없는 촬영 현장에서 티 컵을 어디서 꺼내 온 건지는 궁금하지만 지금은 그것 보다 더 우선순위 높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으니 무시하자. 란마루가 도시락을 남긴 이례적인 상황은 퍽 아이의 흥미를 자극했다.
“란마루 설마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야? 얼핏 보기엔 체온은 평소와 똑같은데.”
“아이아이, 체온은 눈으로 보는 게 아녜요. 재는 거야 재는 거.”
“쯧. 내가 체력 관리 하나 못 할 것 같아? 레이지 너도 유난 떨지 마. 원래 도시락 두 개 정돈 가뿐 하게 먹는 단 말이다.”
란마루는 그렇게 말하며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도시락을 손에 들었다. 분명히 성인 남자에게 도시락 두 개는 양이 많긴 해도, 세간에서는 란마루의 나이를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표현한다. 본인도 호언장담 하며 먹고 있으니 정말 두 개를 다 먹을 생각인가보다.
이어 아이는 흥미로운 단서를 포착했다. 방금 전 까진 등을 보이느라 몰랐지만 란마루가 들고 있는 핑크색 찬합은 1회용 용기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두 개 라니, 보통 도시락은 하나만 먹었잖아? 란란이 준비된 도시락을 놔두고 직접 사 올 정도로 맛있다는 도시락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어디야? 어딘데? 알려줘! 알-려-줘- 란란!”
“진짜 시끄러워…식사 때 정돈 조용하게 있으라고 좀….”
“아무리 대단한 브랜드가 나와도 고토부키 도시락은 지지 않아요! 라이벌 도시락은 우선 철저하게 분석 해 봐야지! 가는 길에 포장 해 가게 알려줘! 도시락 넘버원의 자리는 넘기지 않겠어!”
“그거 결국 상대편 매상 올려주는 거잖아?”
아이의 날카로운 한 마디는 레이지를 향해 날아갔지만, 정작 본인은 란마루를 방패삼기라도 했는지 어깨를 잡아 흔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윽고 란마루는 귀찮게 구는 레이지를 떼어내지 않는 이상 밥알 하나도 편하게 못 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손을 뿌리치며 으르렁거렸던 것도 잠시. 란마루는 촐랑거리는 레이지를 앞에 두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답지 않은 샐쭉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브랜드 나나미 하루카다. 뭐 불만 있냐. …덤빌 테면 덤벼.”
“결판났네.”
“결판났군.”
“……졌습니다. 안 덤빌게요.”
단판 승부에서 화끈한 백기 선언이다. 레이지가 얌전히 자리를 돌아가는 걸 보고 썩 만족스런 표정을 한 란마루는 남은 점심시간 동안 정말로 가라아게 도시락까지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비웠다. 얼핏 계산 해 본 칼로리는 굉장했지만, 아무렴 아이라고 한들 카뮤를 옆에 두고 칼로리를 운운하긴 힘들었다. 게다가 아이돌의 스케쥴이란 꽤 야멸찬 편이니까.
옆구리가 시리다며 칭얼거리는 레이지를 무시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핑크색 찬합을 챙기는 란마루를 아이는 가만 지켜보았다. 하여간 그 애와 엮이면 란마루의 패턴은 예측이 힘들어지는 바람에 피곤해진다. …아마 내일 날부터 레이지가 란마루의 찬합 도시락을 노리기 시작할 확률은 너무 높으니, 굳이 설명 해 줄 필요 까진 없겠지.
아이는 가만히 냉각 시트를 붙인 채, 또다시 긴장 풀린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란마루를 시선으로 쫓다가 눈을 감고 남은 휴식 시간을 만끽 했다. 하여간 연애하는 인간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존재라니깐.